민주주의는 고결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민주주의라는 건 형식일 뿐이다. 그 틀 안에 어떤 내용을 채워넣느냐에 따라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다. 형식이 그 안의 내용까지 담보해준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플라톤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민주정을 걱정스럽게 봤던 건 단지 스승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레짐이었지만 그에게 자유라는 건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에 불과했다. 좋은 것에 대한 자유가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에 대한 자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유의 무분별한 추구는 불필요한 욕구를 만들어 정체를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우정치가 등장하는데, 인민의 다수를 이루는 빈자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대중선동가가 출현하여 그들의 욕구 충족을 실현시켜주는 듯 행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중선동가는 인민의 주지자를 자처하며 초기에는 전체의 이익을 실현시켜주지만 권력맛(플라톤의 표현으로는 '피맛')을 본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참주(tyrannos, 독재자)로 변해갈 수밖에 없다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무려 2천 년이 지난 시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이슈의 중심에 서는 '무상'시리즈들. 심지어는 우파를 표방하는 집권정당마저도 포퓰리즘(이 용어선택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논쟁이 많지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무상급식을 페로니즘이라 비난했지만 정작 선거가 다가오자 그 자신부터 무상보육, 무상돌봄교실, 노인연금, 반값등록금 같은 선심성 공약을 마구 내던졌다. 물론 구체적인 재원 조달 방안은 뒷전이었다. 그 결과 지자체에서는 유례없는 예산 부족 사태를 겪고 있고, 연금 공약은 채 한 해도 채우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자타칭 우파 정당이 이러할진데 나머지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다하다 이제는 무상버스까지 등장했다.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외면한 채 선심성 복지 공약만 내세우는 건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를 게 없다. 

포퓰리즘을 남발하는 보수 양당 체제를 만든 건 애석하게도 우리 자신이다. 복지 지출이 늘어나면 세입 또한 늘어나야 하며, 줄푸세와 무상시리즈는 동시에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자명한 사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간단한 상식을 외면하고 있다. 정치라는 것엔 관심을 끈 채 눈 앞의 이익만 좇고 있는 것이다. 인민people들이 이런 세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플라톤의 우려처럼 중우정치로 빠지게 되고 특정한 지배층을 고착화시킨다. 인민의 우매한 선택이 부메랑이 되어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어떤 이들은 정치에 올바른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굉장히 극단적이고 위험한 발상이지만, 왜 이런 주장이 나오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건 나쁠 것 없다고 본다. 그만큼 민주주의라는 건 불완전하고 언제 타락할지 모르는 정체다. 중요한 건 이를 유념하고 경각심과 책임감을 가지는 거다.

[3] 덧붙이자면, 함익병의 발언에 대해서는 크게 열을 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원래 의사들의 인문학적 식견은 딱 교양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니까. 플라톤이 철인왕 개념을 만들었던 건 (민주정이 아닌) 참주정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독재의 정당성 획득에 철인정치를 결부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이미 반 세기 전에 폐기되었을 뿐더러 <국가>의 일부분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그런 언급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뭐라 할 건 없다. 앎의 깊이가 얕은 게 죄가 되는 건 아니니까. 다만 태도가 문제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일까. 간혹 의사들 중에는 본인 전공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분과에까지 아는 척을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문제는 대부분이 그저 아는 척의 수준에서 머무르고 만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