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단조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직장, 학교, 집, 혹은 카페와 식당.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 하루를 반복한다. 우리의 뇌는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면 그 일상은 기억에서 없던 것으로 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갔다거나 특별한 이벤트를 겪었던 게 아닌 이상 일주일 전 혹은 한 달 전 이 시간에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 못하는 것도 그 시간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된 일상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기억이 공백으로만 남겨질 경우 허무, 권태, 무기력 등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간접경험이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단조로운 일상만이 반복되는 경우 허무, 권태 등으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기 쉽지만, 그렇다고 먹고 살아가기 바쁜 이들이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새로운 자극을 받고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할 수는 없다. 대신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TV를 보고 영화관에 가고 책을 읽고 게임을 한다. 이렇게 간접경험을 통해서나마 기억의 빈자리를 채워나가야만 앞서 말한 허무, 권태 등으로부터 벗어나 즐겁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간접경험이 제일 필요한 이들은 누구일까. 성장하는 아이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성장기의 간접경험은 자아 발달에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이미 다양한 간접경험을 하고 있다. 동화, 애니메이션, TV, 영화, 소설, 게임 등등. 사실 어느 세대보다도 많은 간접경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풍부한 간접경험의 콘텐츠를 수용하는 게 요즘의 어린 세대들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 TV나 극장을 통해서만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었던 반면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동영상을 본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간접경험이 제일 필요한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노인세대들이다. 이들은 시대적인 환경부터 요즘 세대와 많이 달랐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간접경험을 누리는 데 많은 제약이 있었다. 물론 경제활동을 하는 시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말 그대로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은퇴를 해야 하는 시기가 오자 문제가 생겼다. 경제활동을 멈추는 순간 그들의 일상 자체가 텅 비어버린 것이다.

노인들이 탑골공원 같은 곳을 전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할 게 없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나 학생을 집 안에 두면 혼자 TV를 보든 스마트폰을 하든 컴퓨터로 게임을 하든 열심히 시간을 보내겠지만, 노인 혼자 집 안에 있으면 할 수 간접경험이 거의 없다. (현재의 노인 세대는 PC 이용률이나 독서율 모두 낮은 편이다.) 결국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자꾸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단지 공원 같은 곳에 나와 장기나 바둑을 두고 경로당 같은 곳에서 또래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으로 그 공허함을 메우려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그들의 자리(무대의 뒤편)로 돌아가길 거부하기도 한다. 꼰대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무대의 중앙을 뺏기지 않기 위해 세대갈등을 부추긴다. 예를 들면 태극기부대의 노인들처럼.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단조로운 일상만으로 살 수 없다. 기억의 공백으로부터 오는 허무, 권태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한 발 물러나 있는 노인들에게 일상이란 더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또한 여행이나 체험 같은 직접경험을 할 수 있는 체력이나 금전적인 여건이 부족하기도 하다. 따라서 시간은 많지만 여건이 안 되는 노인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건 간접경험이다. 간접경험을 통해 기억의 공백을 메우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주 세대가 청소년들이 아닌 노인들이 되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PC나 스마트폰에 익숙한 요즘의 세대가 나이 들고 은퇴하고 어렸을 적 하던 온라인 게임 등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 상에서 유저들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활동의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고, 체력이 쇠퇴할 수밖에 없는 시기에 게임 속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건장한 캐릭터는 큰 대리만족을 안겨줄 것이다. 무엇보다 비용도 적게 들고 육체적으로 큰 소모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온라인 게임은 그 특성상 청소년보다는 노인에 더 적합한 간접경험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광화문 거리의 태극기부대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온라인 게임이 아닐까 싶다. 은퇴 이후의 삶으로부터 오는 헛헛함을 ‘나라 걱정’이라는 (헛소리에 가까운) 왜곡된 피해의식으로 채우기보다는 차라리 게임을 하면서 간접경험의 시간을 갖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 게임은 주변에 폐를 끼치지도 않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보다 재밌는 일이기도 하다. 도심 한가운데서 베레모와 군복을 입고 거수경례를 할 바에는 차라리 게임을 하면서 가상의 적과 전쟁을 벌이는 게 나을 거다. 태극기부대의 손에 들려야 할 건 태극기(또는 성조기)가 아니라 컴퓨터 마우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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