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 비주류, 약자 등 소위 진보라는 정체성을 자처하는 이들. 그들은 세상을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본다. 틀린 관점은 아니다. 세상이 불공정한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바로잡기 위한 관점에는 차이가 있다. 문제를 구조 중심으로 인식하는 관점이 있는 반면, 문제를 가해자 중심으로 인식하는 관점도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문제의식에 가까운 반면, 후자는 피해의식에 가까운 개념이다.

피해의식은 자기가 항상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받고 있다는 강박에서 연유된다. 진보의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의식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기도 하다. 진보라는 가치는 사회적 약자로서 체득한 경험을 관념적 유산으로 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불편한 감정이지만 동시에 편리한 핑계가 되기도 한다. 책임 전가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말하는 노예의 도덕처럼. 그래서 때로 피해의식은 '불행배틀'을 벌이듯 일종의 벼슬이 되기도 한다.

피해의식에 기반한 진보의 관점에서는 가해자를 상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 한국의 진보사회가 권위주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타자화했고, 진보적 정권이 집권한 후 이제는 남성을 타자화하는 것처럼. 대상을 비판하지만 동시에 그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 없는 피해자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정당성이 부족한 정권이 외부에 있는 공공의 적을 상정하는 것처럼.

폐쇄적인 특질은 단지 내부로 수축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분열적인 양상을 띠기도 한다. 더 이상 타자화할 대상을 찾지 못할 땐, 내부에서 그것을 찾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때 진보진영은 노무현 정권의 집권에 일조했지만 오래지 않아 정권에 등을 돌렸다. 신자유주의에 포섭되었다는 이유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명박근혜의 10년 대계를 불러들였고 그 시간 동안 진보적 가치는 오히려 퇴행하고 말았다.

결국 이들이 택하는 건 자기만족에만 탐닉하는 것이다. 실질적인 사회변화에는 등을 돌리고 선민의식, 도덕적 우월감에 안주하는 거다. 그건 진보적 태도가 아니라 지적 허영에 가깝다. '입진보', '진보꼰대' 같은 말처럼 소모적인 논쟁만 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지젝이 말하는 것처럼 활동과 참여가 아니라 '유사 능동성'에 불과하다. 진보=비생산적이라는 오명은 바로 이런 점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적대성보다는 포용성이, 수축보다는 확장이 절실하다. 세월호나 촛불집회의 경험에서처럼 뭔가를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건 보편적인 문제의식이다. 따라서 진보의 정체성은 피해의식이 아닌 문제의식으로 무장해야 한다. 변화야말로 진보적 가치를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이 야기하는 소모적인 타자화는 진정한 진보적 논의가 아니다. 그건 진보놀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