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이내라는 짧은 시간에 거의 모든 젠더 문제를 망라해야 했던 탓인지, 서사의 완성도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주제의 당위성을 위해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가해자 또는 방조자 일색이 되어야만 했고, 이야기는 연결된 내러티브가 아니라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열거된 것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너무 전형적이라 서사의 힘을 더 떨어트렸다.

이런 방법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양극화를 다루고자 한다면 ‘88만원 세대 김지영’이란 작품을 만들어서 상대적 빈곤에 처해있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에피소드를 때려 넣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작품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학적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를 다룬다는 그 사실보다는 깊은 성찰을 통해 그것을 얼마나 독창적인 메타포로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한 거다. ‘기생충’이 찬사를 받았던 건 단순하게 양극화라는 주제를 다뤄서가 아닌 것처럼.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예술(혹은 문학)을 소비하는 건 계몽주의 시대의 방식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불거져 있는 상황에서 이런 어설픈 작업은 역효과만 야기할 뿐이다. 페미니즘이란 건 피해의식에 절어있는 일부 여성들이 내부 결속을 위해 동원하는 안티 담론에 불과한 무엇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안티 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봤을 때, 페미니즘으로나 작품성으로나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