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나이의 가수(혹은 지망생)들이 트로트를 부르는 걸 보면 그 탁월한 솜씨에 감탄을 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위화감이 느껴진다. 트로트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장르지만, 그것을 취향으로 삼는 이는 많지 않다. 대부분 대중음악 장르의 하나로 즐길 뿐이다. 실제로 트로트를 본인의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중년 이상의, 그것도 일부 세대에 불과하다.

젊은 트로트 가수에게 트로트란 좋아서 하는 무엇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무엇에 가깝다. 이들의 목표는 트로트가 아니라 돈에 있기 때문이다. 트로트 가수로서 성공했을 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보상은 매우 크다. 예를 들어 김호중이 성악을 멈추고 트로트를 부르게 된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인 것처럼.

예술이란 순수한 자기표현 욕구를 동력으로 삼는다. 생계유지 같은 현실적 요소들로 제약을 받긴 하지만, 순수한 의미에서 예술가는 대가를 바라고 창작을 하지 않는다. 마치 ‘쇼미더머니’에 나오는 래퍼들처럼. 이 래퍼들은 힙합이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것에 열정을 쏟는다. 심지어는 대중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유 때문에 더 힙합에 매진하기도 한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이 대중적인 인기보다 중요하고 그런 추구 자체가 바로 SWAG이기 때문이다. 이런 래퍼들이야말로 순수한 의미에서 예술가에 가까운 유형이다.

반면 트로트는 정반대의 지점에 있다. 트로트는 속물적인 장르인 것이다. 젊은 가수들이 출연하는 ‘미스터트롯’이나 이와 비슷한 트로트 예능을 보면서 위화감이 드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래퍼들이 보여주는 막연한 열정이 결핍되어 있다. 대신 현실적인 계산이 그 공간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가 다뤄야 하는 건 속물적인 현실의 영역보다는 낭만적인 꿈의 영역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스펙경쟁이나 공무원 열풍 같은 것만 봐도 속물근성이란 건 이미 현실의 삶 속에서도 충분할 만큼 넘쳐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