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는 실수하지 않는다. 프로그래밍 된 알고리즘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가 인간이 운전하는 차보다 안전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알고리즘에 오차라는 건 실재하지 않는 결과값에 불과하다.

하지만 돌발적인 변수 앞에서까지 기계가 인간보다 잘 대처할 거라고 확신하긴 힘들다. 위험하고 긴박한 상황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본능이란 건 인류가 수만 년 동안 생존을 위해 축적해온 값비싼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 정보를 위해 수많은 목숨이 수업료로 지불됐다.) 따라서 알고리즘이 본능보다 더 적절한 대처능력을 갖추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도 의문일 뿐더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자율주행이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운전대를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이야말로 도로 위에서 가장 크고 많은 변수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직접 운전하는 차가 없고 모든 차가 자율주행차로만 이루어진다면 이론적으로 변수가 발생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결국 인간은 운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운전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이다. 운전을 하고 싶을 때마저도 운전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생존에 필요한 알약이 나와서 이 알약만 먹어도 영양분 섭취가 충분히 이루어지는 상황이 온다고 한들, 그것 때문에 요리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요리만 하지 않더라도 설거지나 쓰레기 처리 같은 지긋지긋한 가사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의 행복과 요리하는 행위 자체가 주는 즐거움 또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운전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큰 돈을 지출해서 자가용을 사는 건 단순히 이동수단으로서의 기능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운전대를 잡는 즐거움, 운전하는 재미도 고려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출퇴근할 때만 운전을 하는 건 아니다. 여행을 가거나 놀러갈 때도 운전을 하고, 순전히 운전을 즐기기 위해 드라이브를 할 때도 있다.

여기에 자율주행의 딜레마가 있다. 안전한 자율주행을 위해선 인간을 운전으로부터 추방시켜야 하지만, 인간에게는 운전하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에 대한 신화적인 믿음은 모든 사물을 기능으로 보는 유물론적 관점에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었다고 해서 손목시계가 사라지고 있지 않고 전자책이 나왔다고 해서 종이책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기술이란 건 정치적, 사회적인 맥락에 따라 육성되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한다. 기술의 속도대로 세상이 변하는 건 아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대로 세상의 속도대로 기술이 변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동차의 자율주행 시대가 코앞에 온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사이드미러 하나를 없애는 데에도 수십 년이 걸리고 있는 게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