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다. 타자가 만든 사회적 이미지를 따르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의 소비 개념처럼 순수한 자기 만족이나 효용보다 사회적 기호를 추구하는 것이다. 소비가 사회적 평가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허세 또한 마찬가지다. 사회적 평가를 만들기 위한 모든 범주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들어진 평가는 단편적으로 작용할 뿐이다. 예를 들어 명품가방 몇 개를 구매한다고 해서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들어진 평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명품 소비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데, 당연하게도 능력을 벗어난 소비는 빚이라는 반대급부를 남길 수밖에 없다.

이와 똑같이 허세에도 지불해야 하는 반대급부가 있다. 바로 ‘불행’이라는 비용이다. 허세로 내 이미지를 포장할수록 스스로는 점점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허세는 워너비와 실제 나의 모습, 둘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를 자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워너비와 실제의 나를 아무리 동일하게 인식한다고 해도 본인은 둘 사이의 괴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허세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본인에게 부재한 것을 마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속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건 현실을 결핍 상태로 인식하는 것이다. 삶의 기대치가 현실이 아니라 허세의 이미지에 맞춰지기 때문에 현실을 불행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되면 현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허세의 이미지에서 자아를 찾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거짓의 삶을 사는 리플리가 되는 것이다.

또 허세는 상대적인 만족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허세는 우열이나 계급처럼 수직적인 과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기준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기준은 결코 만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끊임없이 비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끝이 없는 불안 속에서 소모적인 포장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세가 주는 만족감은 명품을 소비했을 때의 만족감과 비슷하다. 찰나의 만족감만 맛볼 뿐이다. 하지만 허세는 더 많은 것을 잃게 만든다. 주변인들을 떠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허세는 매력을 떨어트린다. 스스로가 허세만큼 잘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려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게 아니라 실제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