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차분하고 느린 호흡으로 배경의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낮은 채도의 도시 모습, 쌀쌀한 날씨, 성냥갑 같은 아파트, 인물의 걸음걸이, 흘러가는 담배연기. 이런 것들을 하나 하나 시간을 들여 그려주는 것 같았다. 소설로 풍경을 읽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기 시작한다. 서술하고 설명하는 게 아니라 ‘시선’을 따라서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속이 비어있는 눈동자의 아버지는 아파트 베란다 창문에서 담배를 핀다. 그리고 한참 동안 밑에 있는 주차장을 내려다본다. 카메라의 시선도 그것을 따른다. 그렇게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함축적인 표현으로.

카메라는 시선을 좇는다. 기태 아버지의 시선, 희준의 시선, 준영의 시선. 카메라는 각각의 시선을 좇으며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고, 보는 이는 그 감정선에 이입된다. 인물이 보게 되는 것, 카메라의 시선은 딱 그만큼을 따라 가면서 그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그리고 그에게는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흔들리는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 영화를 보는 이의 불안한 감정을 투영한다. 아슬아슬한 소년들을 보고 있으면 흔들리는 게 카메라인지 아니면 나의 불안한 마음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핸드헬드 기법을 사용한 영화들은 많았지만 이 영화만큼 그것의 장점을 잘 살린 작품은 흔치 않다. 이런 기법도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표현방식이다. 불안을 자아내기 위해 구불구불한 글씨로 소설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클라이막스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씬이다. 현재의 준영이 방에서 나와 식탁에 앉았을 때 자연스럽게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갔던 장면, 그리고 엔딩에서 현재의 준영이 과거의 기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두 장면 모두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비사실적인 장면이지만, 영화는 준영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기태의 내면을 남김 없이 보여준다. 이로써 기태는 학폭의 가해자가 아니라 관계에 미숙한 한 명의 소년이 된다.

117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비해 이야기의 분량은 길지 않다. 그만큼 작품의 상당한 시간은 장면의 분위기, 작지만 미묘한 감정선 같은 것들을 자아내는 데 할애되었다. 그리고 그 긴 호흡은 관계와 우정, 그것에 상처 받는 소년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먹먹한 감정과 함께 '나'의 소년 시절이 떠오르게 된다.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무명시절의 이제훈과 박정민은 전혀 이질감 없는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거나 이야기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스토리 중심의 영화도 좋지만, 그게 영화란 예술의 전부는 아니다. 국내에서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쇄도하면서 스토리 중심적인 경향이 더 짙어진 상황인데, 그 가운데서 영화적 표현이 가득한 영화다운 영화를 만나는 건 꽤 반가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