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는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마리안느가 처음 그린 초상화는 엘로이즈를 닮고 있지 않다. 마리안느의 설명대로 회화라는 정형화된 도식을 따른 특징 없는 그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건 마리안느의 일방적 시선이 재현한 반쪽짜리 그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마주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밤중에 있었던 여자들의 회합에서 둘의 시선은 서로를 마주한다. 타오르는 불처럼 강렬하게. 그때부터 초상화는 서로의 시선을 담기 시작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그릴 때 엘로이즈가 바라보는 건 다름 아닌 마리안느 자신이다. 그렇게 둘의 시선이 교차할 때 마리안느의 초상화는 그녀 본연의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다.

슬프게도 그녀들의 사랑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사랑은 불길처럼 타올랐지만, 현실은 일렁이는 겨울 바다처럼 계속 해서 닥쳐온다. 차가운 파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언제나 사랑할 수는 없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도 끝맺음이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붓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둘의 그림은 완성이 된다. 미완의 습작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완결로서.

사진이 없던 시절, 그림은 기억이기도 하다. 순간의 시간을 잡아 영원의 액자에 가두는 양식이다. 소피가 보자기에 수를 놓는 장면에서, 처음 화병의 꽃은 싱그럽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꽃은 시들어버렸다. 화병의 꽃은 이미 시든 꽃이 되어버렸지만, 그 앞에서 수를 놓는 소피는 여전히 싱그러운 꽃을 수놓고 있다.

이별을 앞둔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름다운 시간을 만들고 그 기억을 그림으로 간직하는 것밖에 없었다. 영화의 장면 하나 하나가 한 폭의 그림 같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하나의 장면은 한 폭의 그림처럼 기억에 남아야 하는 것이다. 꽃으로 비유하자면 수놓기를 시작했을 때처럼 가장 만개했던 순간을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이 이별을 맞이하던 자세는 기존의 퀴어영화와 달랐다. 운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지만 무기력하게 굴복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담담하게 운명을 직시했다. 엘로이즈의 재해석처럼 오르페우스를 뒤돌아 보게 한 건 다름 아닌 에우리디케인지도 모른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도 서로를 마주본 순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로의 시선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신화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다.

시대적인 젠더상, 낙태라는 소재를 통해 보여준 당시의 현실과 여성 연대의 가능성 등은 이 작품에게 여성영화 혹은 퀴어영화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해주지만, 이건 영화가 가진 일부의 장점만을 보여줄 뿐이다. 화폭을 옮겨 담은 듯한 압도적인 장면들, 아름다운 영화적 비유들, 신화의 독창적인 재해석만으로도 이 작품의 영화적 가치는 차고 넘친다. 여러모로 곱씹을 만한, 아니 곱씹어야 마땅한 작품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엔딩이었는데, 근래 본 영화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엔딩이었던 것 같다. 음악을 듣는 엘로이즈가 처음엔 반갑고도 애틋한 눈물을 흘리고, 음악이 환기시키는 행복했던 나날을 회상하면서 웃음을 짓다가, 다시 슬픔이 사무치는 현실로 돌아오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이야기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듯한 감정흐름이었다. 종이 울리기 전 가르친 내용을 복습해주는 선생님처럼, 엔딩크레딧이 오르기 직전 이야기의 감정을 다시금 고조시키는 탓에 관객들은 무거운 여운을 느끼며 가슴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