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제가 필요한 건 정의를 위해서다. 다른 이유는 필요없다. 그럼에도 예방, 격리효과, 비용 등 주변적인 논리를 끌어오다보니 오히려 설득력이 상쇄되고 마는 것이다. 정의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 사회과학이나 공리주의적 잣대를 들이미는 건 구차한 작업이다. 사형제도를 논하는 데 우선되어야 할 건 정의라는 개념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도덕철학자들이 밤새 토론해도 정리하기 힘든 문제다.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교집합의 영역은 엄연히 존재한다. 보편적으로 말하는 정의란 바로 이 부분을 의미하며, 사람들은 이를 토대로 정의로운지 여부를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있고, 반대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세상이 있다면, 누구든 전자보다 후자가 정의에 가까운 세상이라고 말하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 이걸 정의라고 여기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응보란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한 정의의 개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형제가 폐지된다면 ‘생명은 존엄하다.’는 명제는 선언적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생명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그 누구도 이를 빼앗을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도 살인자를 버젓이 살려둔다는 건 일종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모순을 안고도 사회가 유지된다는 건 누군가 그 불균형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희생되는 건 살인의 피해자다.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억울한데 알량한 계몽주의 탓에 두 번 희생되는 것이다.
살인의 가장 정당한 대가는 가해자의 생명을 몰수하는 것이다. 공권력을 두고 폭력이라 하지 않는 것처럼 사형제를 두고 살인이라 할 수 없다. 사형은 국가가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가족들이 가해자에게 몰려가서 돌팔매질을 하는 사적 제재와 최고형을 언도받은 범죄자에게 국가가 집행하는 사형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가 뜨거운 분노의 복수라면 후자는 차갑고 무정한 균형 맞추기이다.
사형제를 폐지하는 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정의가 훼손된 상황을 방기하겠다는 것이다. 본인 손에 피를 묻히려 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국가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들어 놓고도 굳이 사형 집행을 막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원래 옳은 길을 가는 건 불편하고 어려운 법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안일함으로는 정의든 뭐든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