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세대(지금은 586이 되었지만)가 저항세대가 아닌 기성세대의 지위로 등극한 순간, 그들의 요란한 목소리 안쪽에서는 얼마나 공허한 울림만이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이 노래하던 낭만적인 담론의 핵심엔 앙상한 안티테제만 남아있던 것이다. 자부심을 가졌던 저항의 기억은 그들에게 훈장인 동시에 족쇄였던 셈이다.

그들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능력과는 얼마나 유리된 세대였는지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야구해설가가 갑자기 배트를 쥐고 타석에 선 것처럼, 냉철하고 능숙한 판단이 필요한 현실세계에서도 그저 허울 좋은 이상과 이론만을 좇을 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윗세대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사이 스스로가 윗세대를 닮아버렸다는 점에 있다. 니체의 말대로 오랫동안 심연을 보다보니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윗세대로부터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을지 몰라도 그 안의 내용적 모순은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산업화세대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부작용을 필요악으로 치부했던 것처럼, 386세대도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한 주변적인 희생과 일탈을 불가피한 과정으로 여겼다. 각자의 지향점은 달랐을지 몰라도 방법론에 있어서는 똑같이 파쇼적이었다.

꼰대의 핵심은 본인이 꼰대인지 몰라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면에 있어서 386세대는 꼰대의 전형이다. 그들은 주로 윗세대와의 비교우위를 통해 스스로를 차별화시키지만, 아랫세대들이 봤을 땐 같은 꼰대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꼰대는 내로남불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선민의식 탓에 내가 하는 건 전부 아름다운 로맨스로 자각하지만, 남들에게는 똑같은 불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최근 들어 386세대라는 안티테제의 안티테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윤석열이라는 인물로 현상화되고 있는데, 그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어떤 가치관과 이념을 갖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윤석열의 스탠스는 안티 문재인(혹은 386)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법치주의의 회복을 얘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보기엔 빈약할 따름이다.

안티테제의 맹점은 테제가 사라지는 순간 드러난다. 안티 문재인의 한계는 정권이 교체되는 순간 모든 목적이 상실된다는 점에 있다. 386세대가 집권 후 스스로의 무능을 드러낸 것처럼,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정치적 진공상태를 낳았던 것처럼, 안티테제의 집권은 익숙한 공허함만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