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리가 부동하네.” 핵심은 여기에 있다. 누구든 겉과 속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누군가의 겉모습일뿐 그 속에 있는 마음은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무감하고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던 경애처럼. 그리고 융통성 없고 사회성이 부족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누구보다 진심으로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상수처럼.

이 소설은 마음을 다루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지를 이야기한다. 표리부동의 세계에서 겉과 속의 간극,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보통 그 거리를 메우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지만 이 소설에선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거리를 인정하는 데서 모든 게 시작된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냥 놔둔다.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쉽게 하곤 한다. 대화를 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마음은 계산되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대화만으로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도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는 누군가에게 위로랍시고 섣부른 조언을 해준 적이 많다. 하지만 그건 위로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위로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같다. 함부로 이해하고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위로하고 싶은 이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이다. 상처받은 마음과 함께 그저 내 옆에 두는 것. 끝내 내가 이해하지 못한 마음이 있더라도.

자극적이지 않으면 주목 받지 못하는 시대, 표리부동이라고 한다면 ‘표’의 시대에서 겉이 아니라 그 안의 마음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뜨겁거나 차가운 자극들 가운데서도 마음을 다룬 이야기만은 정온동물의 몸속처럼 일정한 온도를 오간다. 그래서 이 소설은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마치 체온을 가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