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관성'이다. 일관성이야말로 공정성을 담보해주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심판에게도 '스타일'이라는 게 있다. 심판의 스타일이 제각각이라고 해서 문제될 건 전혀 없다.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는 심판이 있고 웬만하면 경기가 끊기지 않게 진행시키는 심판도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스타일이건 일관성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같은 상황이면 항상 같은 판단이 나오는 것, 그 일관성만 정확히 유지하면 선수와 팬들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건 공이 팔에 맞았느냐 맞지 않았느냐 따지는 게 아니다. 공이 팔에 맞았다고 해서 무조건 핸드볼 파울을 선언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공격수들은 공으로 수비수 손만 맞추고 다닐 것이다. 그만큼 파울이라는 건 전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고, 당장 어떤 접촉이 있었다고 해서 파울이 성립되는 건 아니다. 따라서 VAR로 접촉의 유무를 현미경으로 보듯 심사하는 건 결코 판정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축구는 90분 내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스포츠다. 그만큼 흐름이라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VAR은 그 흐름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VAR이 중시되면서 요상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특히 견딜 수 없는 건 골이 들어가는 순간 모두가 VAR의 눈치만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이제는 아무리 멋진 골이 들어가도 그 골에 바로 환호할 수가 없게 되었다. VAR로 사후에 골 판정이 번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수든 관중이든 골이 들어갔을 때 그 골을 넣은 선수 또는 그의 세레모니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VAR과 심판의 눈치부터 살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VAR의 비중이 높아지다보면 언젠가부터는 우리 모두 골이 터진 직후의 그 흥분의 도가니탕을 맛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퍼포먼스를 끝내고 심판의 평점을 차분히 기다리는 체조나 다이빙 같은 스포츠처럼, 축구 또한 마찬가지로 골을 넣고도 체조선수들처럼 차분하게 심판의 선언을 기다려야만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축구 같은 스포츠에서 심판의 존재감은 작을수록 좋다. 정확한 판정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심판의 無존재감이다. 심판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감출수록 선수와 팬은 오롯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심판들도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감추고 불가피한 순간에만 경기에 개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VAR은 그 노력과 완전히 반대되는 지점에 있다. 판정을 위해서 경기가 멈춰버리고 모두의 이목이 VAR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존재감의 문제가 아니라, VAR이 경기를 지배하고 결정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심도 경기의 일부다" 같은 케케묵은 말이 아니다. 오심은 경기의 일부여선 안 된다. 오심은 없을수록 좋다.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축구라는 스포츠를 놓고 봤을 때, 흐름을 유지하는 것도 오심을 줄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오심은 늘 있어 왔지만, 그동안 축구라는 스포츠가 팬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전해주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 때문에 축구가 고유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걱정이 드는 건 사실이다.

나는 시장을 믿는다. 시장주의는 제일 공정한 시스템이다. 투자하는 대로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그만큼의 보상을 받고, 좋은 상품을 좋은 가격에 파는 사람은 상품을 더 많이 팔 수 있다. 이전 정권이 말하던 ‘경제민주화’란 모토는 사실 시장주의 개념과 다를 게 없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완전경쟁시장은 모든 경제 주체들이 정확히 똑같은 출발점에서 경쟁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민주화, 그러니까 경제적 평등과 시장주의는 동어반복적인 관계에 있다.

다만, 시장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장은 물에 떠 있는 사람과도 같다. 사람이 물에 떠 있기 위해서는 다리로 계속 물장구를 쳐야 한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물속으로, 중력의 방향대로 계속 가라앉기 때문이다. 시장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시장은 항상 서서히 가라앉는 존재다. 시장실패라는 중력의 방향대로 침몰해가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계속 물장구를 치듯이, 시장 역시 이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밀한 조정과 통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독과점, 정보의 불평등, 외부효과 같은 중력들이 끌어당기는 방향대로 시장은 서서히 가라앉게 될 것이다.

시장만능주의는 시장주의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시장만능주의라는 개념은 방임주의에 가깝다. 시장은 전능한 시스템이기 때문에 아무런 개입 없이 그냥 놔둬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모든 ‘만능주의’가 그러하듯, 시장만능주의도 시장실패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모순을 안고 있다. 시장을 방임한다는 건 사람이 움직이지 않고 그냥 물에 잠기고 있는 것과 같다. 시장실패라는 중력이 끌어당기는 대로 가라앉는 것이다. 이 시장만능주의가 시장과 경제 주체들을 어떻게 침몰시켰는지는 더 말해 입만 아플 정도다. 십여 년 전의 금융위기만 봐도 적나라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재벌은 반시장적이다. 시장주의를 저해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재벌은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 주체가 아니다. 재벌은 독과점의 주체일 뿐이다. 미국이란 나라도 덩치가 큰 기업을 최대한 쪼개기 위해 애를 쓴다. 그만큼 재벌은 시장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는 반재벌적인 아이디어들을 전부 반시장적인 사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반시장적인 재벌에 반하는 생각들을 되레 반시장적이라고 규정하는 건 일종의 모순이다. 그건 시장주의적인 사고가 아니다. 단지, 시장만능주의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에서 자신을 ‘시장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사실 ‘시장만능주의자’에 가깝다. 온전한 시장주의자란 시장이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장을 온전하게 지켜내려는 시도를 반시장적이라고 비판하는 건 결과적으로 시장을 자유롭지 못하고 불공정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시장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 그저 방임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시장주의의 수호자가 아니라 독과점(시장실패)의 수호자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 반대의 지점에 위치한 사람들, 민주적 가치를 근거로 시장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 이들 역시 시장주의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공격하는 건 시장주의가 아니라 시장만능주의이다. 이들의 주요 타겟인 친재벌적인 경제정책, 낙수효과 같은 것들을 시장주의적인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반시장적인 정책들이다. 자유, 평등, 정의 같은 민주적 가치는 사실 시장주의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경제적인 민주주의란 공정한 경쟁시장, 곧 시장주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시장주의를 공격할 게 아니라 오히려 시장을 강조하고 시장을 지키려는 스탠스를 취해야 한다. 그래야 반시장주의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시장은 신성화된 영역이다. 그것을 건드리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장주의라는 담론을 선점하고 있는 이들은 사실 시장주의자가 아니라 독과점을 방임하는 시장만능주의자에 불과하다. 여기서 시장주의 담론이 안고 있는 모순이 드러난다. 누구보다 시장이란 시스템의 공정함을 믿고 이것을 지키려고 하는 이들이 오히려 반시장적이라고 공격을 받아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주의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 뒤바뀐 위치에서 서로 뒤바뀐 언어로 싸우고 있는 셈이다.

편지를 쓰는 것과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다르다. 편지는 쓰는 건 무거운 행위다. 편지를 쓸 땐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해서 종이에 옮긴다. 한번 종이에 적힌 텍스트는 맘대로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 문장 단위로 머릿속에서 말을 완성시키고 그것을 종이에 적는 것이다. 한 단어, 한 문장을 적을 때마다 다음엔 어떤 표현을 담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이렇게 편지를 쓰다보면 처음 펜을 잡았을 때 마음먹었던 것과는 다른 내용을 쓰게 되기도 한다. 생각이나 감정이 정리되기도 하고, 어떤 의미가 더해지기도 하고, 뭔가가 생략되기도 하고.

반대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건 가벼운 행위다. 문자메시지는 실시간으로 송수신된다. 텍스트를 만드는 것도 손쉽다. 손끝으로 터치 몇 번만 하면 된다. 그만큼 생각을 정리하거나 의미를 미리 만들어보는 과정은 필요 없다. 단지 순간순간 떠오르는 말을 바로 전송하는 것뿐이다.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감정이나 생각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예를 들어 셀럽들이 물의를 일으키고 온라인상에 사과문을 올릴 때, 종이에 직접 수기로 적은 사과문을 캡처해서 올리는 경우가 많다. 웹상의 텍스트보다는 종이에 손으로 직접 쓴 글이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자메시지로 사과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대면과 비대면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편지로도 어느 정도의 진중한 마음은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자메시지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숙고하는 어떤 무게감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클릭이나 터치를 통해 투표를 하는 것도 이런 무게감이 결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투표용지를 액정화면의 버튼 이미지가 대신한다는 건 단지 직접 투표소에 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게 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정치적 선택이라는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가 한순간의 터치만으로 결정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숙고해야 할 시간들이 즉각적이고 즉흥적인 찰나의 순간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거리를 걷다가 스마트폰으로 투표를 할 수도 있고, 집에서 요리를 하다가 잠깐 컴퓨터 버튼을 눌러 투표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투표소에 가서 종이투표지에 도장일 찍는 건 꽤 번거로운 일이다. 생각보다 많은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우선 투표를 하러 가기로 마음을 먹으면 집으로 배송된 후보자들의 공보라도 한 번 더 살펴보게 된다. 그리고 투표소로 가는 길에는 누구를 찍을까 고민도 해보고, 투표소에 도착하면 마찬가지로 투표를 하러 온 다른 이들을 보며 어떤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투표용지에 기표를 하기 직전 아주 잠깐 망설이기도 해보고, 투표소를 나오며 뭔지 모를 뿌듯한 감정을 맛보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저마다 뭔가를 느끼고 돌아간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투표를 하는 건 이미지 버튼을 누르는 순간 모든 게 끝이 난다. 선거라는 게 마치 온라인으로 상품을 고르는 인터넷 쇼핑과 다를 게 없어지는 것이다.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기도 한다.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말했던 것처럼. 투표를 온라인으로 할 것이냐 혹은 오프라인으로 할 것이냐는 어떤 수단을 택할 것인가 하는 단순한 방법론적 고민이 아니다. 그건 선거, 더 나아가서는 정치라는 개념의 본질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기술진보는 우리 삶 전반을 빠르고 편리하게 만들어 왔지만, 그 빨라진 속도 만큼 우리에겐 잃어가고 있는 시간과 가치들이 있다. 모든 게 그렇지만 얻는 게 있으면 그만큼 잃는 게 있는 법,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여과되고 정제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성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그것을 표현한다. 이성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치지 않은 말들은 배설에 가깝다. 분노나 흥분상태가 극에 달했을 때 나오는 정제되지 않은 말이나 욕설은 그 순간만 지나도 그렇게 말한 걸 후회할 만큼 무의미한 것들이다.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까지 한다. 여과의 과정이 없는 표현은 의미 전달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에 가깝다.

기존의 미디어에서는 ‘데스크’라는 게 여과와 정제의 역할을 담당했다. 기자가 생산해내는 정보를 자체적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기자가 사력을 다해 뜨거운 특종을 잡아오더라도 데스크는 그것을 차갑게 검증했다. 오보라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언론기관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종이신문에서는 단순히 오탈자를 수정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그만큼 미디어의 정보라는 건 단번에 정확하게 완성되어야 했고, 이를 위해 정보를 정제하는 중간역할이 중요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정보사회에는 중간과정이 없다. 무엇이든 즉각적으로 만들어지고 완결되는 시대다. 생산자가 곧 소비자가 되고 소비자가 곧 생산자가 되었다. 모두가 생산자인 시대에서 뭔가를 걸러내고 정제하는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다. 블로그 포스팅을 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검토를 받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루할 정도로 세밀한 자체 검증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탈자가 있어도 일단 포스팅을 하고 나중에 그때그때 수정하면 그만이다.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든 영상을 그대로 업로드하면 끝이다. 더 나아가 유튜브 ‘라이브 방송’은 아무런 여과 없이 실시간의 화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병철은 이런 과정을 “탈매개화”라고 말했다. 모든 것들이 필터링 없이 즉각적으로 만들어지고 즉각적으로 수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적대로 이런 현상은 많은 분야에서 대중화를 진행시킨다. 모든 것이 저속화되고 평이해지는 하향평준화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사에 달리는 댓글만 봐도 재밌고 참신한 말들 보다는 상스럽고 지저분한 말들이 대부분이다. 댓글이란 건 기사를 보고 일어나는 감정을 즉각적으로 뱉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댓글을 달면서 진지하게 숙고하는 수고를 들이는 사람은 없다. 아무런 필터링 없이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건 의미 전달이 아니라 배설에 가까울 뿐이다.

1인 미디어의 도래는 커뮤니케이션의 혁신을 일으키고 콘텐츠를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는 예견은 틀린 셈이다. 여과되고 정제되는 과정 없이 생산된 정보들은 그때그때 소진되고 만다. 이런 정보는 즉각적인 감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같은 건 업로드되는 순간 바로 보여지고 지나갈 뿐이다. 이것을 두고두고 보는 사람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만큼 휘발성도 강해졌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지속성이 없다는 건 그만큼 가치가 없다는 걸 의미한다. 새로운 시대에서 정보의 양은 압도적으로 많아졌지만 양질의 정보, 그러니까 정제된 의미를 찾는 건 더 힘들어진 셈이다.

주류는 따로 호명되지 않는다. 호명하는 주체가 주류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자기를 부를 일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장애인, 동성애자, 다문화가정이란 말에 익숙하다. 하지만 비장애인, 이성애자, 非다문화가정(사실 다문화가정의 반대말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같은 말들은 좀처럼 입에 붙지 않는다. 그만큼 흔하게 쓰이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호명되는 쪽은 항상 소수자들이다. 경계를 만들고 구분을 짓는 건 늘 주류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싸’라는 말은 예전부터 쓰이던 말이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만 하더라도 ‘아싸’는 존재했다. 선배든 친구든 주변인들과 어울리지 않고 항상 혼자 생활하는 이들을 ‘아싸’라고 불렀다. 이들은 혼자 (아니면 많아야 셋 정도가 같이) 다니면서 강의를 듣고 밥을 먹고 캠퍼스를 거닐었다. 그리고 여러 모임이나 행사 같은 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이 ‘아싸’를 비난하거나 배척할 필요는 없었다. 즐겁게 어울리는 자리에 끼지 못하는 건 그 스스로의 손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요즘은 ‘아싸’라는 말보다 ‘인싸’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인다는 점이다. 이건 주류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인싸’였던 주류들이 소수였던 ‘아싸’를 호명했지만, 이제는 ‘아싸’인 주류들이 소수인 ‘인싸’를 호명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는 오히려 ‘아싸’라는 말을 듣기 힘들다. 전부 ‘인싸’에 대한 말들만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주류와 소수의 관계가 전복된 셈이다.

간단히 말해, 과거에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던 이들이 주류였지만, 이제는 혼자 다니던 이들이 주류가 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학생활이라는 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학업보다는 주변 선후배들과 어울리면서 인간관계를 만들고,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발한 과외활동을 벌이고,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던 과거의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는 이제 드물어졌다. 대신, 고학점을 위해 전공 공부에 매달리고, 토익 점수를 위해 영어학원을 다니거나,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매일 도서관을 전전하는 요즘의 대학생들만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다.

이들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는 기껏해야 공모전을 준비하기 위한 스터디그룹 정도가 전부다. 그만큼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게 과거의 캠퍼스 라이프는 사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뿐이다. 그리고 그 경쟁을 뚫을 수 있는 건 오로지 개인의 능력뿐이다. 따라서 그 능력을 키우는 일 외에는 모두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내가 학교에서 보았던 ‘아싸’는 이 시대의 마지막 ‘아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때는 일종의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이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러니까 10여 년 전만 해도 이미 대학생활이란 저울의 추는 낭만적인 캠퍼스 라이프에서 스펙 경쟁의 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무한경쟁의 장으로 내몰린 20대들에게 이제 ‘인싸’의 삶은 소수만의 생활양식이 되어버렸다. 사람들과 마음껏 어울리고, 여러 가지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 그런 삶은 취업경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소수만이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때문에 주류와 소수의 관계는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과거와 달리 이제 주류는 소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러워한다. 그래서 주류로서 소수인 ‘인싸’를 호명하지만 오히려 그 소수의 ‘인싸’를 닮고 싶어하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 담장을 넘어서 전 사회적으로 불고 있는 ‘인싸’에 대한 열풍은 학생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주류적인 삶은 이제 소수만이 영위할 수 있는 각박한 세상이 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