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오세아니아의 한 부족에는 최근까지도 식인 장례 풍습이 이어져 왔었다고. 죽은 이의 영혼을 남겨진 이들의 몸 안에 간직하겠다는 의미에서 시신을 나눠 먹었다고. 그런 그들에게 시신을 불태우거나 땅에 묻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그건 누군가의 영혼을 불태우거나 땅속에 버려두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테니까.
이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각자 다른 조상을 뒀다는 점뿐이다. 우리의 조상이 혹은 우리의 조상을 지배했던 부족이 시신을 화장하거나 매장하는 관습을 가진 부족이었기 때문에 그 외의 장례 관습을 낯설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죽은 연인을 먹는다는 건 그렇게 이상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안에 남겨두고 싶은 소망 때문에 그를 먹는다는 건 원초적이긴 해도 말이 되는 이야기니까. 함께 하거나 함께 있거나 소유하는 걸 넘어 내 안에 두고 하나의 존재로 만들겠다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는 극한의 방법일 수 있다. 애도의 방법이 그렇듯 사랑의 방법에도 정답은 없으니까.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가난의 되물림, 속물주의 같은 사회적 소재들은 이 극단의 사랑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수단일 뿐이다. 구와 담을 벼랑 끝으로 몰아서 서로의 존재만이 남도록 만든다. 그리고 모든 불순물들을 걷어내고 원형만이 남았을 때 그 극한의 사랑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이 많은 이들에게 읽힌 건 바로 그 이유에서다. 식인이라는 자극적인 설정이나 그로테스크함이 이 소설의 정점은 아니다. 소설에 등장했던 사회적 소재들만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복잡한 맥락 속에 얽혀있다. 때문에 모든 걸 버리고 사랑만을 갈구하는 건 낭만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원초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심연을 건드리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의 제목은 다른 누구라기보다 자신에게 묻는 안부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나에게 묻는 스스로의 안부. 크기는 다를 수 있지만 상처 없이 자란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뒤틀린 행동을 하기도 한다. 약점을 가리기 위해, 뭔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때로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기 위해.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삶을 보면서, 그러니까 그가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살아내는지를 보면서 누군가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다.
삶에는 무수한 실패와 좌절이 뒤따른다. 숙명과도 같다. 직면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해미의 편지들처럼 상자에 봉인해서 구석에 쳐박아둘 수 있는 무엇도 아니다.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냥 감당하며 살아내는 것뿐이다. 나름의 노력과 나름의 방식으로.
파독간호사들에게도 흔히 상상하는 희생적인 삶만 있었던 건 아니다.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각자 추구하는 것을 따라 나름의 삶을 찾으려 했다. 서로에 대한 다정함을 잃지 않고 그들만의 삶을 가꾸어나갔던 것이다.
어차피 삶은 변수들투성이다. 앞으로도 많은 실패와 좌절이 닥쳐올 것이고, 그로 인해 상처도 입고 방황도 하게 될 것이고, 얼마간은 후회와 자기심판에 갇혀있기도 할 것이다. 다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갇혀 있던 스스로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옆에는 다정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