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수한 민족’이란 말을 거리낌 없이 쓴다. 너무 흔하게 쓰는 말이기 때문에 놓치기 쉽지만, 사실 이런 표현은 다분히 민족차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우수한 민족이 있다는 건 반대로 하등한 민족이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족성에 우열이 있다는 의미다. 나치즘과 다를 게 없다. 나치가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발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위험한 생각이다.

더구나 제국주의의 피지배를 경험했던 곳에서 이런 민족차별적인 발상에 무감각하다는 건 의아한 일이다. 굳이 나치즘의 사례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제의 민족차별을 직접 겪은 바 있다. 조선민족은 스스로 일어설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제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게 민족개조론이었고 이는 식민통치의 정신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봤을 땐 터무니없는 미친 소리에 불과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또한 일제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발상이 왜 문제냐면 우열을 가리는 태도는 결국 스스로를 열등감에 가둘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 스스로가 우리 민족의 위상을 낮게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주위만 봐도 그렇다.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잘난 점을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난 체를 하는 사람은 정말 잘난 사람이 아니라 어중간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스스로 열등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나은 위치로 높은 위치로 본인을 어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려고 한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서구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재밌는 건 김치, 비빔밥, 불고기 등이 한국의 대표음식으로 소개되는 것도 이런 열등감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나라의 대표음식이라는 건 그만큼 그 나라 사람들이 자주 먹는 음식이라는 걸 뜻한다. 베트남이라고 하면 쌀국수가 떠오르고 이탈리아라고 하면 파스타가 떠오르는 건 그만큼 그 나라 사람들이 그 음식을 주식처럼 자주 먹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치를 제외한) 비빔밥, 불고기, 갈비 등을 그렇게 자주 먹는 음식이라고 보긴 힘들다. 비빔밥보단 그냥 밥에 국찌개를 훨씬 자주 먹고 불고기보다는 치킨이나 삼겹살을 훨씬 많이 먹는다.

자주 먹지도 않는 비빔밥이나 불고기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꼽히는 건 의도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누가 보더라도 정갈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음식만을 골라서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에서 실제 자주 먹고 있는 음식들, 예를 들면 순대(국)이나 (한국화된) 치킨, 삼겹살, 게장, 개고기, 번데기 같은 음식들을 선보이거나 홍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식재료나 조리방법으로 만든 음식이기 때문에 서구에 비해 미개한 음식, 열등한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소개되는, 아니 광고까지 하면서 전략적으로 홍보되는 비빔밥이나 불고기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이런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명동을 제외하고) 찾아보기 힘든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수함이라는 실체 없는 대상에 대한 집착이 어떤 상황을 낳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애초에 우수하고 열등한 민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는 민족이란 개념도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적 공동체’에 불과하다. 민족이란 사실 실체가 없다. 그냥 믿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끼리 본인들은 같은 민족이라고 믿는 것처럼. 어쨌든 우수하거나 열등한 민족은 있을 수 없고 다만 각자의 환경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적응한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적도 부근의 지역이 경제력도 낮고 산업화가 덜 됐다고 해서 북반구의 선진국보다 열등한 지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면 개인의 행복도나 삶의 만족도는 북반구보다 적도 지역이 훨씬 높게 나오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들은 부지런하게 공장을 돌리고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온난한 기후 탓에 배를 굶거나 추위에 떨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건 오히려 북반구 지역들이다. 중상주의나 자본주의란 시스템은 항상 식민지나 수출시장을 필요로 해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김치를 먹는 건 우리가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개고기를 먹는 것도 우리가 열등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지역의 식문화를 굳이 동경할 필요도 없고 마찬가지로 기이한 식재료를 사용하는 중국의 음식들을 미개하다고 볼 이유도 없다. 그냥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생활양식을 영위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열등감에 휩싸이거나 다른 이들을 손가락질 하는 건 자신에게 스스로 꼰대짓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3기 신도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도시가 건설되면 기존의 신도시는 당장이라도 망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이 염려하는 게 바로 슬럼화라는 건데, 지금까지 수많은 신도시를 만들어왔어도 수도권에서든 국내에서든 슬럼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례는 전무한 게 현실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반대의 근거로 이야기할 뿐이다. 단지 아파트가 노후화되고 상가 같은 각종 시설이 낡아진다고 해서 그것을 슬럼화라고 한다면 전국에 슬럼화 되지 않은 도시가 몇이나 있겠는가.

실제로 망할 건 아무것도 없다. 2기, 3기 신도시가 새로 지어진다한들 기존의 신도시에서 쾌적한 환경, 각종 편의시설 등을 활용하며 불편함 없이 생활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결국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망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 내 소유의 아파트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도시가 아니라) 내가 망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도 망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근방에 신도시가 지어진다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한 순간 붕괴돼서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값이 0으로 수렴해서 빈털터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갖고 있는 부동산의 재산가치가 어느 정도 하락할 수 있는 가능성(중요한 건 가능성일 뿐이라는 점)을 안게 될 뿐이다. 나와 가족의 생활(예를 들면 일자리, 학교, 여가생활 같은 것)에는 전혀 지장이 생기지 않는다.

결국 도시도 그렇고 나도 망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남이 잘되는 꼴은 보지 못하는 속물근성만 있을 뿐이다. 3기 신도시를 반대하는 사람들 본인들도 불과 1,20년 전엔 3기 신도시 입주를 희망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내 아파트값 몇 푼 때문에 과거 자신과 같았던 처지의 무주택자들의 바람을 내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만큼이나 역시 무책임한 게 아닐까. 사회보장이라는 개념이 중요시 되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왜 문제가 발생했는지 시스템의 결함을 찾고 그것을 바로잡는 게 우선되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간다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문제가 ‘개인의 일탈’에 의한 것이라면, 이에 대한 조직이나 사회의 책임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책임이 없기 때문에 달라지고 개선되어야 할 것도 없다. 따라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문제를 개인의 차원보다는 구조적 차원에서 바라보고자 했고 이를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 한다. 개인이 아니라 그 문제가 발생하게 된 사회를 탓하는 것이다. 사회의 탓이라는 건 결국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작동시키는 이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탓이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모두의 것은 결국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경제학으로 보면 공공재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인 거다. 공공재는 말 그대로 모두의 소유물이지만 그것을 진정 본인의 소유물처럼 아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내 방바닥에는 과자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지만 길거리에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린다. 책임도 마찬가지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건 결국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게 되기 마련이다.

특히 개인과 사회를 구분해서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주 간단히 말해서 개인과 사회는 불가분한 관계의 개념이다. 사회는 개인의 총합이 아니다. 근대 이후에 우리가 발견한 건 사회가 개인을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외부의 모든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사적인 취향이야말로 진정한 나만의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그 취향이란 것도 외부의 유행이나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처럼. 결론적으로 개인은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 사회라는 것도 결국엔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느 하나 먼저랄 것도 없이 물고 물려있는 것처럼.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지우가 말하는 것처럼 ‘책임 있는 개인’이 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전국민이 집단적 우울증에 빠졌던 건 단순한 슬픔이나 애도의 감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허망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세상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이 사회의 어른으로서 모종의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감 때문에 달라진 게 있었다. 사회의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불편함이 있더라도 안전에 대한 절차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책임 있는 개인’의 의미는 바로 이런 과정을 말한다.

외부의 문제는 결국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내부의 문제를 애써 외면하려는 성향을 보이곤 한다. 예를 들어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걸 고민한다고 해서 하늘에서 돈 한 푼 떨어지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서 말한 것처럼 개인의 사유가 결여된 사회가 어떤 위험을 안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개인에게 어떻게 되돌아오는지 (개인을 어떻게 파멸의 종국으로 이끄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당연한 (그만큼 망각하기 쉬운) 명제이지만 성숙한 사회는 성숙한 개인의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성숙한 개인의식이란 책임감을 가진 눈으로 사회를 보는 걸 말한다.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일부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정치인, 재벌, 부패관료, 운동권 같은 일부의 탓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건 결국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류현진을 두고 자기관리가 소홀한 것 아니냐는 질타가 있어 왔다. 주로 두 가지, 영어와 담배 때문이다. 미국에 넘어간 지도 이제 6년 정도가 지났지만 아직도 통역사를 데리고 다닐 정도로 영어실력 향상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과 프로선수임에도 담배를 끊지 못한다는 것, 이 두 가지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 담배는 충분히 비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선수가 담배를 멀리할 정도로 흡연은 기본적인 체력 관리와도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실력을 문제 삼는 건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흡연는 선수로서의 자기관리에 속하는 게 분명하지만 과연 영어실력을 두고 자기관리의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지금의 성적이 증명하는 것처럼, 사실 영어실력은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영어를 못한다고 해서 동료 선수들과 어울리지 못한 것도 아니다. 간단한 영어와 특유의 장난스러움만으로도 동료들과의 소통에 전혀 지장이 없다. 코치들과의 호흡이나 미디어와의 인터뷰도 통역사를 대동하면 문제될 게 없다. 같은 메이저리그에서 오랜 시간 활약한 이치로도 항상 통역사를 대동시켰지만 의사소통 때문에 문제가 불거진 적은 없었다.

김연경이 터키배구리그에 진출했을 때 그녀에게 터키어를 배워야 한다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류현진이 미국에 진출하자 영어실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했고 그가 영어공부에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자 자기관리에 소홀하다며 질책했다. 왜 유독 류현진에게만 영어를 강조하는 걸까. 그건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영어에 대한 강박증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영어는 수단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사실이지만 외국어는 수단일 뿐이다. 외국어를 어학이나 문학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 혹은 자기계발의 일환으로 외국어 공부를 통해 자족감을 얻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외국어는 그 자체로 목적일 수가 없다. 아니, 목적일 필요가 없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비즈니스든 여행이든 어떤 필요에 의해서 외국인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영어를 사용하는 것일 뿐, 우리가 영미 문화권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이상으로 영어를 대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서는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영어는 엘리트라면 갖춰야 할 필수적인 덕목과도 같다. 하지만 외국은 그렇지 않다. 외국어능력을 한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그저 특화된 기술로 받아들일 뿐이다. 외국어능력이 부족하면 아웃소싱해서 통역을 구하면 그만이다. 충분한 외국어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높은 자리일수록 중요한 자리일수록 의식적으로 아웃소싱을 한다(반대로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지만). 하지만 한국은 반대다. 한국의 엘리트들은 어떻게든 영어실력을 보여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그러다보니 한 국가의 원수가 외국에 나가서 그 나라의 말로 연설을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해방 직후나 근대화 시기에는 영어실력 자체가 곧 부와 권력이었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 자체도 워낙 드물었고, 산업적인 분업화나 무역 개방도 본격적으로 막 시작될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워낙 영어를 중요시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이제 지천에 깔려 있다. 이제는 영어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또 지금의 사회는 분업화나 아웃소싱을 통해 역할 자체를 워낙 정밀하게 나눠났기 때문에 모두가 영어를 잘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글로벌화가 중요하다지만 막상 주위를 보면 영어를 필요로 하는 직업은 의외로 적다. 예를 들어 외국계 기업을 다니면서도 영어를 사용할 필요조차 못 느끼는 업무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영어에 대해 강박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영어가 곧 성공의 열쇠인 것처럼 이야기하던 시대는 지났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그렇고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그렇고 지금처럼 영어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할 필요가 없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그렇고 봉준호의 ‘기생충’도 그렇고 모두 우리말로 쓰이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럼에도 전 세계의 찬사를 받는 문제가 없었다. 본래의 내용물만 훌륭하다면 그것을 번역, 통역하는 문제는 부차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외국어, 영어실력 같은 게 우선될 필요가 없단 이야기다. 영어를 잘해야 선진국이 되는 건 아니다. 차라리 영어교육에 쏟아 붓는 에너지의 절반 정도만이라도 기본소양이나 교양을 가르치는 데 투입하는 것이 선진국 소리를 듣는 데 더 확실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관음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 관음증은 보이지 않는 곳(어두운 객석)에서 보이는 곳(환한 스크린)을 지켜보는 행위다. 관객이 어두운 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보는 건 돈을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관음증적인 시선을 즐기는 것이다. 관객은 이 시선을 통해서 지금 보고 있는 게 스크린이 아니라 마치 실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어떤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몰입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공포영화를 보며 갑자기 튀어나오는 귀신에 놀라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귀신이라는 건 스크린 속 화상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쫓기고 있는 주인공의 시선에 몰입하다보니 실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보는 것처럼 관객 또한 주인공 못지않게 놀라게 되는 것이다.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시점은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잘 만들고 재밌는 영화일수록 관객은 더 몰입하고 빠져들기 마련이다.

관음증이라는 건 몰래 보는 것이다. 관찰자의 시선이 감춰졌기 때문에 대상자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여야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배우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냥 현실에서처럼 행동할 뿐이다. 물론 실제 촬영장에는 카메라가 있지만 이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배제할 뿐이다. 반면 무대에서는 관객들을 바라보고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한다. 일부러 보여지는 것이다. 말 그대로 show와 같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갑자기 뮤지컬 가수처럼 노래를 부르고 스크린이 사건 속의 장면이 아닌 무대로 바뀌는 순간 영화에 대한 몰입은 깨지고 만다. 관음증적인 시선이 해체되고 영화 속 현실은 무대에서 보여지는 쇼로 바뀐다.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하던 주인공이 갑자기 나와 시선을 맞추고 보란 듯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가는 또 갑자기 음악이 사라지고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모드 전환이 반복되다보면 지금 보는 게 현실의 장면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앞의 무대도 아니고 그냥 이도 저도 아닌 느낌만 가득할 뿐이다. 내가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하이브리드, 퓨전, 융합의 시대라고 해도 영화와 뮤지컬의 짬뽕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