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에게 가장 필요한 건 능력이 아니라 책임감이다. 일반인은 능력만 있어도 된다. 회사에 고용되어 일을 하든 본인의 가게를 차려 상품을 팔든 본인이 한 만큼 결과물을 만들고 대가를 얻게 된다. 하지만 공무원은 다르다. 공공행정에서는 본인이 한 만큼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본인의 가게를 찾은 손님에게 친절한 서비스를 베푼다면 그만큼 가게를 찾는 손님의 재방문율이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이 관공서를 방문한 민원인에게 아무리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도 그 공무원이 얻게 될 대가는 없다. 이렇듯 상응하는 보상이 없음에도 본인의 직무에 충실해야 하는 게 공무원의 직업적 소명이며, 노력과 보상 사이 비어있는 간극을 메워주는 건 바로 책임감이다.

행정이란 건 대부분 단순한 일이다. (호봉제가 적용되는 하위직급의 업무는 더욱 그렇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큰 고민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법률이나 제도로 정해진 기준을 실상에 적용만 하면 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신고나 신청을 받으면 정해진 절차대로 그 일을 처리해주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특별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능력보다는 절차대로 문제없이 일을 처리했는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행정에서 우선되어야 할 것은 결과보다는 과정이고 능력보다는 책임감이다.

장르 시스템은 일종의 보험과 같다. 사실 영화를 제작하는 건 도박에 가깝다. 아무리 큰 돈을 들인다 해도 이 작품의 흥행 여부는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작자들은 최소한의 흥행이라도 보장받기 위해 장르 시스템을 만들어냈다(다른 하나의 방법은 스타 시스템). 기존에 성공했던 영화들과 비슷한 스토리 구조, 주제를 반복적으로 만들며 일종의 보험을 들어놓는 거다.

예능도 마찬가지다. 떼토크가 유행일 땐 연예인이 떼로 출연하는 비슷비슷한 토크쇼가 유행하고, 군대를 체험하는 리얼 예능이 대박을 치자 경찰서, 소방서, 일반 회사생활을 체험하는 비슷한 예능이 생겨나고, 경연 포맷이 유행일 땐 비슷비슷한 경연 프로그램이 유행하고, 먹방이나 쿡방이 유행일 땐 음식을 요리하고 먹고 파는 예능들이 넘쳐난다.

장르를 기준으로 봤을 때 나영석은 장르 안에 있다. 그는 변용의 대가다. 장르의 큰 틀은 유지하되 그 안에서 다양한 응용과 변화를 통해 대중이 원하는 걸 정확히 짚어낸다. 여행 프로그램이지만 출연진을 캐릭터화하고 각종 게임 형식을 통해 대중적인 재미를 이끌어내고, 원로 배우와 배낭여행이란 생소한 조합을 통해 신선함을 주기도 했다. 또 삼시세끼나 최근의 스페인하숙처럼 직장인들이 갖고 있는 목가적인 삶에 대한 로망을 쿡방과 접목시켜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같은 여행 예능, 쿡방 예능이더라도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거나 응용함으로써 본인만의 차별화를 만들어내는 거다.

반면 김태호는 창작의 대가다. 정해진 장르에 갇혀있지 않고 항상 새로운 주제와 형식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무한도전은 정해진 장르가 없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표방했지만 사실 그 말 자체가 무형식, 무포맷이란 의미인 것처럼 다양한 예능적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 변화무쌍함 가운데서도 재미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일정하게 정해진 포맷의 예능이라 하더라도 주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만드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주마다 새로운 포맷과 아이템을 고민하고 기획하여 프로그램을 완성한다는 건 정말 소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거기다 재미까지 잃지 않는 건 극극극소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거다.

요즘엔 TV를 틀면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음식만 나온다. 음식을 요리하거나 먹거나 팔거나 파는 걸 도와주거나. 이럴 땐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이 생각날 때가 있다. 유행도 과한 일변도면 쉽게 질림에도 불구하고 기류에 편승해서 쉬운 방법만 좇는 건 아닌지. 채널도 많아지고 프로그램도 많아졌는데 매번 채널을 돌릴 때마다 볼만한 게 없는 것도 그 때문은 아닌지.

다당제, 양당제에 관한 논쟁이 뜨거운 건 그만큼 지금의 정치권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크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다. 민주화 이후 대략 30년의 시간이 지났다. 물론 이 시간 동안 진일보한 면도 없지는 않다. 일정 수준 합리적이고 투명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팽배해 있다.

노회찬이 비유했던 것처럼 불판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도 바꿔보고 선거제 같은 여러 제도들도 바꿔봤지만 거대 양당의 독식 구조는 바뀐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뻔하다. 양당제를 바꾸는 것이다. 기존의 양당제를 손보고 새로운 다당제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양단제와 다당제가 갖고 있는 각각의 장단점. 물론 숙고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모두 이론화된 공식일 뿐이다. 그것이 현실에 적용되는 순간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단지 계속 시도해볼 수밖엔 없다. 부작용에만 집착하면 그 어떤 것도 개선될 수 없다.

서구가 우리보다 성숙한 정치 수준을 갖고 있는 건 민족성 같은 어떤 성향이 우리와 달라서가 아니다. 우리보다 많은 역사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당연히 여겨지는 이데올로기들, 이를테면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같은 담론들을 만들고 다듬기까지 그들은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만든 것을 그대로 차용했을 뿐이다. 답을 찾아갔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답이란 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정확성이 아니라 시행착오다. 새로운 시도를 주저해선 안 된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과정을 통해 우리만의 어떤 지점을 찾아야 하는 거다.

7,80년대 국내 영화를 보면 어색한 대사가 많다. 살벌하게 다투는 와중에도 “아, 이런 자식을 봤나!”, “못난 놈 같으니라구!” 같은 대사가 나온다. 현실 같았으면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모자랄 판에 저런 점잖은 말이 오가는 걸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 수밖에 없다. 물론 제작진이 의도한 연출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검열이 심했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대사에서 욕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나이 지긋한 배우가 인터뷰할 때나 들을 수 있는 과거의 추억담처럼 들리지만 지금이라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정말 과거의 추억으로만 치부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요즘 포르노 사이트가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물론 성인 포르노라고 해서 성적인 표현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할 수는 없다. 영상물 중에서도 리벤지 포르노나 몰카 영상 같은 경우는 명백하고 중대한 성범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런 영상을 제작하거나 유포시킨 이들을 찾아 처벌하고, 웹상에서 해당 영상을 삭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해결책은 너무나 손쉬운 방법이었다.  포르노 사이트에 대한 접속 자체를 막아버린 것이다. 물론 사이버범죄를 추적하고 처벌하는 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렵다고 해서 포르노 사이트 전체를 폐쇄시키는 건 마치 영화 대사에 욕설이 나온다는 이유로 영화 제작 자체를 금지시키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

자유라는 건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자유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지만 어떤 가능성은 분명 타인의 자유와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영역들을 금기(범죄)로 정해놓고 만인을 만인에게서 보호한다. 물론 인간이라는 게 워낙 불완전한 존재이다 보니 아무리 제도적으로 제한을 가하더라도 각종 범죄는 끊이질 않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유를 거둬들일 수는 없다. 어떤 부작용이라 하더라도 자유 자체가 없는 것보다 나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상은 단조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직장, 학교, 집, 혹은 카페와 식당.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 하루를 반복한다. 우리의 뇌는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면 그 일상은 기억에서 없던 것으로 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갔다거나 특별한 이벤트를 겪었던 게 아닌 이상 일주일 전 혹은 한 달 전 이 시간에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 못하는 것도 그 시간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된 일상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기억이 공백으로만 남겨질 경우 허무, 권태, 무기력 등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간접경험이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단조로운 일상만이 반복되는 경우 허무, 권태 등으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기 쉽지만, 그렇다고 먹고 살아가기 바쁜 이들이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새로운 자극을 받고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할 수는 없다. 대신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TV를 보고 영화관에 가고 책을 읽고 게임을 한다. 이렇게 간접경험을 통해서나마 기억의 빈자리를 채워나가야만 앞서 말한 허무, 권태 등으로부터 벗어나 즐겁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간접경험이 제일 필요한 이들은 누구일까. 성장하는 아이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성장기의 간접경험은 자아 발달에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이미 다양한 간접경험을 하고 있다. 동화, 애니메이션, TV, 영화, 소설, 게임 등등. 사실 어느 세대보다도 많은 간접경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풍부한 간접경험의 콘텐츠를 수용하는 게 요즘의 어린 세대들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 TV나 극장을 통해서만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었던 반면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동영상을 본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간접경험이 제일 필요한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노인세대들이다. 이들은 시대적인 환경부터 요즘 세대와 많이 달랐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간접경험을 누리는 데 많은 제약이 있었다. 물론 경제활동을 하는 시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말 그대로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은퇴를 해야 하는 시기가 오자 문제가 생겼다. 경제활동을 멈추는 순간 그들의 일상 자체가 텅 비어버린 것이다.

노인들이 탑골공원 같은 곳을 전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할 게 없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나 학생을 집 안에 두면 혼자 TV를 보든 스마트폰을 하든 컴퓨터로 게임을 하든 열심히 시간을 보내겠지만, 노인 혼자 집 안에 있으면 할 수 간접경험이 거의 없다. (현재의 노인 세대는 PC 이용률이나 독서율 모두 낮은 편이다.) 결국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자꾸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단지 공원 같은 곳에 나와 장기나 바둑을 두고 경로당 같은 곳에서 또래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으로 그 공허함을 메우려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그들의 자리(무대의 뒤편)로 돌아가길 거부하기도 한다. 꼰대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무대의 중앙을 뺏기지 않기 위해 세대갈등을 부추긴다. 예를 들면 태극기부대의 노인들처럼.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단조로운 일상만으로 살 수 없다. 기억의 공백으로부터 오는 허무, 권태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한 발 물러나 있는 노인들에게 일상이란 더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또한 여행이나 체험 같은 직접경험을 할 수 있는 체력이나 금전적인 여건이 부족하기도 하다. 따라서 시간은 많지만 여건이 안 되는 노인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건 간접경험이다. 간접경험을 통해 기억의 공백을 메우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주 세대가 청소년들이 아닌 노인들이 되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PC나 스마트폰에 익숙한 요즘의 세대가 나이 들고 은퇴하고 어렸을 적 하던 온라인 게임 등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 상에서 유저들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활동의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고, 체력이 쇠퇴할 수밖에 없는 시기에 게임 속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건장한 캐릭터는 큰 대리만족을 안겨줄 것이다. 무엇보다 비용도 적게 들고 육체적으로 큰 소모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온라인 게임은 그 특성상 청소년보다는 노인에 더 적합한 간접경험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광화문 거리의 태극기부대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온라인 게임이 아닐까 싶다. 은퇴 이후의 삶으로부터 오는 헛헛함을 ‘나라 걱정’이라는 (헛소리에 가까운) 왜곡된 피해의식으로 채우기보다는 차라리 게임을 하면서 간접경험의 시간을 갖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 게임은 주변에 폐를 끼치지도 않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보다 재밌는 일이기도 하다. 도심 한가운데서 베레모와 군복을 입고 거수경례를 할 바에는 차라리 게임을 하면서 가상의 적과 전쟁을 벌이는 게 나을 거다. 태극기부대의 손에 들려야 할 건 태극기(또는 성조기)가 아니라 컴퓨터 마우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