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솔로몬이자 한심한 글쟁이여,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네! 꼬치꼬치 따지려 들지 말게나! 태어나셨나, 안 태어나셨나? 당연히 태어나셨지, 바보같이 굴지 말라고. 돋보기로 마실 물을 들여다보면 말이지 -이건 어떤 기술자가 말해준 얘긴데- 맨눈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들이 우글우글하다는 거야. 벌레를 보았으니 물을 마실 수가 있나. 물을 못 마시니 목이 타서 죽고 말겠지. 당장 돋보기를 깨부수게, 보스, 그러면 작은 벌레들은 다 사라진다네. 그러면 자네도 목을 축이고 다시 기운이 번쩍 나겠지!"

1. 부자관계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잘 풀어낸 것 같다.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유능한 아버지를 둔 아들의 비애랄까. 상황상 유능한 아버지들은 대게 아들(혹은 딸이든)에 대한 기대감이 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능력 탓에 아들 또한 어느 정도의 싹수를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유능한 아버지들은 대게 아들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적인 여건을 만들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가 그러셨듯 영화 속 영조도 "더 좋은 환경임에도 왜 공부를 게을리 하느냐"며 아들을 꾸짖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감은 아들에게 부담감으로 전이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그런 아버지들의 기대감이라는 건 그 충족치가 늘상 높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들이 이루는 성과에 만족하는 경우가 적기 때문이다. 결국 일부러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칭찬보다는 질책이 많아질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은 아들에게 있어 부담이나 스트레스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 존경과 서운함을 동시에 가질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이런 복잡다단한 부자의 관계가 세밀하게 서술되어진다. 거기에 조선왕실이라는 상황적인 특수성과 영조의 괴팍한 캐릭터가 더해지니 이 서사의 클라이막스는 그만큼의 개연성과 사실성을 갖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도세자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 "왜 영조는 아들을 죽였을까?"란 물음에 대해 부자관계라는 근원적인 코드 속에서 영화 나름대로의 착실한 답을 찾았던 것 같다.

2. 배우에는 세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첫째로는 연기인 게 너무 티나는 배우들이다. 연기가 어색해서 자꾸 극적인 흐름을 깨뜨리는 배우들이다. 둘째로는 연기인 게 티가 나지 않는 배우들이다. 연기가 자연스럽고 극에 잘 녹아들어서 이들이 배우인지 영화 속 인물인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이들이다. 마지막으로는 오히려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 존재가 영화 밖으로 드러나버리는 배우들이다. 이들은 관객에게 너무도 큰 임펙트를 주기 때문에 영화적 몰입에서 이따금 벗어나게끔 할 때가 있다. 그 순간만큼은 영화를 보고 감탄하는 게 아니라 연기를 보고 감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에 마이너스가 되는 건 절대 아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묵직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대표적인 배우가 송강호다.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재밌다는 걸 넘어서 행복하단 느낌이 든다. 근엄한 목소리와는 거리가 먼 그가 어떻게 왕을 연기할까 의아했던 적이 있었지만 아마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은 송강호의 연기 걱정이 아니었을까. 특히 후반부에서 사도세자가 죽기 직전 영조와 사도세자의 상상적인(?) 대화씬은 압권이었다. 이준익 감독의 말대로 짧은 시간 내에 희노애락애오욕의 칠정을 모두 뱉어냈고 그 순간마다의 호흡 하나하나가 가슴에 콱콱 박혔다. 절정의 순간 목이 메이다 못해 쇳소리를 내는 부분은 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촬영 현장에서 배우가 저런 연기를 표현해낼 때 그것을 모니터링하고 있던 감독이 느끼는 어떤 전율, 희열 같은 건 대체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다. 이준익의 페르소나는 정진영이라지만 앞으로 그의 영화에 송강호가 자주 등장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3. 비교적 짧은 분량에도 무게감을 줘야 했던 정조 역에 소지섭을 캐스팅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극에 맞게 슬픈 눈을 가진 배우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잘생긴 외모였다는 정조에 대한 기록과도 잘 맞아떨어졌다. 무엇보다 소지섭과 춤사위라는 생소한 조합이 의외로 괜찮았다. 배우의 동양적인 선과 부채춤의 애달픈 절제미가 잘 어우러졌다. 다만 너무 친절한 편집이 흠이었다. 감독 입장에서야 관객을 염두한 편집이었겠지만 정조의 동작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일히 플래시백 컷들을 넣었던 건 다소 직설적이었다. 무언의 춤사위만 남겨 놓았다면 더 여운이 남는 메타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오점은 역시 문근영이었다. 촉촉한 실눈으로 엔딩을 감상해야 할 시간에 어색한 할머니 분장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실소가 터져나왔다. 작은 웃음소리들이 다른 객석에서도 들렸던 것을 생각하면 나만 그렇게 느꼈던 건 아닐터. 극적인 애절함을 위해 배우를 바꾸기보다는 분장을 선택한 건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노년 분장까지 염두해두었다면 애초에 문근영 같은 배우를 섭외하진 말았어야지. 문근영이 누군가. 이 나라의 대표 동안 배우지 않나. 아무리 피부를 노화시키고 주름을 만들다 한들 선 자체가 동글동글한 문근영의 얼굴은 누가 봐도 그냥 문근영 그 자체였다(헐리우드의 분장 기술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만큼). 아마 문근영의 노년 분장은 두고 두고 회자될 해프닝이 될 것 같다.

영화 '은교'에서는 69살의 노인 역을 30대 배우(말이 30대지 사실 박해일은 김고은과의 투샷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동안의 외모를 가진 배우다)가 할 수밖에 없었다. 노배우들이 캐스팅을 부담스러워했다는 후문도 있었고 연출자 측에서 대중적인 정서를 고려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덕분에 거부감은 덜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잃는 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소녀를 마음에 품는다는 게 핵심적 설정이었기 때문에 영화는 시작부터가 반쪽이 되고 말았다. 은교 역에 대한 캐스팅이 거의 완벽했다는 평가를 염두하면 더욱 안타까운 선택이었다. 섬세한 연출이나 영화적 완성도를 봤을 때 굉장한 영화가 나올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결국 예술적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대중의 몫이 되는 거다.

맥심 화보의 핵심 코드는 비아냥이다. 성범죄를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나쁜 남자'란 말의 사전적 의미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악인 전문 배우' 김병옥을 모델로 삼고, 여성들이 좋아한다는 '나쁜 남자'에 대한 의미를 반어적으로 비유하고자 했다.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에서 '나쁜'이란 부분이 갖고 있는 이중적이고 모호한 의미들을 꼬집는 것이다. 특히 "진짜 나쁜 남자는 이런 거다, 좋아 죽겠지?"란 텍스트까지 덧붙이면서 그 비아냥의 의도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영화에서 하정우가 조폭을 연기하면(사실 어떤 범죄자를 연기해도) 사람들은 멋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김병옥이 같은 조폭을 연기할 땐 그렇지 않다. 실제 조폭들이 풍길 것 같은 무서움, 삭막함 같은 걸 느낀다. 그의 인상부터가 실제 조폭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출자들은 김병옥 같은 배우들을 악역으로 쓴다. 그 배역을 미화하기보다는 극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맥심측이 화보 장면을 미화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하정우 같은 배우를 화보의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정말 악인 같이 악인을 연기했던 김병옥이 모델이었고 친절하게도 그의 영화 이력까지 나열하며 그가 왜 사전적 의미의 나쁜 남자에 걸맞는지까지도 설명해주었다. 이 화보에 필요한 건 멋있는 배우가 아니라 악인이 어울리는 섬뜩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단지 어떤 장면을 멋스럽게 다룬다고 해서 그것을 미화하는 건 아니다. '베테랑'의 유아인도 깔끔한 수트핏과 유려한 액션을 선보였다고 해서 개념 없는 재벌을 미화시켰던 건 아니다. 이 화보도 마찬가지다. 잡지 커버에 맞는 화보로서의 미적 퀄리티만을 갖췄을 뿐 김병옥이 연기하는 '나쁜 남자'를 미화시키려는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 왜냐면 최대한 멋있지 않아야만 여성들이 싫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베테랑'에서도 유아인이 밉상이 될수록 결말이 사는 것처럼). 또 그래야만 여성들이 말하는 '나쁜 남자'의 의미에 대해 비아냥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사람을 잘 찾는다. 탐사보도에서 중요한 건 인물이다. 그런데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의 사람 찾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심지어는 경찰도 못찾는 사람까지 찾아낸다. 안 나올 것 같은 목격자부터 시작해서 도망다니거나 잠적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찾아내어 카메라에 담고 인터뷰를 딴다. 매번 수소문 끝에 찾아냈다고 하는데 그 수소문이라는 게 어떤 과정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을 때까지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끝내 결과물을 얻어내는 거다. 그만큼 탐사보도의 완성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고 시청자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다.

둘째, 스토리텔링이 좋다. 흡인력이 상당하다. 초반에는 호기심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몰입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종반에는 그 궁금증이 탁 풀리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때로는 전개에 반전을 주어 시청자들의 예상을 뒤엎는 짜릿함을 주기도 한다. 마치 기승전결이 잘 짜여진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보니 연식이 오래된 시사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꾸준한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젊은층 사이에선 마니아가 형성될 정도.

셋째, 시스템을 문제삼는다. 가끔은 그렇지 않은 회차도 있지만 '그것이 알고싶다'의 대부분은 살인, 사기 같은 미시적 사건들을 다룬다. 앞서 스토리텔링이 좋다고 했지만, '그것이 알고싶다'가 추리소설과 다른 건 허구가 아닌 실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사람의 실제 죽음을 흥미나 호기심의 관점에서 접근해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의구심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어떻게 그러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제도적 결함이나 장치의 미비 등을 따져보고 때로는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미시적인 수준에서 흥미를 끄는 데 그치지 않고 구조와 시스템을 고민하는 탐사 저널리즘의 본분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