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이가 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것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먹먹하게 다가오는 건 운명론, 종교 등에 대한 태도가 바뀐다는 것이다. 스무 살의 나에게 운명론이나 종교에의 귀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던 것 같다. 의지만 갖는다면 어떤 것이든 다 가능하게 만들 수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유의 시간이었고 선택의 시간이었다. 마치 광활한 초원에서 미지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처럼. 하지만 그런 미지의 초원 같은 삶의 공간들, 비어있는 것과도 같은 그 공간들은 시간이 갈수록 책임이라는 무거운 영역으로 채워지게 된다. 점점 선택의 여지는 줄어들고 지금까지의 선택에 따른 결과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얽매이는 것, 자유롭지 못하고 묶여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점점 어려워진다. 삶을 사는 것이 어려워진다.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쉽지 않은 일인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전에는 자유라는 것을 만끽했다면(사실 만끽하는 법조차도 모른 채 그저 겁 없이 온몸으로 맞아들였을 뿐이지만), 지금은 자유라는 게 괴로울 지경이다. 책임과 결과라는 그 무거운 무게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시점에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인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건 이런 이유에서다. 종교와 같은 운명론은 앞서 말한 책임, 결과에서 비롯되는 중압감을 덜어준다. 그것도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그냥 믿어버리면 된다. 내가 선택을 하고 내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은 절대자의 의지대로 이루어질 뿐, 나는 그냥 그 순리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책임과 후회 따위는 필요 없다. 어차피 십자가를 짊어지는 건 내가 아니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종교를 마약에 비유하기도 한다. 나의 삶에 대한 나의 책임에서 한 발짝 물러설 수 있는 편리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약 없이 삶의 고통을 맞닥뜨리는 것은 정말 어렵고 버거운 일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시기가 가장 힘든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한한 자유를 가진 젊음의 시기와 삶의 무게에 체념하고 오히려 익숙해지는 노년의 시기, 두 지점의 가운데에 있는 시기가 바로 지금의 순간인 것 같다. 이제 어떤 것을 택하느냐에 따라 되돌아오는 그 무거운 중압감을 알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내가 택해야만 하는 가능성들 앞에서 무겁고 외롭게 남겨져 있는 그런 상태. 정해진 답도 없이 오로지 결과와 책임만이 뒤따르는 것. 역시 쉽지 않은 것 같다.

마흔을 앞두고 결혼을 한 직장 선배가 있다. 하루는 그 선배에게 배우자의 어떤 점이 좋아서 결혼했냐고 물었다.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착해서 좋았다는 거였다. 이것저것 재보고 깐깐하게 구는 깍쟁이 같은 여자의 입에서 나온 답이라고 하기엔 뜻밖이었다. 하지만 이유를 들어보니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나이에 착한 사람 찾기 힘들어. 보통 나이가 들면 자존심도 강해지고 자기만의 그런 것들이 굳어지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이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다고 먼저 말하고 표현했어. 나는 그게 좋아 보였어.”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굳어진다. 말랑말랑하던 신생아의 머리뼈가 시간이 지날수록 딱딱해지는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자존심이나 자기만의 신념, 취향 같은 것들이 확고해진다. 물론 자기만의 주체성, 자아를 찾는 건 중요하다. 성인이 돼서도 신생아처럼 말랑말랑한 머리뼈를 갖고 있다는 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머리뼈가 말랑하다는 건 아무것도 아닌 외부의 충격에도 뇌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크다. 어른일수록 남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미 머리가 굳어졌기 때문에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설령 듣기 싫은 말을 들었다고 해도 쉽게 흘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나이가 어릴수록 외부의 작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흔히 어린 아이들을 스펀지에 비유하는 것처럼 어떠한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주변의 것들을 빨아들이고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린다(이런 무분별함 때문에 어른들을 걱정시키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를 흡수할 수 있는 아이 같은 수용력을 유지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차량유리에 붙이는 선팅 필름도 마찬가지다. 바깥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바깥이 잘 보이는 선팅 필름은 그 투명도의 차이가 클수록 비싸기 마련이다. 정말 아쉬운 건 ‘나’라는 차의 유리 또한 그런 비싼 선팅이 되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요즘 들어 그렇게 느낄 때가 많다. 바깥에서 보든 안에서 보든 유리 너머가 잘 보이지 않는 싸구려 선팅만 되어 있는 그런 상태.

헌법재판소는 여론의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 행정부와 입법부는 대의제에서, 사법부는 법리와 판례에서 각각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에게는 그런 정당성이 부족하다. 법관이 선출직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 세밀하게 위임된 법원이나 축적된 판례도 없다. 헌법이라는, 그것도 관습법을 포함하는 아주 광범위하고 애매한 기준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가 국민정서를 거스르는 결정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작품에서는 도시(토론토)의 원거리 뷰가 자주 나온다. 계획도시답게 규칙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건물들, 네모반듯하게 촘촘히 박힌 아파트의 유리창들. 질서정연한 모습의 도시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과 같다. 그렇게 거미는 도시를 통제한다. 거미는 이성의 질서를 의미하는 거다.

그런데 욕망이란 건 일정한 통제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어떤 대상이 언제나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굳이 욕망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대상이 (질서와 이성에 의해) 금기시 되는 무엇이라면,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비로소 욕망이란 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작품에서의 두 주인공도 (다른 이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 건 불륜이라는 금기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여자에 대해 탐욕을 느낀다. 그리고 첫 장면에 나오는 고급(?) 스트립바도 마찬가지인데, 매우 절제된 상황 속에서 행해지는 스트립쇼는 지켜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남성들의 성적 쾌감을 최고조로 만든다(‘아가씨’의 낭독회처럼).

따라서 욕망과 질서의 관계는 엘리베이터의 거울과 같다. 양측 벽면에 거울이 달린 엘리베이터를 타서 한쪽 거울을 보면 다른 쪽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이고 다시 그 거울에 비친 내 쪽의 거울이 보이는 식으로 두 면의 상이 무한히 반복되어 쪼개진다. 욕망과 질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작품에서도 아담(질서)이 앤소니(욕망)를 몰아내고 이성적 자아를 회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그 자아 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리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등장한 거미는 아담을 보며 겁을 먹은 듯 잔뜩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거울처럼 욕망과 질서의 정반합이 무한히 반복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재림 감독은 아이러니 전문가다. 예를 들어 굉장히 진지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굉장히 경쾌한 배경음악을 삽입한다. '우아한 세계'에서 용역 건달들과 노가다패들이 포크레인과 쇠파이프로 피튀기는 패싸움을 벌일 때 경박한 음악을 깔면서 코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처럼('더킹'의 첫 장면인 교통사고씬도 배우들의 과장된 표정과 신나는 록음악으로 시작되는 것처럼). 그럼 내용과 분위기가 어긋나면서 생긴 부조화가 무거움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한재림 감독은 블랙코미디란 장르에 가장 특화된 감독이기도 하다. 블랙코미디란 말 자체가 블랙과 코미디라는 상반된 두 용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아이러닉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블랙코미디에서 가장 어려운 건 블랙과 코미디의 비율을 어떻게 나눌 것이냐에 대한 문제다. 너무 블랙으로 가면 풍자와 재미를 잃을 것이고 또 너무 코미디로 가면 장르 자체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따라서 둘 사이의 이상적인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한 일인데, '더킹'은 그런 균형이 좋았다. (조정래의 '풀꽃도 꽃이다'에서 느꼈던 아쉬움과는 반대로) 소재부터가 굉장히 시국적인 이슈였기 때문에 최대한 힘을 빼려 했던 게 주효했던 것 같다. 특히 엔딩씬을 배성우의 "아빠가 미안하다"로 마무리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