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도. 믿고 보는 윤종빈과 하정우의 조합. 하지만 그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린 작품. 하정우에게는 거의 최악의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번처럼 그가 캐릭터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물론 하정우만의 문제는 아니다. 민망했던 내레이션이 시작되면서 들었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영화 자체가 전반적으로 잘 짜여진 느낌은 아니었다. 웨스턴사극을 지향하면서 산골짜기를 배경으로 하는 화적을 소재로 하는 것부터가 무리가 아니었을까. 차라리 마적단이었으면 어땠을지. 또 스타일리쉬함을 추구하는 웨스턴사극에 조선시대 민초의 애환 같은 다소 장엄한 주제까지 담으려다보니 영화가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비교하자면 '놈놈놈' 같은 영화에 만주 독립군의 애국심 따위를 억지로 삽입하려는 느낌이랄까. 특히 웨스턴과 민초의 어정쩡한 조합은 배경음악에서 두드러졌다. 배경음악은 컨츄리 느낌의 웨스턴 음악이 깔리는데 뜬금없이 화면엔 성난 백성들의 봉기 장면이 나오고 거꾸로는 장엄한 음악에 게임 캐릭터 같이 생긴 화적단의 모습이 등장한다. 본디 웨스턴 장르라 함은 배경음악이 생명인데.

명량. 기대가 너무 컸던 건지 생각보다는 아쉬운 점이 많았던 영화다. 한 시간 가량 계속되는 전투씬은 놀라울 정도였지만 딱 그 뿐이었다. 그 전투씬에 거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던 탓인지 전체적인 편집이나 극의 전개는 다부작을 염두해둔 영화라 하더라도 영 어색했다. 역대 관객 순위에 올라있는 여타 작품들에 비해서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편. 영화 자체의 작품성이나 완성도보다는 영화보다 더 극적인 역사를 만들었던 이순신이란 개인에 대한 관심이 관객을 영화관으로 이끄는 것 같다.

물론 이 작품을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한 건 아니지만 감독인 윌리 피스터도 그렇고 전반적인 제작진이 놀란 사단인만큼 기존의 놀란 작품들처럼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영화의 힌트나 키워드를 유추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조니 뎁)의 이름은 윌인데 영어로 표기하면 Will, 사전적인 의미로는 '의지'를 뜻한다. 의지라는 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의식적 행동을 하게 하는 내적인 욕구를 의미한다. 기계가 생물이 될 수 없는 건 바로 이 의지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은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라 할지라도 종족 번식이라는 의지를 갖고 자가 번식을 한다. 반면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고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기계라도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외부에서 입력한 명령어대로 연산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핀'이란 인공지능 컴퓨터가 의지를 갖게 된다. 주인공인 윌 캐스터의 기억·생각 등이 프로세서에 업로드 되면서 기계가 인간처럼 의지를 갖게 되는 초월체(영화 제목처럼)가 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다. 의지라는 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이고 그 욕구에 의해 감정이 발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의지와 감정이라는 건 불가분의 관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트랜센던스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로서의 신보다는 인간과 비슷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갖고 있는 그리스의 신들을 닮아있기도 하다. 영화에서도 에블린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감정은 트랜센던스 스스로를 멈추게 하였다. 바이러스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블린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전지전능한 트랜센던스도 불합리한 선택을 하고 만다. 인공지능을 무결점적인 존재로 바라보던 기존의 시각을 깨는 순간. 지금까지 자각 능력을 갖춘 미래의 기계 문명이나 인공지능이라 하면 '터미네이터'나 'A.I.', '매트릭스'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고 냉철하고 빈틈이란 찾아볼 수 없는 기계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실제로는 스스로를 작동시킬 수 있는 기계, 다시 말해 의지를 가진 인공지능이란 결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에블린은 죽기 직전 깨닫는다. "윌, 정말 당신이었구나."

좋은 작품은 언제나 물음과 여운을 남긴다. 그런 점에서 괜찮은 영화였다. 고민을 많이 하게 하니까. 과연 무엇을 주인공인 '윌'이라 할 수 있는지. 프로세서와 온라인을 떠다니는 전기 신호인지, 애초에 강에 뿌려진 한줌의 재인지, 아니면 과학기술에 의해 복원된 그의 신체인지. 더 나아가면 '나'란 무엇인지. 정신이 '나'인건지 아니면 육체가 '나'인건지. 두 가지 다 있어야 하는 건지, 하나만 있어도 되는 건지. 여기서 또 재밌는 건 윌의 스승이었던 요셉 태거(모건 프리먼이 분했던)란 이름에서 '요셉'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남편으로 예수의 신체적인 아버지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는 정신적인 아버지인 하나님과 육체적인 아버지인 요셉, 두 아버지를 가진 셈. 물론 섣부른 유추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하는 영화인 건 분명하다.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쟁 영화는 관객들의 로망이다. 실제 현실세계에서 전쟁은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인간 행위로 일컬여지지만 영화의 스크린 안에서 전쟁은 최고의 오락물이 되기도 한다. 전쟁은 인간의 가장 말초적인 본능을 긁어주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지고, 기관총에서 연발된 총알들은 파편을 튀기고. 인간 안에 깊숙히 내재되어있는 파괴적 욕구와 폭력성, 인간에게 있어 전쟁 영화야말로 이 본능적 욕구를 분출시킬 수 있는 시원한 돌파구가 되어준다.

기존의 전쟁 영화들이 그랬다. 근육으로 다져진 상반신을 내보이며 일당백의 기개로 수백의 베트콩들을 상대하는 '람보'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전형적인 전쟁 영화다. 적과 아의 명확한 구분 속에서 이런 영화들은 아군의 피는 적군의 피로 갚아주는 원초적인 스토리 라인을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확실한 볼거리와 액션신으로 승부를 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이나 진주만(2001), 블랙호크다운(2001) 같이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컴퓨터 그래픽이란 영화계의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전쟁영화에 입혀졌을 뿐, 재현되는 전투의 스케일이나 사실감을 제외한 전반적인 전쟁의 스토리 라인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사실적인 컴퓨터 그래픽이 동원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이 큰 스케일의 전투신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진주만은 그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늘로 향했다. 그동안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는 재현해내기 어려웠던 공중전을 거의 완벽하게 그려냈다. 블랙호크다운은 사실감 있는 컴퓨터 그래픽에 감각적인 스타일을 더했다. 리드미컬한 음악과 함께 재현되는 현대의 시가전은 기존의 전쟁영화에 '세련됨'를 입혀주었다.

하지만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기점으로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전쟁 영화는 그 내용과 성격이 180% 달라졌다. 2001년 본토 심장에 행해진 9.11 테러로 인해 미국인들은 큰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테러라는 실체 없는 적과의 전쟁은 미국인들로서는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2차대전 때는 독일과 일본이, 냉전시대 때는 소련이 그 역할을 착실하게 맡아주던 '적'이라는 존재가 모호하고 애매해진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이라크 전쟁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전쟁은 하고 있지만 대체 왜 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지금까지 미국(혹은 서구 국가들)은 전쟁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응당 해야 할 것이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인들은 전쟁 자체에 대해 고민을 갖기 시작했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끔찍한 전쟁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자문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경험으로 황폐해져가고 있는 청년 병사들의 상태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공격을 받고 있는 현지인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겪어야 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의 전쟁 영화는 달라졌다. 전쟁이란 것에 대한 심오한 고민을 시작한 미국인들의 혼란은 영화의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졌다. 전처럼 단순한 흥미 위주의 볼거리 영화는 관객과 전문가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대신 전쟁이라는 한정된 시공간 내에서 점차 한계에 부딪혀가는 인간의 나약함, 전쟁의 공포와 잔인함에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젊은 군인들, 끊임없이 전쟁을 필요로 하는 미국 군수산업계의 압력에 대한 자각 등이 전쟁 영화의 내용으로 새롭게 채워지고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의 후속편으로 제작된 드라마 더 퍼시픽(2010)에서는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정서가 황폐해지다못해 서서히 미쳐가는 주인공들이 여과없이 등장한다. 자신의 처지와 별다를 것이 없는 일본군을 죽이려면 먼저 그 자신이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전쟁광이 되어야 하는 현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전역자들. 전편과 비교해볼 때 전투신의 분량이나 세밀한 고증을 통한 사실적인 묘사는 다소 부족했으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군인들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깊이 있고 심층적으로 묘사되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승리해 수리바치산 정상이 성조기를 꼽는 유명한 사진을 다루고 있는 아버지의 깃발(2006) 또한 전쟁으로 만들어진 영웅주의에 대한 허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전쟁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영웅은 개인이 국가가 강요하는 대의 안에서 희생당하고 소모되는 현실을 아름답게 미화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영웅이 되었던 이들은 자신의 영웅담이 결코 아름답거나 용맹스럽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없이 죽어간 동료들을 남겨두고 자신이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함께 전쟁 영웅이 된 현실에 힘겨워 한다.

아바타를 제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허트로커(2008)는 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극도의 공포와 중독성을 다루고 있다. 폭탄물 처리반인 영화의 주인공은 정상적인 인물이 아니다. 제멋대로 영웅 행세를 하며 긴장과 공포를 즐기고 이를 통해 느끼는 희열 같은 것에 중독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쟁은 그의 삶 자체가 되었고, 결국 그는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그를 통해 일그러진 영웅 자신과 이들을 만들어내는 현대인들에게 섬뜩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린존(2010)은 보다 직설적으로 전쟁에 대한 명분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내의 대량살상무기로부터 자국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라크 전쟁을 개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과연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 상부의 명령에 의해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해매는(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군인들의 '똥개훈련'은 전쟁의 명분을 넘어 과연 어떤 이들이 전쟁을 원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만든다.

더 이상 영화에서 '나'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은 광기 어린 일본, 독일 군인이 아니다. 바로 전쟁 그 자체가 고통의 대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쟁이란 경험이 인간에게 주는 무게감이 전쟁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개봉되고 방영된 전쟁 영화나 전쟁 드라마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아직 분단을 벗어나지 못한 현 상황의 한계였을까. 전쟁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이의제기를 시작한 해외의 전쟁물들과는 달리 국내의 영화나 드라마는 여전히 전투신의 화려함에 목숨을 걸고 단순한 서사 구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모건 프리먼, 이 할아버지 정말 좋다. 무엇보다 그 흑인 특유의 중저음 목소리가 너무 좋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매력적인 포근한 목소리. 나이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항상 우수에 가득 차있는 듯한 커다란 눈망울. 맞다. 그냥 눈이라고 하기보다는 눈망울이라고 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어울린다. 그 눈망울은 항상 변한다. 푸근한 동네 아저씨의 정겨운 눈망울이 되기도 하고, 어쩔 때는 엄청난 야욕을 부리는 권력자나 악역의 차가운 눈망울이 되기도 한다.

그런 그가 정말 그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 것 같은 느낌이다. 부족하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고 그저 자기 자신을 연기한 듯 하다. 헐리우드 스타라는 자신에게 우쭐하기도 하고, 자기 집 번호도 잊어버릴만큼 모자라기도 하고, 자신이 입은 티셔츠를 자랑하는 푼수를 보이기도 하고, 우연히 만난 사람을 진심으로 돕는 따뜻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배우 모건 프리먼이 아니라 순전한 인간 모건 프리먼이다.

원래 영화를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 영화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많아지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았다. 그냥 그저 보는 것 뿐이었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전부였다. 잔잔해서 좋았고, 잔잔하면서도 희망이라는 것이 보여서 좋았다. 따뜻하다라고 하기에는 말의 뜻이 너무 강한 것 같고, 그렇다고 훈훈하다고 하기에는 또 뭔가 판에 박힌 느낌이다. 그냥 푸근했다. 모건 프리먼의 목소리처럼.

그리고 또 좋았던 것은, 여 주인공으로 나왔던 파즈 베가의 발음. 오래 전에 영화 '프렌치 키스'에서 케빈 클라인이 프랑스 억양으로 영어를 발음하는 것에 인상깊어했던 적이 있었다. 영어보다 한층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프랑스 억양식 영어는 케빈 클라인의 깊은 목소리와 굉장히 잘 버무려졌었다. 이번에도 낯선 영어 발음은 역시 매력적이었다. 파즈 베가의 스페인 억양식 영어 발음은 뭔가 또박또박하면서도 액센트가 강하고 발랄했다. 앙증맞다고 해야 하나.

명작이라 불리는 영화일수록 영화를 단순히 보는 느낌 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읽는 느낌이 강하다. 마치 책을 읽는 느낌이다. 영화는 관객의 상상력을 제한한다.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장면, 장면과 스토리의 울타리 안에서 관객들은 영화를 받아들일 뿐이다. 최근 개봉되고 있는 화려하고 빠른 전개의 영화들, 물론 이런 영화들처럼 역동적이고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영화는 없겠지만 진정 영화를 음미하는 시간, 마음 속으로 영화 속 주인공도 되어보면서 충분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을 갖기엔 너무나 속도감이 넘친다.

반면 책은 다르다. 책은 영화처럼 구체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오히려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책과 소설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툭툭 소스만 던져주고 있을 뿐, 그 소스를 가지고 가슴과 머리로 진정한 스토리를 엮어나가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보고 있는 것은 깨알 같이 글자가 적힌 흰 종이에 불과하지만 느끼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방대하고 재미있는 상상이다.

어렸을 적, 으레 그 또래 남자아이들이 한번쯤은 그러했던 것처럼 나 또한 삼국지에 빠져있었던 때가 있었다. 어린 내가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은 작은 삼국지 소설책에 불과했지만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넓은 황야를 가득 메운 수백만의 대군들과 희대의 장수들이 뿌연 먼지와 거대한 함성을 일으키며 천하의 자웅을 겨루는 장면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렸던 나에게 삼국지라는 책은 황홀한 상상의 삼매경이었다. 그러던 중, 외가댁에 갔다가 외할아버지가 보시던 당시 중국 영화 '삼국지'를 우연히 보게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영화는 내가 상상하던 삼국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드넓은 황야를 가득 메운 백만 대군은 온데간데 없고 영화 속에서는 그저 볼품없는 수십의 엑스트라들이 당시의 전쟁을 힘겹게 재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이 영화는 마치 책과 같았다. 영화를 보고 있다기보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인공들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큰 여운이 몰려왔고 요즘 영화랑 다르게 느릿느릿하면서도 낭만적인 장면들은 그 대사들의 여운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여운도 그냥 텅빈 공간이 아닌 뭔가를 계속 생각하게 하는 의미 넘치는 여운이었다.

사실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한 카드 광고에서 카드 이용액을 늘리기 위해 인용했던 좀 유명한 말에 불과한 줄 알았다. 인생을 즐기라는 이 문구는 현란한 조명 아래 춤을 추는 한 젊은 남자와 더불어 인생과 청춘은 즐기기에 부족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춤사위를 보고 있자면 당장 지금이라도 카드를 가지고 흥청망청 생각 없이 내 인생을 즐겨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훨씬 무겁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잡으라는 말은 그보다는 보다 무겁고 의미있고 진중하다. '특별한 인생을 만들어라(Make your life extarordinary).' '카르페 디엠'이란 말을 비로소 완성시켜주는 문구다. '카르페 디엠', 순전히 '생각 없이' 인생을 즐기란 뜻은 아니다.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만들라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함, 그것을 완성시키고 그것을 즐길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을 즐길 줄 아는 것이 바로 영화에서의 '카르페 디엠'이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 해마다 몇명의 아이비리그 진학 졸업생들을 배출하느냐가 이 학교의 유일한 목표다. 이런 영미식의 교육제도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연말마다 걸려졌던 명문대학 합격자 명단은 마치 학교의 교육에 대한 슬로건과 마찬가지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공부와 대학 입시가 우선되어졌다. 그 외의 것들, 대학 입시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은 철저히 배제되어졌다. 오로지 입시와 공부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입시와 공부만으로 얽매여져야만 했던 학생들 그 하나하나가 그 누구보다도 깊은 감수성과 삶에 대한 열성을 갖고 있을 나이의 소년들이란 점이다. 멋진 시의 한 구절에 꽂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꿔버리는가 하면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든 아름다운 소녀에 눈이 멀어 정신을 놓기도 한다. 명백한 이유라는 것은 없다. 단지 이끌리는데로 이끌려가는 것 뿐.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정은 봄만 되면 흐드러진 벚꽃으로 만개되어졌다. 산 중턱에 자리한 학교였는데 그 산 거의 대부분이 벚꽃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우리는 일년에 한 번 그 아름다운 광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교실 창문으로 흐드러진 연분홍 빛의 향연을 보려 시커먼 남자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창문을 향해 턱을 괴고 있었다. 때론 교정으로 나가 떨어진 벚꽃잎들을 쥐고 뿌리며 놀기도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열시까지 하루종일 입시에 매달리는 건조한 일상을 지내야 했지만 연분홍 벚꽃들을 보면서 설렜던 것, 창문 밖으로 화창한 날씨를 보며 연애시를 쓰고 그 연애시를 적은 종이 테두리를 라이터로 이쁘게 태우며 가슴 졸였던 그 날들.

당시 하루하루 힘들게 공부했던 것은 지금의 나를 또는 앞날의 나를 있게끔 해주는 시간이었고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말그대로 나의 삶을 그리고 미래를 유지시켜주고 가능하게끔 만드는 것 뿐이다. 삶을 지탱해주는 것, 삶의 에너지는 따로 있다.

밤 열시가 되면 비로소 하루 일과가 끝났다. 나와 같이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던 친구들과 우르르 도서관에서 밀려나왔다. 도서관은 산 꼭대기에 위치했다. 늦은 오후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올라갔던 무거운 발걸음과는 달리 내리막 산길은 매우 가벼웠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시원한 밤공기와 저멀리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야경, 어깨동무하고 있는 친구들, 그리고 뿌듯함.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이 영화가 입시만을 강조하는 학교와 교육제도를 비판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영화에서 노래하고 있는 낭만과 이상은 영화 속 학교와 사회에 의해 날개가 부러지고 한계에 부딪힌다. 하지만 영화가 꼭 현 사회와 영화 속 학교의 모습을 비판하려고만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교사의 말대로 학교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존재다.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제도나 사회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카르페 디엠', 암울하고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현실 속에서도 시와 낭만을 통해 현재를 잡을 줄 아는가, 인생을 즐길 줄 아는가다. 중요한 것은 포근한 밤공기에서 낭만과 기분을 느낄 수 있느냐,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을 깨닫느냐다.

세상은 믿음 없는 자들로 넘쳐있기에, 전통과 규율, 딱딱함 밖에 모르는 바보들로 넘쳐있기에 시와 사랑이 더욱 낭만적인 것이 아닐까. 삶을 유지하는 것들,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어쩔 수 없는 바보들이 있기에 나만의 낭만, 나만의 즐김이 빛을 바라고 나만의 시가 한 편 쓰여지는 것이 아닌가.

역설적이다. 시인은 지금 죽어있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더욱 그 가치를 발하고 시 또한 법률, 경제, 기술 등이 세상을 뒤덮고 있기에 더욱 낭만적이다. 물론 모두가 이를 깨닫고 아는 것은 아니다. 현재를 쥘 수 있는 사람만이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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