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관음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 관음증은 보이지 않는 곳(어두운 객석)에서 보이는 곳(환한 스크린)을 지켜보는 행위다. 관객이 어두운 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보는 건 돈을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관음증적인 시선을 즐기는 것이다. 관객은 이 시선을 통해서 지금 보고 있는 게 스크린이 아니라 마치 실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어떤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몰입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공포영화를 보며 갑자기 튀어나오는 귀신에 놀라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귀신이라는 건 스크린 속 화상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쫓기고 있는 주인공의 시선에 몰입하다보니 실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보는 것처럼 관객 또한 주인공 못지않게 놀라게 되는 것이다.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시점은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잘 만들고 재밌는 영화일수록 관객은 더 몰입하고 빠져들기 마련이다.

관음증이라는 건 몰래 보는 것이다. 관찰자의 시선이 감춰졌기 때문에 대상자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여야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배우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냥 현실에서처럼 행동할 뿐이다. 물론 실제 촬영장에는 카메라가 있지만 이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배제할 뿐이다. 반면 무대에서는 관객들을 바라보고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한다. 일부러 보여지는 것이다. 말 그대로 show와 같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갑자기 뮤지컬 가수처럼 노래를 부르고 스크린이 사건 속의 장면이 아닌 무대로 바뀌는 순간 영화에 대한 몰입은 깨지고 만다. 관음증적인 시선이 해체되고 영화 속 현실은 무대에서 보여지는 쇼로 바뀐다.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하던 주인공이 갑자기 나와 시선을 맞추고 보란 듯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가는 또 갑자기 음악이 사라지고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모드 전환이 반복되다보면 지금 보는 게 현실의 장면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앞의 무대도 아니고 그냥 이도 저도 아닌 느낌만 가득할 뿐이다. 내가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하이브리드, 퓨전, 융합의 시대라고 해도 영화와 뮤지컬의 짬뽕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상류층의 흑인과 하류층의 백인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영화다. 기존의 영화가 주로 상류층의 백인과 하류층 흑인의 이야기들을 다뤄왔던 것과는 좀 다른 설정이다. 엘리트지만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흑인 뮤지션과 맨하튼의 골목세계에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이태리계 비주류 백인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통해 스스로를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말해 설정은 참신한 편이지만 이야기의 경로는 예상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디테일한 시대 묘사, 아름다운 미장센, 차분한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만으로도 두 시간의 런닝타임이 금방 지나가버리는 영화다. 특히 비고 모텐슨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는 스페인에 사는 덴마크계 미국인인데, 작품 속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태리 출신 이민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은 어디로 가고 두둑하게 배가 나온 중년의 아재 외양과 이태리 출신 미국인 특유의 어눌한 영어발음까지. 폭력의 역사나 이스턴 프라미스에서의 진지한 역할은 많이 봤지만 뻔뻔하고 익살스러운 역할까지도 이렇게 잘 소화해낼 줄은 몰랐다.

‘백색 구원자 서사’로 논란이 일기도 했고, 토니(비고 모텐슨)의 비중이 너무 큰 나머지 돈(마허샬리 알리)에 대한 내용은 제3자의 시선 속에 머물고 말았다는 아쉬운 평도 있다. 하지만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이니만큼 자칫하면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적당한 톤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비고 모텐슨의 연기 덕분이었고, 그런 점에서 토니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시켰던 패럴리 감독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어쨌든 아카데미 상을 받은 만큼 완성도도 높고 재미도 있고 메시지도 있는 괜찮은 영화였다. 메시지라고 해서 단순하게 인종차별에 대해서만 생각해볼 영화는 아니다. 백인과 흑인이라는 큰 축의 대칭점 말고도 이성과 감정, 개인과 집단, 위엄과 폭력 등의 여러 대칭점들이 등장한다. 그 속에서 어떤 갈등이 일어나고 그것이 어떻게 봉합되는지,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나름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던 것 같다.

계급론. 나에게는 너무 낯익은 주제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기생충도 설국열차와 마찬가지로 일차원적인 메타포에 가까웠던 것 같다. 기생충에 나오는 아랫동네 반지하 빌라부터 윗동네 대저택까지의 수직적 계층질서는 설국열차에서 봤던 맨 뒤 꼬리칸부터 맨 앞 엔진칸까지의 직선적 도식을 위아래로 세워둔 것과 다를 게 없다. 위쪽에 있는 상류층과 아래쪽에 있는 하층민. 사실 동어반복에 가까운 표현을 메타포라고 하기에는 좀 직접적인 비유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봉테일. 큰 줄기에서의 메타포는 (내 기준에서) 약했지만, 디테일은 역시 볼만 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가족들이 바퀴벌레 농담을 하다가 얼마 뒤에 바퀴벌레와 똑같이 테이블 및 그늘에 숨어들어가던 것처럼, 여러 가지 복선들, 그것과 이어지는 비유적 표현들, 보는 이에 따라서 얼마든지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여러 장치들, 그리고 이 모든 걸 엮어내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력과 정교한 미장센까지. 더할 나위 없는 완성도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황금종려상. 유럽에서 호평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갖춰야 한다. 하나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품의 완성도고, 다른 하나는 인간 이면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주제의식. 여기서 인간의 본성이란 인간이 꾸며내는 가식과 대비될수록 좋다. (과외 장면에서 pretend란 단어가 등장했던 것도 같은 맥락인 것처럼) 그만큼 유럽인들이 갖고 있는 깊은 내면의 죄의식, 자괴감 같은 걸 건들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이성, 문명, 성숙함을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지만, 사실 그들은 본인의 뿌리가 야만족으로부터 기원됐다는 역사적인 열등감 그리고 제국주의, 세계대전, 글로벌 무역구조의 가해자라는 자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가식의 가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일수록 자조적인 때로는 자기반성적인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홍상수의 작품에 열광하는 것처럼) 그런 맥락에서 기생충은 유럽에서 호평을 받기 위한 조건들을 정확히 충족시켰다고 볼 수 있다.

엔딩. 여기에 대해선 여러 반응이 있지만, 나는 답답하게 끝나는 게 좋았다. 클라이막스가 의외로(?) 뜨거웠던 만큼 다시 차가운 엔딩으로 돌아와서 좋았던 것 같다. 갑자기 해피엔딩 비슷하게 끝이 났다거나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메시지 같은 게 있었다면 지금의 뒷맛은 없었을 것이다. 블랙코미디란 장르에 충실했던 것 같다. 한바탕 코믹한 풍자가 벌어져도 마지막엔 다시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 그게 블랙코미디이기 때문이다. 반지하에서 시작해서 저 위의 대저택까지 올라갔지만 다시 반지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 그 현실의 무게감이 그대로 답답하게 남을 수 있도록.

'살인의 추억', '괴물'을 본 후 봉준호 감독을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설국열차'를 보고 개인적으로는 실망을 많이 했다. 표현하자면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까운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메타포와 나레이티브 모두 너무 쉬운 것 같았다. 너무 쉬운 건 좋은 게 아니다. 쉽다는 건 결론적으로 뻔하다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거의 천만에 가까운 관객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봉준호라는 이름값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봉준호는 박찬욱과는 달리 오롯이 한국적 정서가 담긴 작품을 만들 때 더 진가를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설국열차'나 '옥자'보다는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의 봉준호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박찬욱이나 김기덕 같은 이들은 복수, 인륜 같은 보편적 인간성을 주제로 다룰 때 큰 임펙트를 주지만, 봉준호의 능력은 한국의 사회상, 시대상을 디테일하면서도 맛깔나게 풀어가는 데 있다. 때문에 굳이 '설국열차'나 '옥자'처럼 다국화(?)를 시도하면서 본인의 재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사실 인류 보편적 주제를 다뤄야만 해외에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최근의 '로마'나 '그린북' 같은 영화들도 어떤 인류의 보편성을 담은 거창한 작품이 아니다. 일정시기의 멕시코와 미국만의 정서를 각각 담아낸 작품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배경과 분위기를 꼭 경험적으로 알아야만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60년대의 멕시코나 미국을 전혀 겪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영화가 주는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 것처럼. 어떤 배경의 어떤 이야기건 훌륭한 작품은 어느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 수 있다. 영화이건 문학이건 그게 바로 드라마(drama, 극)의 힘이기 때문이다.

다국적인 스탭들과 만국공통의 소재(예를 들면 SF 같은)를 다뤄야만 국제적인 호평을 얻는 건 아니다. 오롯이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에 집중해도 작품성만 확실하면 해외의 반응은 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생충'은 기대가 되는 작품이다. 영화의 내용은 아직 확실하게 모르지만 봉준호가 우리의 이야기로 다시 컴백한 느낌이랄까. 마침 칸에서 작품상도 받았고, (송강호는 원래가 봉의 페르소나이지만) 좋아하는 배우인 이선균과 봉준호의 조합도 기대가 된다. 빨리 보고 싶다.

이 작품에서는 도시(토론토)의 원거리 뷰가 자주 나온다. 계획도시답게 규칙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건물들, 네모반듯하게 촘촘히 박힌 아파트의 유리창들. 질서정연한 모습의 도시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과 같다. 그렇게 거미는 도시를 통제한다. 거미는 이성의 질서를 의미하는 거다.

그런데 욕망이란 건 일정한 통제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어떤 대상이 언제나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굳이 욕망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대상이 (질서와 이성에 의해) 금기시 되는 무엇이라면,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비로소 욕망이란 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작품에서의 두 주인공도 (다른 이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 건 불륜이라는 금기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여자에 대해 탐욕을 느낀다. 그리고 첫 장면에 나오는 고급(?) 스트립바도 마찬가지인데, 매우 절제된 상황 속에서 행해지는 스트립쇼는 지켜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남성들의 성적 쾌감을 최고조로 만든다(‘아가씨’의 낭독회처럼).

따라서 욕망과 질서의 관계는 엘리베이터의 거울과 같다. 양측 벽면에 거울이 달린 엘리베이터를 타서 한쪽 거울을 보면 다른 쪽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이고 다시 그 거울에 비친 내 쪽의 거울이 보이는 식으로 두 면의 상이 무한히 반복되어 쪼개진다. 욕망과 질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작품에서도 아담(질서)이 앤소니(욕망)를 몰아내고 이성적 자아를 회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그 자아 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리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등장한 거미는 아담을 보며 겁을 먹은 듯 잔뜩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거울처럼 욕망과 질서의 정반합이 무한히 반복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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