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방은 간접체험이다. 직접 맛을 보는 게 아니다. 맛 표현을 읽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음식의 짜기나 맵기는 먹방 진행자의 기준에서 평가되고 보는 이들은 진행자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 음식의 맛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표와 기의는 무관한 것처럼 사실 음식의 맛과 진행자의 맛 표현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진행자는 맛있다고 한 음식이 누군가에겐 맛없는 음식일 수도 있고 반대로 진행자는 맛없다고 한 음식이 누군가에겐 맛있는 음식일 수도 있다.

드라마를 요약본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요약이라도 편집자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텍스트를 요약하는 건 ZIP으로 파일을 압축하는 것과 다르다. 선택과 집중은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해진다. 같은 강의를 듣고도 학생마다 강의 노트가 다른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해하지 않고 요약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 드라마, 소설을 요약본으로 보는 건 그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작품에 대한 편집자의 해석을 보는 거다. 먹방처럼 음식을 직접 먹어보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후기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이제스트판이란 말처럼 짧은 시간 마치 소화하듯 작품을 감상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작품을 감상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감상을 감상한 것뿐이다.

지식의 양이 늘어나면서 그리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을 때가 많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무의미한 일들로 가득하다.

제주도행 여객선을 탔다는 이유만으로 익사를 당하고 심지어는 도심의 골목길을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 또 세상에 나오자마자 불치병이나 난치병으로 고통만 받다가 단명하는 아기들도 있다.

종교는 모두에게 말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하지만 불치병에 걸린 아기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아기나 부모 앞에서 천국 같은 내세를 이야기한다고 그게 어떤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종교는 세상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모든 건 신의 섭리에 따라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신의 세상에 무의미한 건 있을 수 없다. 아기가 불치병에 걸린 채 태어난 것조차 신의 뜻이 되어야 한다.

이해할 수 없으니까 믿어버리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심연을 신으로 메워버리는 건 옹색하다. 무책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약한 존재다. 약하기 때문에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대신 회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문제는 설교라는 명목으로 세계관을 강요하는 데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무책임하게 설명하려 한다. 신의 존재라는 동어반복으로. 그리고 아름답기는커녕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강요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고통은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다. 아무리 주의하고 대비한다고 해도 고통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건 고통이 무익함만을 남기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거창하게 니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통은 의외의 기능을 할 때가 많다.

고통은 일상을 환기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일상의 가치를 알 수 없다. 하지만 고통을 겪은 사람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당연하던 게 당연하지 않았던 기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은 사람은 일상에 안도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단조로운 일상이라도 그것이 주는 평온함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코로나를 겪은 후에야 친구들과 모여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당연하던 게 당연하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사람들과의 만남을 새롭게 환기시켰던 것처럼 일상이 단절되었던 기억은 일상을 소중하게 만든다.

그래서 일상을 더 적극적으로 누리려고 한다. 모임을 좋아하지 않던 이들마저도 사적 모임 제한이 풀리자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나려 한다. 고통에 대한 보상심리로 일상을 보다 의미 있게 채우려 하는 것이다. 고통이 삶에 대한 새로운 에너지가 되는 셈이다.

인간이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경험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나이 들기 전에는 절대 젊음의 가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직접 겪기 전엔 깨닫지 못한다.

가정적이지 않던 사람이 암 같은 질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부터는 가족을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단절되었던 기억, 잃어버릴 뻔한 기억만이 일상을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웨이트트레이닝은 근육에 상처를 만드는 작업이다. 손상된 근육이 재생되면서 부피가 증가할 때 근육이 커지기 때문이다. 결국 근육을 커지게 만드는 건 상처다. 상처가 나고 그것이 아무는 과정이 근육을 키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을 키우는 것도 고통이라고 보면 된다. 손상된 근육이 부피를 팽창시키는 것처럼 축적되는 고통의 경험이 삶의 층위를 두텁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삶의 변곡점이 되는 건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순간이다.

지금의 부모세대가 아이를 갖지 않는 건 그들의 어머니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사와 양육은 온전히 여성 개인의 몫이었던 시절, 여성은 가족을 위한 삶을 강요받았고 자식들은 그 수혜자이자 목격자로 엄마의 삶을 지켜봤다. 그리고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여성에게도 주어지는 시대가 오자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된 것이다.

딸들은 엄마에게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다. 엄마를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지만 엄마를 닮고 싶어 하진 않는다. 엄마처럼 바보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남편이나 아이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싶은 거다. 그래서 아예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갖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0점대 출산율을 보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저출산(저출생) 정책은 이런 인식을 바꿀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아이를 낳아도 ‘엄마의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기대를 갖게 해줘야 한다.

제일 중요한 건 육아의 부담을 개인에게만 지우지 않는 거다. 아이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또는 국가가 책임진다는 인식이 생겨야 한다. 그만큼 보육시설이나 비용 지원이 전폭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수당 몇 십 만원 더 쥐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이 사회는 출산율에 명운을 걸었구나 싶을 정도로 지원이 있어야 하는 거다.

저출산의 원인으로 페미니즘을 꼽기도 한다. 출산이나 육아를 등한시하는 페미니즘이 만연한 탓에 출산율이 떨어졌다는 주장이다. 현실을 정반대로 진단하는 것이다. 저출산은 여전히 여성이 육아로부터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에 온 것이다. 여성이 육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출산율은 반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마치 이제야 본연의 삶을 찾으려는 여성들에게 조선시대로 돌아가란 얘기다. 또 이들의 논리로는 유럽의 출산율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한마디로 페미니즘이 과해서 저출산이 온 게 아니라 페미니즘이 약해서 저출산이 온 것이다. 아직도 이 사회에서 아이를 낳으면 엄마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안 낳는 것이다. 반대로 아이를 낳아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굳이 출산이란 본능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세계 유일의 0점대 출산율은 이 사회의 시한부 선고나 다름없다. 지금 상태에서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다. 여성들이 집안일과 육아를 전담하던 과거 사회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여성들의 국가적 지원을 전폭적으로 확대하거나. 결국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딸들이 엄마의 삶을 거부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 거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오로지 선택의 문제이다. 각자 나름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며 사는 것뿐이다.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선택을 인정하고 그대로 존중해주면 되는 거다.

예전에는 적정 나이에 결혼을 하고 늦지 않게 아이를 낳고 사는 걸 ‘표준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여겼다. 따라서 누군가 혼기가 차도록 결혼하지 못하거나 부부에게 아이가 없는 건 일종의 결핍상태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뉴노멀시대가 되었고 라이프스타일에 모범답안은 없어졌다. 비혼주의자가 많아졌고 굳이 비혼이 아니더라도 혼자 사는 사람, 또는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도 많아졌다. 명절에 친척이 모여도 조카에게 장가 안 가냐고 묻는 건 실례가 된 지 오래다.

표준적인 라이프스타일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살려고 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뭐든 다수와 다른 길을 가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는 삶이 다른 삶보다 더 쿨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그건 단순히 기존의 라이프스타일을 거부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들의 삶을 수동적인 삶 또는 흘러가는 삶 정도로 평가절하하는 기저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민의식의 핵심은 ‘삶의 질’이란 건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삶의 질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혼자 책을 읽고 여가를 즐기는 시간이 자녀를 육아하는 시간보다 가치 있는 시간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질이란 노동시간을 법으로 정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던 시절에나 의미를 갖던 말이다.

쿨함의 상징이었던 히피도 먼지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있어 절대적으로 쿨한 가치는 없다. 무엇이 더 쿨한 건지 비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그건 비혼이나 무자녀를 결핍으로 보던 사고방식과 다를 게 없다. 정말 쿨한 건 각자 선택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어떤 합리화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