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는 형식이다. 배려를 위한 형식. 서로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않기 위해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프로토콜인 셈이다.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이 사람을 만날 때는 이렇게 대해야 하고 저 사람을 만날 때는 저렇게 대해야 한다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거다. 특히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을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를 표준화시켜 일정한 프로토콜을 만들어 놓은 다음 그것만 이행하면 어떤 자리 누구에게든 기본적인 배려는 갖춘 것으로 여기도록 약속한 게 바로 예의란 것이다.

예의라는 건 최소한의 범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앞서 말했듯 예의는 최소한의 약속된 프로토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프로토콜에 형식적인 허례허식이 자꾸 덧붙여진다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형식이 늘어날 것이고 결국에는 전반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불필요한 절차만 증가될 것이다. 편하자고 만들어 놓은 게 예의란 건데 오히려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셈이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예의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예의를 프로토콜로 여기는 게 아니고 한 인간의 인격을 표상하는 척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는 어느 정도의 예의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겸손함, 친절함, 자상함의 수준이 정해진다. 그래서 예의를 두고 과잉경쟁이 벌어진다. 최소한만 이행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겉치레들을 가져다붙임으로서 본인이 더 예의가 넘치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예의와 겸손함, 친절함 등은 거의 상관이 없다. 경험적으로만 봐도 그렇다. 주위를 둘러보면 일부 윗사람에게만 극진히 예의를 차리는 반면 다른 이들에게는 개차반 같이 구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히려 능력도 없고 매력도 없는 이들이 예의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오로지 형식만 갖추면 인정받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만 따지면 된다(사실 그 기본적인 예의마저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이상을 기대하면 서로 피곤해질 뿐이다. 예의는 편해지기 위해 만든 것이다. 서로 편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예의를 갖추고 난 그 다음에 있다.

흔히 말해 산업화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노는 법’을 몰랐다. 여가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돈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가장 쉬운 건 술이었다. 비싸지도 않았고, 그럼에도 금세 기분을 좋게 만들어줬다. 또 술친구 몇 명만 있으면 시간 때우기에도 좋았다. 퇴근길에 대포집에 들러 홀짝거리는 술이 하루의 유일한 낙이었고,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으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이른바 잠.일.술 세대. 그래서 그 세대는 계속 술을 마셨다. 즐거우니까 마시고 슬프니까 마시고 놀러왔으니까 마시고 친구들끼리 마시고 명절이라서 마시고 친하니까 마시고 서먹하니까 마시고 더우니까 마시고 추우니까 마시고. 모든 게 술이었다. 빌딩숲이든 어둑한 주택가 골목이든 한 잔 할 수 있는 식당, 술집은 구석구석 어디에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세대는 달랐다. 더 이상 ‘노는 법’을 모르는 세대가 아니었다. 이들은 항상 어떻게 하면 재밌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한다. 퇴근 후에도 쉬는 날에도 늘 할 게 많다. 여행을 가고 운동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쇼핑을 하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요리를 하고 사진을 찍고 게임을 하고. 이들에게 술이 유일한 낙이라는 말은 아버지 입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다. 과거의 세대와 지금의 세대는 삶 속에서 술이란 게 차지하고 있는 비중 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는 직장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나이가 많은 관리자들은 부어라 마시고 2차, 3차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기존의 회식문화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반면 젊은 직원들은 술만 마시는 회식에 금방 염증을 느끼고 피곤해 한다. 왜 회식을 꼭 술을 마시며 해야 하는지도 더 나아가서는 회식 자체가 왜 필요한지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 사회가 유독 술에 대해 관대했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교적 생활양식 하에서 중시되는 건 예의와 체면이었다. 항상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외부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표현을 절제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다수가 모이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어렵고 딱딱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녹이기 위해 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술 덕분에 사람들은 가식의 가면을 내려놓고 조금 더 편하고 솔직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게 된다. 술은 긴장을 이완시키고 경계심을 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수직적 인간관계가 많은 직장에서는 술자리야말로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속사정을 탐색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예의, 체면, 권위 때문에 원래의 ‘나’를 들어낼 수 없었던 이들에게 술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바뀌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절제와 인내가 미덕인 것도 옛말이 되었다. 지금의 세대는 의사표현이 확실하고 자기주장을 거리낌 없이 말한다. 예의와 체면 같은 형식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담백함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들에게 솔직한 소통을 위해 술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술을 좋아하는 꼰대들이 찾는 핑계꺼리로 보일 뿐.

비트코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오르는 고가의 미술품이나 유명한 빈티지의 와인이 아니다. 한정된 채굴량을 가진 가상의 화폐에 투기성 자금이 쏠리면서 일시적으로 가격이 급등하고 있는 것일 뿐. 지금 얻을 수 있는 시세차익은 뒤이어 발을 넣는 신규 투자자들의 자금을 당겨 먹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가격이 떨어지지 않는 건 기대심리로 형성된 거품이 잠시나마 꺼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기 때문. 결국 튤립버블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셈. 이를 알면서도 ‘나는 걸리지 않겠지’하는 막연한 심정으로 폭탄 돌리기에 동참하고 있는 건데, 언제 거품이 꺼지고 폭탄이 터질지는 며느리도 모른다는 사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비트코인이야말로 거품 때문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전후해서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이나 일본 등 주요국들이 집착하기 시작한 게 양적완화인데, 이는 간단히 말해 통화량을 증가시킴에 따라 일어나는 버블경제로 불황을 메워버리는 방법이다. 문제는 그 버블이 커질수록 달러나 엔화 등 주요국의 불환화폐의 가치는 하락한다는 점에 있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증쇄가 불가능한 비트코인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결국 거품이 싫어서 만들어졌는데 거품을 일으키고 있는 셈. 비트코인의 가치는 스스로 버블을 키우면서 자멸의 길을 걷고 있는 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 하나의 환기적인 시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블록체인 같은 개념은 나 같은 문돌이에게는 아직 어려운 분야라 스킵.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무심코 유리벽을 보다가 한쪽에 붙어 있는 안내문을 발견했다. 꽤 큰 종이 사이즈에 굵은 글씨로 뭔가가 열심히 적혀져 있길래 찬찬히 읽어보니 최저임금이 인상됨에 따라 경비원으로 하여금 대폭 늘어난 무급 휴게시간을 갖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임금조정이 불가피해짐에 따라 기존의 임금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꼼수를 부린 셈이다.

어쩌면 일부 사람들이 우려했던 대로 최저임금 인상은 우리 사회에서 시기상조였을지도 모른다. 소득수준이 아니라 의식 수준의 차원에서 말이다. 당장 자신이 받는 급여가 오르는 건 쌍수 들어 반기면서도 본인이 지불해야 할 임금이 오르는 건 용납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 회색빛 아파트만큼이나 메마른 감수성을 가진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눈앞에 보이는 당장의 몇 푼뿐이다. 집주인 혹은 입주자란 갑들이 싸구려 근성을 앞세워 한 푼 두 푼에 집요함을 보일 때마다 결국 그만큼의 대가는 고스란히 경비원 같은 을들의 몫으로 치러져야 한다는 게 갑갑한 현실.

경제적인 여유를 가진 이들이 그만큼의 내적인 여유를 갖지 못한 탓이고, 그 두 여유 사이의 간극만큼 이 사회의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있는 것.

"동시대의 한국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외국 문학을 읽을 때와는 조금 다른, 기실 어떤 영혼의 돈독한 교류랄지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모국의 소설이라는 것은 당연히 모국어로 쓰인 이야기이므로,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 동시대의 배경과 인물, 사건이 흥미로이 펼쳐지는 또 한 세계를 맞닥뜨려 공유하는 일은 경이롭습니다. 이를테면 이것은 단순히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 소설가와 나누는 어떤 다감하고도 농밀한 대화, 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적 배경을 공유하며 내가 보았음 직한, 겪었음 직한 인물과 사건들을 소설가는 이야기하니까요."

염승숙 작가가 말한대로 모국의 문학이 아닌 외국의 문학을 이해할 때 생기는 문제는 단지 언어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개별의 작품이 그리고 있는 배경을 접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비롯되는 문제가, 다시 말해 그 맥락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훨씬 크다. 가령 내가 프랑스 소설을 읽을 때는 일차적으로 불어가 국어로 번역되면서 소실되는 가치들이 있을 것이고, 또한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 그 프랑스의 세계를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반감되는 가치들이 있을 것이다. '미생'이란 만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감상들을 외국 사람들도 똑같이 느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것처럼, 나 또한 쿤데라가 묘사하고 있는 수십 년 전 체코의 분위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시간에 모든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건 신밖에 없다. 고로 신 같은 존재가 나타나서 세상의 모든 작품들을 모국의 작품으로 읽고 그것을 평가하고 줄을 세우지 않는 이상, 물론 신이 어떤 작품을 두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 생각에 동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각 국의 문학 작품을 비교하고 서열화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영미나 서구의 언어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언어를 갖고 있는 우리한테 그 한계는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고로, "우리끼리 문학을 즐기면 되지, 상을 받고 말고가 뭐가 중요하냐. 문학이 올림픽도 아닌데."라고 말한 유시민의 말은 꼭 새겨들어야 할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