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에는 순환구조라는 게 있다. 소비와 투자가 늘면 고용과 생산이 늘고 다시 소비와 투자를 촉진시키는 선순환의 고리가 있고, 소비가 줄면 투자도 줄고 고용과 생산도 줄면서 다시 소비를 저해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있다. 말 그대로 전자는 순환할수록 남는 게 생기는 호황을 말하는 것이고, 후자는 순환할수록 잃어가기만 하는 불황을 의미한다.

사람의 관계에도 똑같은 순환구조가 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소통과 상호작용이 오갈수록 신뢰가 쌓이고 친밀해지는 관계가 있고, 반대로 상호작용을 거듭할수록 불신과 불만이 쌓이는 관계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전자를 선순환의 관계, 후자를 악순환의 관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서로를 신뢰하고 아끼는 사람들은 선순환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심리적으로 서로 내가 주는 것보다 상대에게 받는 게 더 많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장 내가 주는 게 더 많아도, 그러니까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전혀 서운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크게 보면 내가 받아왔던 게 더 많기 때문에 당장의 손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서로 더 잘할 수밖에 없고 상호간의 신뢰는 더 돈독해질 수밖에 없다. 관계의 선순환 고리가 생기는 것이다.

반대로 심리적으로 서로 내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많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악순환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호작용이 있을수록 내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에 대한 불신과 원망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 내가 손해를 본 게 아니어도 관계없다.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는 심리적 상태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의 관계에 한번 빠지기 시작하면 어떤 큰 계기가 있지 않는 이상 회복하기가 힘들다.

사람이 만났을 때 선순환의 관계를 가질 것인지 악순환의 관계에 놓일 것인지는 랜덤박스와 같다. 직접 상호작용을 하고 관계를 갖지 않는 이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 제 짝이 있다는 말처럼 누구와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도 또 누군가와는 무리 없이 지내기도 한다.

하지만 각각의 개인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선순환이나 악순환의 관계를 가질 확률이 50대 50인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선순환의 관계를 가질 확률이 훨씬 높은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악순환의 관계를 가질 확률이 높기도 하다. 예를 들어, 누구에게나 수더분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든 선순환의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에 갇혀있는 사람은 아무리 무난한 사람을 만나더라도 자칫 악순환의 관계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후자의 사람들인데, 이들은 실제로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악순환의 관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앞에서 말한 악순환이란 개념처럼 항상 다른 이들로부터 피해를 입고 손해를 입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항상 타인에 의해 고통 받아야 하는지’ 비루한 자기 연민에만 빠질 뿐, 정작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둔하고 무감각한 자세를 취한다.

중요한 건 선순환으로의 지향이다. 내가 상대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일단은 상대가 바라는 대로 기대하는 대로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은 그 노력이 상대에게도 느껴지고 상대(정상적인 범주의 사람이라면) 또한 마찬가지의 자세를 가지려 할 것이다. 그렇게 선순환의 고리가 한 바퀴라도 굴러가면 그 후는 전혀 걱정할 게 없다. 관성이라는 불변의 법칙이 알아서 순환을 지속시켜주기 때문이다.

비판적 시각이라는 건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왜 이렇게 되는 거지? 이게 맞는 건가?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에 의문을 던지고, 같은 대상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 밀즈는 이런 능력을 ‘사회학적 상상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한국 사회는 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하에 근대화란 일념 하나로 뭉쳐있던 사회에서 비판론, 회의론 같은 건 불필요한 걸림돌에 불과했다. 방향과 목표를 콕 집어서 한시라도 빠르게 달려가야 하는 판국에 갑자기 멈춰 서서 ‘이 방향이 맞나?’, ‘다른 방향은 없을까?’ 고민한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건 거룩한 민족적 대업을 방해하는 일에 불과했다. 사회는 이런 이들을 빨갱이, 간첩(혹은 좌파)이라 부르며 중심으로부터 점점 몰아냈다.

그로부터 많은 과정과 시간이 지났지만, 비판이나 회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내재되어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화되고 대물림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선생님은 물론 주변 친구들마저 그런 학생을 이상하게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직장 회의시간에서도 이견을 내길 주저하고, 동료들과 점심 메뉴를 정할 때도 눈치 때문에 메뉴를 통일할 때가 많다. 우리에겐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왜냐면, 모두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 같은 외부의 시선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전히 외국인들은 한국사회가 집단주의적이고 획일화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한국사회는 너무 개인화, 원자화 되어가고 있다고. 그래서 무관심, 이기심만이 팽배하고 있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한국사회는 더 개인화되고 더 원자화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개인의 비판적 의식이 자라날 수 있다. 한국사회는 서구로부터 민주주의, 공화주의라는 절차적 형식들만을 도입했을 뿐이다. 아직 그 형식을 채우고 있는 내용은 영글지 못한 상태다. 아직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이 잔존해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한국사회가 비판론, 회의론이란 말을 부정론, 비관론이란 말과 동일어로 생각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관론자의 결론은 자살이다. 무엇이든 비관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면 뒤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결국 사라지는 것, 자살뿐이다. 하지만 회의론자의 결론은 자살이 아니다. 회의론이라는 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가 없다.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회의한다는 건 의심하는 것이다. ‘진짜’를 찾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사회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비판을 하고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건 사회를 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더 나은 선택, 더 좋은 방향을 찾기 위해 고민을 하는 것뿐이다.

과거에는 매스컴이 정보를 독점하고 있었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이란 사전적 의미 그대로 대중은 매스컴을 통해 정보를 얻었다. 언론사라는 개념을 단순한 ‘기업’의 개념보다는 하나의 ‘기관’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어느 정도의 공적인 책임성, 신뢰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사마다 데스크를 두고 뉴스를 자체 검증하는 것도 보도의 책임과 신뢰를 높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미디어의 양상이 많이 바뀌었다. 정보를 전달하는 건 언론사 같은 소수의 매스컴만이 아니다. 개인들도 대중을 상대로 정보를 만들고 전달하는 게 용이해졌다. 유튜브처럼 개인이 다수에게 콘텐츠를 전달할 수 있는 효과적인 플랫폼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인플루언서’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이제는 1인 미디어도 대중을 상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도 만만치 않다. 1인 미디어에게는 언론사처럼 정보를 자체검증하는 시스템이 없다. 아무런 견제장치 없이 생산자의 의도에 따라 편집되고 만들어질 뿐이다. 그만큼 무분별한 콘텐츠가 양산되고 저질 정보가 범람하고 있다. 더 심각한 건 질적 수준을 넘어서 가짜 정보까지 난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한 의도를 갖고 사실이 아닌 정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일종의 사기행위에 가깝다. 선거 때마다 기승을 부리는 가짜뉴스들처럼 말이다.

실제로는 터무니없는 주장과 논증을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구성해서 거짓 정보를 만드는 것이다. 정말 짧은 시간만 투자해도 사실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전달되는 정보의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튜브를 애용하는 노년층이 콘텐츠 제작자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는 자세다. 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게 아니고 자기 나름의 기준에 따라 검증을 하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요즘처럼 온갖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비판적 의식이 없는 사람은 마치 사이비 교주에게 눈물을 흘리며 모든 걸 갖다 바치는 신도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비판적 의식이 부재하면 주체성을 잃게 된다. 누군가의 목적에 따라 세뇌당하고 이용당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오랜 시간 집단주의, 일체주의적 생활양식을 양위해왔다. 때문에 ‘비판적’인 사람은 곧 ‘비관적’ 혹은 ‘부정적’인 사람으로 연상되는 인식이 있었다. 단일의 사상, 일체된 사고가 중요시 됐던 시대의 단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사회는 개인화, 다원화되었다. 본래 민주사회란 건 개인의 가치판단이 중요한 사회다. 그만큼 개인의 올바른 사고, 비판적 의식은 필수적인 덕목이다. 비판의 영역이 클수록 사회는 그만큼의 발전의 여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각종 지표를 살펴보면 한국 대졸여성의 경제활동 비율이나 고용률은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인 걸 알 수 있다. 고용되어 있다 하더라도 남성에 비해 비정규직 종사 비율이 훨씬 높은 편이다. 여성이 양질의 일자리를 갖는 비율은 더욱 낮은 수준인 것이다. 여성을 가사와 육아에 묶어두었던 가부장적 인식도 과거에 비해서는 많이 바뀌었다. 경제수준도 높아졌고, 가족 구성도 핵가족화되었다. 무엇보다 여성 고용안정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 장치들도 많이 마련된 상황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 여성의 경력단절은 좀처럼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원인은 아마 한국 부모들의 유별난 자녀 교육열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경력단절은 일반적인 인식처럼 사회적 여건이나 환경에 따라 강요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한국 여성의 경력단절은 자발적인 측면이 강요되는 측면 못지 않게 강한 편이다.

국가적으로 경제활동인구의 육아부담을 덜어주는 각종 제도들이나 사회서비스의 질적 수준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경제수준, 어떤 사회제도를 채택하고 있느냐에 따라 나라별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나라에서는 아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게 비교적 수월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나라에서는 비교적 힘든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나라에서건 개인이 갖는 육아에 대한 부담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북유럽국가라고 해서 육아휴직을 5년, 10년 마음껏 펑펑 쓸 수 있는 제도가 있는 건 아닌 것처럼.

보통 출산 직후에는 어느 정도의 휴직을 하고, 보모나 유치원을 통해 경제활동과 육아를 병행하고, 자녀가 입학할 나이가 되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육아에 대한 부담은 점점 덜해지는 단계로 접어드는, 만국공통의 육아 루틴이 존재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전반적으로는 어느 나라나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한국 부모들은 조금 다른 과정을 밟는다. 자녀가 입학을 하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자녀에 대해 덜 신경 쓰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신경을 쓴다. 단순하게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자녀의 교육에 대해 사사건건 직접 관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나라 부모건 (제대로 된 부모라면) 자녀의 교육에 신경 쓰지 않는 부모는 없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조금 특별하다.

자녀가 또래에 비해 뒤처지지 않고 좋은 성적을 내도록 어렸을 적부터 온갖 사교육을 시키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사교육을 어떤 시기에 받는 게 좋으며 입시를 위해 어떤 스펙들을 갖춰야 하는지 끊임없이 정보를 탐색한다. 심지어는 유아기에 휴직을 하는 게 아니고 입학 후에 휴직을 하는 경우도 많다. 자녀 때문이 아니라 부모 자신 때문이다. 부모가 같은 학부모 커뮤니티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휴직을 하는 것이다. 또 자녀가 입시를 앞둔 시점에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자녀의 입시경쟁에 같이 올인하는 경우도 상당수다.

그리고 휴직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는 쪽은 역시 대부분 아빠가 아니라 엄마다. 아이 뒷바라지는 엄마가 해야 한다는 전통적 관념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 엄마보다 아빠의 수입이나 직업 커리어가 상대적으로 나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구조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의 고용상황이 더 나은 여건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부모세대가 그 윗세대, 그러니까 부모의 부모세대를 보며 안타까워했던 건,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당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묵묵히 돈을 벌어오고 어머니는 그 돈을 아껴서 자식을 뒷바라지하는 전형적인 부모의 모습. 아이러니한 건 그 부모의 모습을 보며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지금의 부모세대 또한 윗세대와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윗세대처럼 허리가 굽어지도록 시골에서 고생하며 자식을 뒷바라지하는 건 아니다. 지금의 엄마들은 깔끔하고 쾌적한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기며 다른 아이 엄마들과 함께 우아한 시간을 보낸다. 겉으로는 윗세대와 다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본질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부모 자신의 삶은 없다. 생활의 대부분은 오로지 자녀 양육, 교육에 관한 관심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마치 스카이캐슬의 엄마들처럼.

물론 이런 문제들을 오로지 개인의 차원으로만 환원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의 역할, 사교육 문제 등은 무엇보다 의식의 전환이 중요하다. 아무리 획기적인 방안들을 내놓아도 개인의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문제다. 정답 같은 건 없겠지만, 이 사회의 부모라면 자녀교육에 대한 정도나 방향 모두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국내의 페미니즘이 건드려야 할 부분도 바로 이 부분이다. 여성의 경력단절, 노동시장에서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교육열에 대한 고민부터 시작해야 한다. 경제활동으로부터 여성을 계속 밀어내는 건 전통적인 가부장적 인식 때문만이 아니다. 계속 말했듯 교육열 또한 그 못지않은 요인 중 하나다. 아직까지는 국내의 페미니즘 연구란 것이 사실 서구의 그것을 그대로 차용한 수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교육열이라는 한국의 특수한 부분은 간과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바로 이 교육열, 자녀교육 문제야말로 여성의 경력단절, 고용불평등에 있어 가장 먼저 고민해보고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제국주의국가가 식민지를 지배하면 가장 먼저 하는 건 원주민들에게 패배의식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도전은 언제나 패배로 귀결되고 만다는 일종의 관념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이 작업이 성공하면 식민지배는 수월해진다. 원주민들의 머릿속에 뿌리 내린 부정적인 패배의식이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서운 건 패배의식, 무기력에 사로잡힌 이들은 절대 저항의식을 가질 수가 없다는 점이다. 마치 말뚝에 묶인 채 성장한 코끼리가 거대한 크기의 성체가 되어서도 그 말뚝을 뽑을 엄두조차 못내는 것처럼.

일제도 조선을 삼키고 먼저 했던 일이 조선인들에게 패배의식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조선인은 게으르고 감정적이며 안이하고 분열되기 쉬운 민족성을 가진 반면 일본인은 근면하고 이성적이며 치밀하고 결속력이 강한 민족성을 가졌다는 인식은 바로 그때 퍼지기 시작했다. 조선은 당파정치에만 매몰되어 자력으로 근대화를 일으킬 여력이 없었다는 식민사관 역시 이런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서운 건 이런 인식이 여전히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은 차분하고 계산이 빠르고 예의 바른 반면, 한국인은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민족성을 갖고 있다는 점, 또는 일본산 제품과 한국산 제품 사이에는 여전히 넘사벽이 존재한다는 점 등등.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관념들이 경험적인 추론만으로 형성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상당한 부분은 일제 이후 만들어져 내려온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인식들이 지금까지도 무분별하게 답습되고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일본은 거대한 나라다. 대부분 경제력을 기준으로 일본의 비교우위를 이야기하지만, 사실 일본이 한국을 앞서고 있는 건 경제력만이 아니다. 우리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겪을 수 있었던 의식 수준의 변혁, 진보의 과정을 훨씬 일찍부터 밟아온 게 일본의 역사다. 한국이 패스트푸드라면 일본은 슬로푸드 혹은 숙성요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나라의 갭은 크다. 정치, 사회, 인문학, 철학, 기초과학 등 어떤 분야든 인용할 연구를 찾기 위해 굳이 영미나 유럽 같은 먼 곳을 뒤질 필요가 없다. 바로 옆 일본만 하더라도 우리가 인용해야 할 연구나 이론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다만 여전히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는 없다. 학교에서 일진들이 괴롭히는 학생은 대충 정해져 있다. 일진이라고 해서 아무나 건드리고 다니는 건 아니다. 싫다는 의사표현이 확실한 애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대신 아무리 괴롭혀도 도전할 생각도 없이 가만히 있는 애들만 괴롭힌다. 국가 간 관계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어떻게 보면 개인 간의 관계보다 국가 간의 관계가 더 원초적이다. 말 그대로 자연법의 상태에 놓여있다. 개인들 사이에는 국가라는 존재가 있지만 국가들 사이에는 국가를 뛰어넘는 초국가적인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시비를 걸어오면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하는 게 맞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체념하는 태도는 국제무대에서 전혀 도움 될 게 없다. 누군가 나를 때리면 나도 맞기를 각오하고 때려야 한다. 그래야 내가 존중받을 수 있다. 그게 자연법의 룰이다. 불매운동은 분노의 자위행위가 아니다. 필요한 반작용이다. 효과가 미미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뭐든 대응을 하는 것, 그게 곧 자신을 지키는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일본과의 갈등상황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일본의 궁극적 목표는 전범국가의 오명에서 벗어나 군대를 보유하고 군사대국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속도가 문제였을 뿐, 일본과 다른 동북아국가들과의 갈등상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올 게 온 것뿐이다. 재무장, 우경화를 외교적 해결로 좋게 좋게 풀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외교라는 건 때로 강경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그래야 더 얻는 게 많을 수도 있다. 당장의 손해에 급급하다보면 더 큰 의미를 보지 못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