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빙 고프만은 삶을 무대와 백스테이지로 구분한다. 무대가 남들에게 보여지는 사회적 공간이라면, 백스테이지는 무대에서의 시간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개인적 공간이다.
SNS에 포착되는 건 주로 무대 위에서의 모습들이다. 이왕 보여지는 거 일상에서 먹는 라면 사진보다 유명한 식당에서 먹는 요리 사진을 올리는 건 자연스런 습성이니까. 가슴을 부풀려 몸을 크게 보이게끔 애쓰는 비둘기처럼 모든 동물들이 갖고 있는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은 백스테이지에서 보내는 시간들로 이루어진다.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집을 정리하거나 널부러져 쉬고 있는 때처럼 삶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들이다. 매 끼 외식을 할 순 없고 매일 여행을 갈 순 없다. SNS에 게시되는 건 여행지에서의 한 컷뿐이지만 그 순간을 위해서는 긴 시간 반복되는 일상들을 견뎌야 한다.
이런 시간들은 SNS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착각하기 쉽다. SNS에 노출된 순간들을 누군가의 전체 삶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이면에 감춰진 백스테이지를 인식할 만한 능력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과정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꾸준히 노력해서 성취하고, 때로는 좌절하지만 그것을 견디는 과정들이 아이의 자아를 만들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무대가 아니라 백스테이지이다. 전시의 공간이 아니라 성장의 공간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대만을 보도록, 무대에서 전시되도록 놔두어선 안 된다
과거에는 아이들도 어른 옆에서 흡연을 했다. 흡연이 유해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원래 새로운 게 나타나면 그것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부작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최소화시켜서 자리 잡게 만드는 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에 대한 SNS 사용을 처음 제한하기 시작한 곳이 공교롭게도 그 SNS를 탄생시킨 캘리포니아 지역이란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SNS에 대한 규제가 후지거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니란 뜻이기도 하다. 자녀의 인터넷 사용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세대는 인터넷을 접하며 자라온 세대다. 신기술에 대한 무지로 선입견부터 갖던 이전 세대와는 다른 세대인 것이다. 이들은 SNS의 이면성이나 알고리즘이 얼마나 무서운 시스템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SNS 기업들이 자신들로부터 빼앗아간 것들을 자녀들로부터는 보호하고 싶은 것이다.
선수를 평가하는 데에는 여러 기준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건 선수의 시장가치를 따지는 것이다. 시장가치 외에도 고려해야 할 기준들이 많지만, 프로의 세계에서 선수의 몸값만큼 적나라하면서도 객관적인 수치를 갖춘 데이터는 없다.
이번 월드컵에 출전했던 국가들을 선수들의 시장가치로 줄세운다면 우리나라는 33위에 해당된다. 공교롭게도 우리나라의 월드컵 최종 순위는 34위다. 손흥민, 김민재, 이강인이 포함된 스쿼드로 왜 32강도 진출하지 못했냐는 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팀에는 그만한 선수들이 훨씬 많은 게 현실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월드컵 성적을 실패로 단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던 히딩크의 기적을 목도했던 탓도 있었을 테고, 평소엔 관심 없다가도 4년마다 돌아오는 스포츠 이벤트에는 일단 이기길 바라는 오래된 습관 같은 것도 있었을 테다. 어쨌든 기대했던 결과에 미치지 못했으니까 실패라고 한다. 그 기대가 얼마나 현실적이었는지는 되뇌어보지 않고.
그리고 이 집단적 실망감은 점차 마녀사냥으로 변질되고 있다. 감독 선임 과정에 대한 의혹이 처음 제기되었던 건 2년 전이다. 그때도 수사기관이 개입했었지만 이슈에 비해 수사가 진행되었던 건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 수사가 새롭게 재개되었다는 점은 함의하는 바가 있다.
우선, 월드컵 성적이 좋았다면 이 수사는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수사는 철저히 여론에 추동된 것이라는 뜻이고, 그 여론은 누군가를 벌함으로써 이 집단적 실망감 혹은 사회적 분노를 해소하고자 하는 감정상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희생양을 찾으려는 심리다.
홍명보의 무능이 32강 탈락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정몽규만 탓할 수도 없고 축구협회만 탓할 수도 없다. 사실 근본적인 원인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언급되고 있는 논제들이기 때문이다. 엘리트 중심의 협소한 스포츠 기반, 성적 위주의 유소년 시스템, 장기적인 철학의 부재, 소수 해외파에 대한 높은 의존도 등등.
개인을 원망하는 건 쉬운 일이다. 원인이 뭔지 고민하는 것보다 개인을 색출하는 게 훨씬 간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임자를 지목해서 벌을 주면 뭔가 일단락되었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감정적인 찝찝함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정리되지 않은 채 뭔가 남아있는 걸 조금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인을 벌하는 건 문제 해결이 아니라 감정의 해소일 뿐이다. 홍명보를 털어서 벌을 주고 연봉을 회수하는 게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순 없다. 오히려 능력 있는 이들마저 감독직을 고사하는 악순환만 초래할 것이다. 정의 실현을 가장한 분풀이로 인해 남게 되는 건 감정적 엔트로피의 증가뿐이다. 쉬운 선택, 편한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정치에 무지했던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건 소위 진보 기득권에 대한 대중의 환멸 때문이었고, 음주운전 전과가 있는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 건 일이라도 제대로 하길 바라는 대중의 체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사실을 정치인들은 알지 못한다. 자당의 후보자가 당선이 된 이유를 자신들에게서 찾는다. 차악을 뽑아놨더니 최선이어서 뽑힌 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착각은 집토끼에 대한 집착이라는 엉뚱한 결과를 낳는다.
최소한 집권 정당이라면 특정 지지층만을 보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봐야 한다. 국정 운영이라는 건 집토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이들까지 아울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외연 확장을 배신의 일종으로 여기는 건 집권 정당으로서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이다. 집토끼만 간수하겠다는 건 사회 전체를 조정하기보다 핵심 지지층만을 대표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다음 선거도 이길 수 있을 거라 착각하고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집토끼 간수는 신념의 정치와는 다르다. 팬덤에 둘러싸인 자리보전 행위를 신념으로 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신념은 노무현이 부산에 출마했을 때처럼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했을 때 쓰일 수 있는 말이다.
재건축이든 증축이든 일반 사람들 입장에선 관심 없는 얘기다. 방법이야 어떻든 건물만 튼튼하게 지어지면 그만이니까. 입주자의 동의도 없이 재건축을 한다고 비판하는 것도 결국 기존 건물에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다는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생각일 뿐이다.
이렇게 긴 과업(?)을 시작한 건 처음이다. 회사에서 하는 일도 길어야 몇 개월이면 한 사이클이 끝나고, 수험생활도 몇 년 정도 걸렸을 뿐이고, 그나마 길다고 할 수 있는 대입 입시도 최대로 잡아 초중고 도합 12년 정도 걸렸다. 물론 12년이란 기간은 짧다고 할 수 없지만, 갓난아기를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에 비하면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기대수명이 대략 80세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내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에 따라 한 세기에 달하는 아이의 일생이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책에서나 봤던 시간 단위, 심지어는 내가 죽은 뒤에도 긴 시간 지속될 뭔가를 나는 막 시작한 셈이다. 물론 사람은 성장할수록 부모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듯 내 아이도 언젠가는 성인이 되고 언젠가는 독립을 하고 언젠가는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려갈 것이다. 하지만 인생 초반의 경험과 기억들이 그의 가치관, 성격, 취향 등 나머지 인생에 있을 거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한 건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에서 땅이 꺼지고 해일이 몰려오는데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멘붕이 와서 멈춰 있는 사람처럼,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얼마나 큰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멍하니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이 아이를 부족함이 없이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도, 좀만 더 생각을 해보면 나부터가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인데 이런 내가 부족함 없이 아이를 키운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은 회의가 몰려오기도 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십수 년 교육을 받았지만 그 비슷한 것도 배운 적이 없다. 내가 어렸을 적 부모님을 보고 배웠던 것들이나 책, 인터넷 등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통해 좋은 아빠라는 막연한 이미지들을 그려볼 뿐이다. 때로는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엄격하게 키우느냐 혹은 자유분방하게 키우느냐 하는 고민처럼, 정답 없는 답을 계속 탐색해 나가야 하는 거다.
애가 애를 키운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진 어른이 아이를 키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직 나조차도 혼란스러운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은데 그런 내 앞에 문득 제 배고픔 하나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편의점에서 술을 사도 누구 하나 미성년자로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내가 어른이 됐다고 자각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차려보니 난 아빠가 되어버린 거다.
어떤 부모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준비된 부모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른이라고 해서 늘 확신에 차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닌 척하지만 스스로의 불완전함, 혼란, 불안 같은 문제 해결을 아이 때문에 일단 유예하는 것뿐이다. 아이 앞에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삶의 다음 스텝을 밟는 거의 모든 일이 그런 것 같다. 대학생활도 회사생활도 결혼생활도 처음엔 실감나지 않은 상태로 시작했던 것처럼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렇게 시작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분명 다른 차원의 일이긴 하다. 그만큼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지 얼마나 힘든 구간을 얼마나 자주 지나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물론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 각자의 고충과 고민이 있겠지만, 그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준비가 되었는지 의심하기보다 아이와 함께 큰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다음 스텝을 밟는 모든 일이 그렇듯 일단 해봐야 한다. 당장 확신이 없다면 어른인 척이라도 해서. 그러다 보면 아빠로서의 역할이 그나마 편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도 이 사회는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인종차별에도 둔감하다. 조지 플로이드 같은 사건을 보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동남아인이나 중국인에게는 원색적인 차별을 서슴지 않는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문호 개방에 소극적이었던 시간이 길었던 반면 권위주의적 지배 체제는 오랜 시간 유지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분단의 경험도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튀는 언행을 보이면 빨갱이나 반동분자로 몰렸다. 같음과 다름은 이곳에서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물론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세상은 분명 변했다. 이제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 시대다. 하지만 같음에 대한 집착만은 여전하다. 권위주의나 집단주의는 옅어졌지만 한병철의 지적대로 SNS 등에 의한 과잉소통, 과잉정보가 자발적으로 같음을 추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그리는 행복이나 성공의 이미지는 전부 비슷하다. 오마카세 음식 사진이나 호텔방 셀카가 행복을 표상하는 이미지가 되었고,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업해서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의 기준처럼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와 최대한 비슷해지기 위해 소비를 하고 공부하고 취업에 매진한다. 이렇게 비슷비슷한 소비 취향 또는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비주류로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 하나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겉으로 봤을 땐 개인주의가 강화된 것 같지만 되레 삶의 기준은 획일화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만 쪼개졌을 뿐 각각의 알멩이들은 사실 따분할 정도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다르게 개인주의가 다양성이나 개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과거 사회와 비교해 봤을 때 기존의 억압이나 규율에서 벗어난 건 맞지만 그럼으로써 우리가 진정 자유로워졌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름을 그 자체로 수용하지 못하고 우열이나 선악의 잣대로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획일성의 지옥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경직된 세상에서 다름은 곧 고통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처럼.
'헬조선'이란 말이 이 사회를 자각하는 일반적인 비유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조소와 냉소가 가득하다. 부조리를 맞딱드리기보다 피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대하는 대신 비웃고 마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니라 관전자처럼.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 상황이 달라진다. 비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동안은 비웃음으로써 피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내 아이는 그럴 수 없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내 아이도 홀로 부조리의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비웃음보다는 식은땀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내 아이마저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마당에 언제까지 관전자로서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야구장에서는 이종범이 이정후가 야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은 야구장이 아니다. 이곳은 현실이다. 지옥으로 비유되는 부조리의 세상인 것이다.
더 이상 비웃을 수 없다면 맞딱드려야 한다. 부조리를 없애야 한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내 아이를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할 수 있는 건 길어야 십수 년뿐이다. 그 사이 세상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부조리를 없애는 건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부모는 세월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나무를 심는 일 따위는 이들에게 전혀 의미 없는 일이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를 위해 부조리를 없애기보다 부조리에 편승하는 쪽을 주로 택한다. 플레이어가 될 아이에게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기보다 반칙을 가르쳐주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너도 나도 다른 부모들 역시 반칙을 전수하고 있는 와중에 내 아이만 정직하게 세상에 밀어넣을 수는 없다.
헬조선은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부조리를 비웃는 관전자, 부조리를 답습하는 부모, 부조리를 배워가는 아이. 그렇게 관전자는 부모가 되고 부모는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다시 관전자가 되는 것이다. 탈조선을 입에 달고 살지만 사실 이 사회를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헬조선을 탈출하는 길은 이 부조리의 굴레를 멈추는 방법밖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