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킬로그램의 하중을 견디게 설계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학교나 강당은 하중을 훨씬 높게 설계하고, 같은 층이라도 푸드코트는 사람들 앉는 데랑 무거운 주방기구 놓는 데랑 하중을 달리 설계해야 되고,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내 인생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대사 중 하나. 사실 건물과 사람은 같을 수 없다. 건물은 안과 밖을 나누는 단단한 벽이 존재하지만, 사람에게는 그런 게 있을 수 없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시간, 환경, 사람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자기 밖에 있는 모든 것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내력이 건물의 외벽처럼 바깥의 경계에 있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내력은 자기 자신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마치 자두나 복숭아처럼 말랑말랑한 껍질과 과육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중심에는 단단한 씨앗을 품고 있듯이.

튼튼한 구조를 갖고 있는 건물은 어떤 외력에도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자기 중심이 확고한 사람 또한 어떠한 외부의 영향에도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중심을 세우지 못한 사람일수록 약한 충격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연예인이라도 유독 악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있다. 사실 악플이란 게 그만한 가치나 의미가 있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분노와 좌절 속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은 삶에 대해 주체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가 없다. 항상 타인의 시선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기만족에만 충실한 것도 답이 될 수는 없다. 일단 혼자 사는 삶이 아닌 이상 기본적인 자기객관화는 필수적이다. 제 아무리 행복을 위한 각자만의 방식이 있다고 한들, 환각에 히죽거리는 마약중독자를 보며 진정한 행복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또 아무리 자기만족이 전부라 하더라도 지속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현실적 요건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를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만족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타인에 의해 구성된 욕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싼 외제차나 명품가방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시적 소비를 하고 있다는 시각에 대해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자기만족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소비에서 순수한 자기만족을 찾는 건 쉽지 않다. 일단 명품을 원하게 된 이유 자체가 상품이 갖고 있는 고유의 특성보다는 그것을 소비함으로써 얻게 되는 우월감, 과시욕에 있기 때문이다. 유행이란 것도 마찬가지인데, 소비사회는 개인이 순수한 만족을 느끼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계속적으로 유행을 만들고 소진시키는 걸 반복하면서 개인이 계속해서 새로운 (사실 반복일 뿐인) 욕망을 갖도록 만든다. (법정스님이 중심에 살수록 새롭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건 전공이나 직업 선택, 라이프 스타일, SNS 활동 등 삶의 모든 게 마찬가지다.

결국 내가 아닌, 타인들의 세계를 좇는 건 껍데기만 따라다니는 공허한 일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이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타인과 외부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자기만의 것을 만들고 다져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이런 과정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관조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직업정신이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직업정신이란 회사 화장실 소변기 위에 붙어 있는 "지금 하는 일에 목숨을 걸 수 있다면 프로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마추어다." 따위의 문구에서 말하는 프로의식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이 말을 남긴 히딩크처럼 특정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와 위치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갖고 있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같은 택시기사여도 승객이 멀미를 하든 말든 급제동과 급가속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승객이 편안하도록 배려하고 부드럽게 운전하는 사람도 있다. 또 같은 식당 주인이어도 나쁜 식재료로 대충 요리해서 파는 데 급급한 사람이 있는 반면 싱싱한 식재료로 정성들여 요리해서 음식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월급쟁이도 마찬가지다. 만사 귀찮은 듯이 아랫사람을 부리기만 하면서 일을 떠넘기고 때우기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본인에게 떨어진 임무는 어떻게 해서든 완벽하게 완수해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마르크스의 말대로 결과물과 소외되어 있으면서도 이런 태도를 갖는다는 점에서 자영업자보다는 월급쟁이의 직업정신이 더 고차원적인 것 같다).

이렇듯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도 저마다의 직업정신은 제각각인데, 그 차이는 사람마다 자신의 직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 같다. 직업정신이 부족한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직업을 일종의 수단으로만 본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직업이란 건 생계를 이어갈 수단 혹은 어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임시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다. 앞선 예처럼 난폭운전을 하는 택시기사에게 중요한 건 주행시간을 조금이라도 아껴서 일과시간 동안 단 돈 100원이라도 더 버는 것이 전부다. 승객이 느끼는 편안함이나 그에 뒤따르는 직업적인 자부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조금이라도 적은 노력으로 많은 돈을 버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을 뿐이다.

하지만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다르다. 자신의 직업 자체로 행복을 느끼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이들에게 직업은 수단이 아니다.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소비를 하고 뭔가를 할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단지 직업적 소명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과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마치 편안함을 느끼다가 기분 좋게 하차하는 승객을 보며 안도감을 느끼고, 자신이 내놓은 음식을 남김없이 맛있게 먹는 손님을 보며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다. 심지어 월급쟁이들에게는 손님의 반응 같은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완수한 일이 업무 프로세스의 한 부분에 기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을 갖는 이들도 많다.

그렇다면 직업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멋있게 느껴지는 건 어떤 이유 때문일까. 아마 그들 스스로가 행복해 보이기 때문에 또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묵묵하게 청소에 열중하는 미화원을 보며 어떤 감동을 느낀다. 그가 멋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멋있게 느껴지는 건 그가 어떤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멋있게 느껴지는 건 그가 행복한 사람(혹은 행복을 찾은 사람,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직업정신은 능력의 고하와는 상관이 없다. 직업정신은 태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능력을 가르칠 뿐 태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능력을 얼마나 극대화시켜서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갖도록 하느냐가 현 교육의 성패를 좌우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판검사나 의사가 되기 위해 법대나 의대를 목표로 하지만 실제로 이 목표에 도달하는 건 소수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부분은 실패를 맛보고 본인이 생각하지 않았던 진로로 떠밀리게 되고 관성적으로 직업을 택할 뿐이다. 불행해지는 거다. 그렇다고 목표에 도달한 소수 또한 반드시 행복한 삶을 얻게 되는가, 그것도 확실치 않다. 결국 다수가 불행해지는 것이다.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건 능력이 아니라 태도다. 어차피 사회구조상 다수가 전문직 같은 선망직업을 갖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것이 원하든 직업이든 그렇지 않든 결국 저마다의 위치와 자리에서 직업을 갖게 되기 마련인데, 지금의 교육은 능력에 따라 학생을 선별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의 목적은 옥석가리기가 되어선 안 된다. 교육에서 중요한 건 직업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일이다. 어차피 모두가 선망하는 직업을 갖지 못한다는 결과가 정해져 있는 이상 현실에 임하는 실질적인 태도와 방식을 일러줄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미를 찾고 나름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에게 가장 필요한 건 능력이 아니라 책임감이다. 일반인은 능력만 있어도 된다. 회사에 고용되어 일을 하든 본인의 가게를 차려 상품을 팔든 본인이 한 만큼 결과물을 만들고 대가를 얻게 된다. 하지만 공무원은 다르다. 공공행정에서는 본인이 한 만큼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본인의 가게를 찾은 손님에게 친절한 서비스를 베푼다면 그만큼 가게를 찾는 손님의 재방문율이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이 관공서를 방문한 민원인에게 아무리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도 그 공무원이 얻게 될 대가는 없다. 이렇듯 상응하는 보상이 없음에도 본인의 직무에 충실해야 하는 게 공무원의 직업적 소명이며, 노력과 보상 사이 비어있는 간극을 메워주는 건 바로 책임감이다.

행정이란 건 대부분 단순한 일이다. (호봉제가 적용되는 하위직급의 업무는 더욱 그렇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큰 고민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법률이나 제도로 정해진 기준을 실상에 적용만 하면 되는 일이다. 예를 들어 신고나 신청을 받으면 정해진 절차대로 그 일을 처리해주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특별한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능력보다는 절차대로 문제없이 일을 처리했는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행정에서 우선되어야 할 것은 결과보다는 과정이고 능력보다는 책임감이다.

장르 시스템은 일종의 보험과 같다. 사실 영화를 제작하는 건 도박에 가깝다. 아무리 큰 돈을 들인다 해도 이 작품의 흥행 여부는 짐작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작자들은 최소한의 흥행이라도 보장받기 위해 장르 시스템을 만들어냈다(다른 하나의 방법은 스타 시스템). 기존에 성공했던 영화들과 비슷한 스토리 구조, 주제를 반복적으로 만들며 일종의 보험을 들어놓는 거다.

예능도 마찬가지다. 떼토크가 유행일 땐 연예인이 떼로 출연하는 비슷비슷한 토크쇼가 유행하고, 군대를 체험하는 리얼 예능이 대박을 치자 경찰서, 소방서, 일반 회사생활을 체험하는 비슷한 예능이 생겨나고, 경연 포맷이 유행일 땐 비슷비슷한 경연 프로그램이 유행하고, 먹방이나 쿡방이 유행일 땐 음식을 요리하고 먹고 파는 예능들이 넘쳐난다.

장르를 기준으로 봤을 때 나영석은 장르 안에 있다. 그는 변용의 대가다. 장르의 큰 틀은 유지하되 그 안에서 다양한 응용과 변화를 통해 대중이 원하는 걸 정확히 짚어낸다. 여행 프로그램이지만 출연진을 캐릭터화하고 각종 게임 형식을 통해 대중적인 재미를 이끌어내고, 원로 배우와 배낭여행이란 생소한 조합을 통해 신선함을 주기도 했다. 또 삼시세끼나 최근의 스페인하숙처럼 직장인들이 갖고 있는 목가적인 삶에 대한 로망을 쿡방과 접목시켜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같은 여행 예능, 쿡방 예능이더라도 새로운 요소를 가미하거나 응용함으로써 본인만의 차별화를 만들어내는 거다.

반면 김태호는 창작의 대가다. 정해진 장르에 갇혀있지 않고 항상 새로운 주제와 형식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무한도전은 정해진 장르가 없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표방했지만 사실 그 말 자체가 무형식, 무포맷이란 의미인 것처럼 다양한 예능적 실험을 했다. 그리고 그 변화무쌍함 가운데서도 재미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일정하게 정해진 포맷의 예능이라 하더라도 주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만드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주마다 새로운 포맷과 아이템을 고민하고 기획하여 프로그램을 완성한다는 건 정말 소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거기다 재미까지 잃지 않는 건 극극극소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거다.

요즘엔 TV를 틀면 채널을 아무리 돌려도 음식만 나온다. 음식을 요리하거나 먹거나 팔거나 파는 걸 도와주거나. 이럴 땐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이 생각날 때가 있다. 유행도 과한 일변도면 쉽게 질림에도 불구하고 기류에 편승해서 쉬운 방법만 좇는 건 아닌지. 채널도 많아지고 프로그램도 많아졌는데 매번 채널을 돌릴 때마다 볼만한 게 없는 것도 그 때문은 아닌지.

다당제, 양당제에 관한 논쟁이 뜨거운 건 그만큼 지금의 정치권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크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다. 민주화 이후 대략 30년의 시간이 지났다. 물론 이 시간 동안 진일보한 면도 없지는 않다. 일정 수준 합리적이고 투명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팽배해 있다.

노회찬이 비유했던 것처럼 불판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도 바꿔보고 선거제 같은 여러 제도들도 바꿔봤지만 거대 양당의 독식 구조는 바뀐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뻔하다. 양당제를 바꾸는 것이다. 기존의 양당제를 손보고 새로운 다당제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양단제와 다당제가 갖고 있는 각각의 장단점. 물론 숙고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모두 이론화된 공식일 뿐이다. 그것이 현실에 적용되는 순간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단지 계속 시도해볼 수밖엔 없다. 부작용에만 집착하면 그 어떤 것도 개선될 수 없다.

서구가 우리보다 성숙한 정치 수준을 갖고 있는 건 민족성 같은 어떤 성향이 우리와 달라서가 아니다. 우리보다 많은 역사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당연히 여겨지는 이데올로기들, 이를테면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같은 담론들을 만들고 다듬기까지 그들은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만든 것을 그대로 차용했을 뿐이다. 답을 찾아갔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답이란 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정확성이 아니라 시행착오다. 새로운 시도를 주저해선 안 된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과정을 통해 우리만의 어떤 지점을 찾아야 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