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탈브라 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옷의 종류만 다를 뿐 탈브라든 탈코르셋이든 지향점은 결국 같기 때문이다. 여성은 반드시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사회적 당위가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여기서 말하는 ‘예쁘다’의 기준을 여성들 스스로가 정하는 게 아니고 남성중심의 사회가 결정해왔다는 점이다.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정립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타인의 기준에서 아름다움을 강요당했던 여성들이 자기구속적인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게 바로 탈코르셋 운동이었고, 약간의 시대 배경만 바뀌었을 뿐 탈브라 운동이 지향하는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굳이 탈브라 운동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박수를 쳐주고 싶다.

하지만 일부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사실 말만 페미니스트일 뿐 이들의 사고방식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혐오증, 포비아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지만)들이 이야기하는 탈브라 운동은 초점이 조금 벗어난 것 같다. 본래 탈코르셋 운동의 본질은 ‘아름다움의 기준은 내 스스로 정한다’는 것에 있었다. 자신을 옭아매는 타인(남성)의 기준에서 벗어나 스스로 가치를 매기고 스스로 결정해서 스스로 행동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한 마디로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하지만 탈브라 운동을 벌이는 일부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그들이 주장하는 건 ‘자유’에 대한 갈망이 아니라 ‘혐오’의 재생산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다.

이들이 탈브라 운동이라고 하면서 하는 행동은 머리를 짧게 깎고 티셔츠에 바지를 입고 잘 씻지 않고 배가 나와도 몸관리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화장을 하거나 원피스를 입는 여성들, 그러니까 전통적 개념으로서 예쁘게 보이려고 하는 여성들을 배신자처럼 몰아붙인다. 그런데 웃긴 건 짧은 머리에 배 나온 몸매로 티셔츠와 바지를 입는 게 바로 전형적인 남성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겉으로는 자율과 자립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들이 혐오하는 남성(좀 더 구체화한다면 중년의 아재)의 형상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미러링’이라고나 할까. 이건 ‘너희 남자들만 편하게 다니는 게 배 아프니까 우리도 똑같이 하겠다’는 유아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탈브라 운동에서는 혐오가 아니라 자유를 이야기해야 한다.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것, 남이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고 내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 추구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혐오하는 대상이 되어서 혐오를 부정하기보다 자신만의 가치를 정하는 게 더 중요하다. 니체로 말하자면 노예가 아니라 주인의 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는 건 결국 무의식적으로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혐오나 열등감 같은 감정을 시작점으로 해서 진정한 자유를 얻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집단적 열등감에 젖어있는 페미니즘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의 해방과 자유를 얻기 힘들다. 기존의 질서를 타파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성 혐오 혹은 반남성주의라는 또 다른 굴레에 스스로를 가둬버리고 마는 것에 가깝다. 페미니즘의 목표는 기존의 편협한 사고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시야를 갖고 더 넓은 지평을 여는 것에 있다. 탈브라 운동도 마찬가지다. 탈브라 운동의 동력은 혐오가 아니라 자유로의 추구에 있어야 한다. 여성이 당당하고 멋있을 수 있는 건 남성과 같은 여성이 될 때가 아니라 새로운 여성이 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미니스커트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었다. 노출이 많은 의상은 남성을 자극시켜 성범죄를 야기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논리였지만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성범죄와 미니스커트 차림을 인과관계로 보는 건 성범죄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묻는 게 아니라 오히려 피해 여성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는 건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 때문에 입는 것이지 성적인 매력을 드러내기 위해 입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습을 보고 어떤 남성이 성적인 자극을 받아 그 여성의 다리라도 만졌다면, 잘못은 본인의 행동을 통제하지 못한 그 남성에게 있는 것일 뿐 여성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나체로 거리를 활보하는 것처럼 극단적인 상황에만 이르지 않는다면 어떤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든 그건 당사자의 자유일 뿐,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논란이 된 아이스크림 광고나 아청법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면, 광고나 동영상 같은 표현물이 아동 성범죄율을 높이게 만든다는 뻘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동 포르노가 아동 성범죄를 높인다는 주장은 잠재적 성범죄자가 아동 포르노를 보고 어떤 자극을 받아서 범죄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는 논리인데, 이는 앞에서 말했듯이 미니스커트가 성범죄를 유발시킨다는 논리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탈 코르셋, 탈 브래지어처럼 여성에게만 강요되어왔던 남성적 시선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는 이들이 정작 포르노 같은 표현의 문제에 관해서는 그 남성적 시선을 다시 복권시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우수한 민족’이란 말을 거리낌 없이 쓴다. 너무 흔하게 쓰는 말이기 때문에 놓치기 쉽지만, 사실 이런 표현은 다분히 민족차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우수한 민족이 있다는 건 반대로 하등한 민족이 있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족성에 우열이 있다는 의미다. 나치즘과 다를 게 없다. 나치가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할 수 있었던 건 이런 발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위험한 생각이다.

더구나 제국주의의 피지배를 경험했던 곳에서 이런 민족차별적인 발상에 무감각하다는 건 의아한 일이다. 굳이 나치즘의 사례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제의 민족차별을 직접 겪은 바 있다. 조선민족은 스스로 일어설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제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게 민족개조론이었고 이는 식민통치의 정신적 근거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봤을 땐 터무니없는 미친 소리에 불과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또한 일제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발상이 왜 문제냐면 우열을 가리는 태도는 결국 스스로를 열등감에 가둘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 스스로가 우리 민족의 위상을 낮게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주위만 봐도 그렇다.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잘난 점을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된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잘난 체를 하는 사람은 정말 잘난 사람이 아니라 어중간한 사람인 경우가 많다. 스스로 열등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더 나은 위치로 높은 위치로 본인을 어필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려고 한다는 건 우리가 그만큼 서구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재밌는 건 김치, 비빔밥, 불고기 등이 한국의 대표음식으로 소개되는 것도 이런 열등감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실 어떤 나라의 대표음식이라는 건 그만큼 그 나라 사람들이 자주 먹는 음식이라는 걸 뜻한다. 베트남이라고 하면 쌀국수가 떠오르고 이탈리아라고 하면 파스타가 떠오르는 건 그만큼 그 나라 사람들이 그 음식을 주식처럼 자주 먹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치를 제외한) 비빔밥, 불고기, 갈비 등을 그렇게 자주 먹는 음식이라고 보긴 힘들다. 비빔밥보단 그냥 밥에 국찌개를 훨씬 자주 먹고 불고기보다는 치킨이나 삼겹살을 훨씬 많이 먹는다.

자주 먹지도 않는 비빔밥이나 불고기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꼽히는 건 의도적인 선택의 결과물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누가 보더라도 정갈하고 깔끔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음식만을 골라서 일종의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에서 실제 자주 먹고 있는 음식들, 예를 들면 순대(국)이나 (한국화된) 치킨, 삼겹살, 게장, 개고기, 번데기 같은 음식들을 선보이거나 홍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식재료나 조리방법으로 만든 음식이기 때문에 서구에 비해 미개한 음식, 열등한 음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소개되는, 아니 광고까지 하면서 전략적으로 홍보되는 비빔밥이나 불고기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이런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을 (명동을 제외하고) 찾아보기 힘든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수함이라는 실체 없는 대상에 대한 집착이 어떤 상황을 낳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애초에 우수하고 열등한 민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는 민족이란 개념도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적 공동체’에 불과하다. 민족이란 사실 실체가 없다. 그냥 믿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끼리 본인들은 같은 민족이라고 믿는 것처럼. 어쨌든 우수하거나 열등한 민족은 있을 수 없고 다만 각자의 환경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적응한 사람들만이 있을 뿐이다. 적도 부근의 지역이 경제력도 낮고 산업화가 덜 됐다고 해서 북반구의 선진국보다 열등한 지역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면 개인의 행복도나 삶의 만족도는 북반구보다 적도 지역이 훨씬 높게 나오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들은 부지런하게 공장을 돌리고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온난한 기후 탓에 배를 굶거나 추위에 떨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건 오히려 북반구 지역들이다. 중상주의나 자본주의란 시스템은 항상 식민지나 수출시장을 필요로 해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김치를 먹는 건 우리가 우수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개고기를 먹는 것도 우리가 열등한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지역의 식문화를 굳이 동경할 필요도 없고 마찬가지로 기이한 식재료를 사용하는 중국의 음식들을 미개하다고 볼 이유도 없다. 그냥 각자의 방식대로 각자의 생활양식을 영위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열등감에 휩싸이거나 다른 이들을 손가락질 하는 건 자신에게 스스로 꼰대짓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3기 신도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신도시가 건설되면 기존의 신도시는 당장이라도 망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이 염려하는 게 바로 슬럼화라는 건데, 지금까지 수많은 신도시를 만들어왔어도 수도권에서든 국내에서든 슬럼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례는 전무한 게 현실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반대의 근거로 이야기할 뿐이다. 단지 아파트가 노후화되고 상가 같은 각종 시설이 낡아진다고 해서 그것을 슬럼화라고 한다면 전국에 슬럼화 되지 않은 도시가 몇이나 있겠는가.

실제로 망할 건 아무것도 없다. 2기, 3기 신도시가 새로 지어진다한들 기존의 신도시에서 쾌적한 환경, 각종 편의시설 등을 활용하며 불편함 없이 생활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결국 사람들이 당장이라도 망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 내 소유의 아파트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도시가 아니라) 내가 망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서도 망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근방에 신도시가 지어진다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한 순간 붕괴돼서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고 아파트값이 0으로 수렴해서 빈털터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갖고 있는 부동산의 재산가치가 어느 정도 하락할 수 있는 가능성(중요한 건 가능성일 뿐이라는 점)을 안게 될 뿐이다. 나와 가족의 생활(예를 들면 일자리, 학교, 여가생활 같은 것)에는 전혀 지장이 생기지 않는다.

결국 도시도 그렇고 나도 망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남이 잘되는 꼴은 보지 못하는 속물근성만 있을 뿐이다. 3기 신도시를 반대하는 사람들 본인들도 불과 1,20년 전엔 3기 신도시 입주를 희망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내 아파트값 몇 푼 때문에 과거 자신과 같았던 처지의 무주택자들의 바람을 내치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건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만큼이나 역시 무책임한 게 아닐까. 사회보장이라는 개념이 중요시 되면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다. 왜 문제가 발생했는지 시스템의 결함을 찾고 그것을 바로잡는 게 우선되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걸 개인의 책임으로 몰고 간다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문제가 ‘개인의 일탈’에 의한 것이라면, 이에 대한 조직이나 사회의 책임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책임이 없기 때문에 달라지고 개선되어야 할 것도 없다. 따라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문제를 개인의 차원보다는 구조적 차원에서 바라보고자 했고 이를 통해 정교하게 다듬어진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 한다. 개인이 아니라 그 문제가 발생하게 된 사회를 탓하는 것이다. 사회의 탓이라는 건 결국 그런 시스템을 만들고 작동시키는 이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탓이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모두의 것은 결국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경제학으로 보면 공공재의 딜레마와 같은 상황인 거다. 공공재는 말 그대로 모두의 소유물이지만 그것을 진정 본인의 소유물처럼 아끼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내 방바닥에는 과자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지만 길거리에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린다. 책임도 마찬가지다. 모두의 책임이라는 건 결국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게 되기 마련이다.

특히 개인과 사회를 구분해서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주 간단히 말해서 개인과 사회는 불가분한 관계의 개념이다. 사회는 개인의 총합이 아니다. 근대 이후에 우리가 발견한 건 사회가 개인을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은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외부의 모든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사적인 취향이야말로 진정한 나만의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그 취향이란 것도 외부의 유행이나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처럼. 결론적으로 개인은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 사회라는 것도 결국엔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느 하나 먼저랄 것도 없이 물고 물려있는 것처럼.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지우가 말하는 것처럼 ‘책임 있는 개인’이 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전국민이 집단적 우울증에 빠졌던 건 단순한 슬픔이나 애도의 감정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허망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던 세상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이 사회의 어른으로서 모종의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감 때문에 달라진 게 있었다. 사회의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불편함이 있더라도 안전에 대한 절차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책임 있는 개인’의 의미는 바로 이런 과정을 말한다.

외부의 문제는 결국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내부의 문제를 애써 외면하려는 성향을 보이곤 한다. 예를 들어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걸 고민한다고 해서 하늘에서 돈 한 푼 떨어지냐는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에서 말한 것처럼 개인의 사유가 결여된 사회가 어떤 위험을 안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개인에게 어떻게 되돌아오는지 (개인을 어떻게 파멸의 종국으로 이끄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당연한 (그만큼 망각하기 쉬운) 명제이지만 성숙한 사회는 성숙한 개인의식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성숙한 개인의식이란 책임감을 가진 눈으로 사회를 보는 걸 말한다.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일부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정치인, 재벌, 부패관료, 운동권 같은 일부의 탓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건 결국 나의 문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