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당제, 양당제에 관한 논쟁이 뜨거운 건 그만큼 지금의 정치권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이 크다는 걸 보여주는 일이다. 민주화 이후 대략 30년의 시간이 지났다. 물론 이 시간 동안 진일보한 면도 없지는 않다. 일정 수준 합리적이고 투명해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팽배해 있다.

노회찬이 비유했던 것처럼 불판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도 바꿔보고 선거제 같은 여러 제도들도 바꿔봤지만 거대 양당의 독식 구조는 바뀐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뻔하다. 양당제를 바꾸는 것이다. 기존의 양당제를 손보고 새로운 다당제를 유도하는 방법이다.

양단제와 다당제가 갖고 있는 각각의 장단점. 물론 숙고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달리 보면 모두 이론화된 공식일 뿐이다. 그것이 현실에 적용되는 순간 어떤 결과가 도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단지 계속 시도해볼 수밖엔 없다. 부작용에만 집착하면 그 어떤 것도 개선될 수 없다.

서구가 우리보다 성숙한 정치 수준을 갖고 있는 건 민족성 같은 어떤 성향이 우리와 달라서가 아니다. 우리보다 많은 역사와 경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당연히 여겨지는 이데올로기들, 이를테면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 같은 담론들을 만들고 다듬기까지 그들은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만든 것을 그대로 차용했을 뿐이다. 답을 찾아갔던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답이란 게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정확성이 아니라 시행착오다. 새로운 시도를 주저해선 안 된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서 과정을 통해 우리만의 어떤 지점을 찾아야 하는 거다.

7,80년대 국내 영화를 보면 어색한 대사가 많다. 살벌하게 다투는 와중에도 “아, 이런 자식을 봤나!”, “못난 놈 같으니라구!” 같은 대사가 나온다. 현실 같았으면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부어도 모자랄 판에 저런 점잖은 말이 오가는 걸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 수밖에 없다. 물론 제작진이 의도한 연출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검열이 심했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대사에서 욕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나이 지긋한 배우가 인터뷰할 때나 들을 수 있는 과거의 추억담처럼 들리지만 지금이라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정말 과거의 추억으로만 치부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요즘 포르노 사이트가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물론 성인 포르노라고 해서 성적인 표현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할 수는 없다. 영상물 중에서도 리벤지 포르노나 몰카 영상 같은 경우는 명백하고 중대한 성범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런 영상을 제작하거나 유포시킨 이들을 찾아 처벌하고, 웹상에서 해당 영상을 삭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의 해결책은 너무나 손쉬운 방법이었다.  포르노 사이트에 대한 접속 자체를 막아버린 것이다. 물론 사이버범죄를 추적하고 처벌하는 데 있어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어렵다고 해서 포르노 사이트 전체를 폐쇄시키는 건 마치 영화 대사에 욕설이 나온다는 이유로 영화 제작 자체를 금지시키는 일이나 다를 바 없다.

자유라는 건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자유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지만 어떤 가능성은 분명 타인의 자유와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영역들을 금기(범죄)로 정해놓고 만인을 만인에게서 보호한다. 물론 인간이라는 게 워낙 불완전한 존재이다 보니 아무리 제도적으로 제한을 가하더라도 각종 범죄는 끊이질 않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유를 거둬들일 수는 없다. 어떤 부작용이라 하더라도 자유 자체가 없는 것보다 나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상은 단조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직장, 학교, 집, 혹은 카페와 식당.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는 하루를 반복한다. 우리의 뇌는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면 그 일상은 기억에서 없던 것으로 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여행을 갔다거나 특별한 이벤트를 겪었던 게 아닌 이상 일주일 전 혹은 한 달 전 이 시간에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 못하는 것도 그 시간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된 일상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기억이 공백으로만 남겨질 경우 허무, 권태, 무기력 등이 찾아온다는 점이다.

간접경험이 중요한 건 이 때문이다. 단조로운 일상만이 반복되는 경우 허무, 권태 등으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기 쉽지만, 그렇다고 먹고 살아가기 바쁜 이들이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새로운 자극을 받고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할 수는 없다. 대신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TV를 보고 영화관에 가고 책을 읽고 게임을 한다. 이렇게 간접경험을 통해서나마 기억의 빈자리를 채워나가야만 앞서 말한 허무, 권태 등으로부터 벗어나 즐겁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간접경험이 제일 필요한 이들은 누구일까. 성장하는 아이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성장기의 간접경험은 자아 발달에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아이들과 청소년들은 이미 다양한 간접경험을 하고 있다. 동화, 애니메이션, TV, 영화, 소설, 게임 등등. 사실 어느 세대보다도 많은 간접경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풍부한 간접경험의 콘텐츠를 수용하는 게 요즘의 어린 세대들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 TV나 극장을 통해서만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었던 반면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통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동영상을 본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으로 돌아와서, 간접경험이 제일 필요한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노인세대들이다. 이들은 시대적인 환경부터 요즘 세대와 많이 달랐다. 열악한 환경이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간접경험을 누리는 데 많은 제약이 있었다. 물론 경제활동을 하는 시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말 그대로 먹고 살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은퇴를 해야 하는 시기가 오자 문제가 생겼다. 경제활동을 멈추는 순간 그들의 일상 자체가 텅 비어버린 것이다.

노인들이 탑골공원 같은 곳을 전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집에 있으면 할 게 없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나 학생을 집 안에 두면 혼자 TV를 보든 스마트폰을 하든 컴퓨터로 게임을 하든 열심히 시간을 보내겠지만, 노인 혼자 집 안에 있으면 할 수 간접경험이 거의 없다. (현재의 노인 세대는 PC 이용률이나 독서율 모두 낮은 편이다.) 결국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자꾸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단지 공원 같은 곳에 나와 장기나 바둑을 두고 경로당 같은 곳에서 또래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것으로 그 공허함을 메우려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해 그들의 자리(무대의 뒤편)로 돌아가길 거부하기도 한다. 꼰대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무대의 중앙을 뺏기지 않기 위해 세대갈등을 부추긴다. 예를 들면 태극기부대의 노인들처럼.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단조로운 일상만으로 살 수 없다. 기억의 공백으로부터 오는 허무, 권태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한 발 물러나 있는 노인들에게 일상이란 더 단조로울 수밖에 없다. 또한 여행이나 체험 같은 직접경험을 할 수 있는 체력이나 금전적인 여건이 부족하기도 하다. 따라서 시간은 많지만 여건이 안 되는 노인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건 간접경험이다. 간접경험을 통해 기억의 공백을 메우고 정서적인 안정감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온라인 게임을 즐기는 주 세대가 청소년들이 아닌 노인들이 되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PC나 스마트폰에 익숙한 요즘의 세대가 나이 들고 은퇴하고 어렸을 적 하던 온라인 게임 등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 상에서 유저들과의 관계를 통해 사회적 활동의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고, 체력이 쇠퇴할 수밖에 없는 시기에 게임 속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건장한 캐릭터는 큰 대리만족을 안겨줄 것이다. 무엇보다 비용도 적게 들고 육체적으로 큰 소모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온라인 게임은 그 특성상 청소년보다는 노인에 더 적합한 간접경험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광화문 거리의 태극기부대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온라인 게임이 아닐까 싶다. 은퇴 이후의 삶으로부터 오는 헛헛함을 ‘나라 걱정’이라는 (헛소리에 가까운) 왜곡된 피해의식으로 채우기보다는 차라리 게임을 하면서 간접경험의 시간을 갖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 게임은 주변에 폐를 끼치지도 않고 나라를 걱정하는 것보다 재밌는 일이기도 하다. 도심 한가운데서 베레모와 군복을 입고 거수경례를 할 바에는 차라리 게임을 하면서 가상의 적과 전쟁을 벌이는 게 나을 거다. 태극기부대의 손에 들려야 할 건 태극기(또는 성조기)가 아니라 컴퓨터 마우스인 셈이다.

온라인이란 공간이 통합에 기여할 것이라는 낙관론은 한물간 것 같다. 인터넷이 처음 등장할 땐 모두가 확장, 확대 같은 개념에 주목했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다양한 정보가 쏟아졌던 그 시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방대해지고 있는 정보를 어떻게 흡수·처리하면서 자신의 저변을 확대해 나갈 것인지가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정보라는 건 이미 사람들을 질식시킬 듯 가득 차 있다. 더 이상 중요한 건 확장이나 확대 같은 개념이 아니다. 중요한 건 선택과 집중, 집적화 같은 것들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또는 자기가 원하는 정보를 선별해서 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온라인이란 공간이 결국은 유유상종의 장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흡수하는 것보다는 한 점을 찾고 그 점에 집중하려 한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아침마다 배달 오는 신문 하나가 전부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스마트폰 하나로도 과거의 신문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정보를 볼 수 있게 됐다. 오히려 특정한 취향이나 기준이 없으면 어느 정보를 먼저 받아들여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됐다. 마치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볼 때도 대게 각자가 선호하는 포털이나 언론 사이트를 통해서 각자가 주목하는 분야 위주의 뉴스를 보기 마련인 것처럼.

온라인이란 공간이 처음 등장할 때 많은 사람들은 이를 그리스 아고라에 비유했다(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자유롭고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마치 광장 민주주의가 재현된 것처럼. 그리고 이런 가능성들이 어느 정도는 현실화되기도 했다. 실제로 지금처럼 개인이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현하고 생각을 교환한 시대는 없었다.

(전에 포스팅 했던 것처럼)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보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려 한다. 대립되는 의견을 수용하고 토론을 하기보다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내 생각을 공고화하는 것이다.

아고라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 결론을 이끌어내야 하는 곳이었다. 각기 다른 입장이 생각이 어우러지는 과정을 통해 어느 한쪽만 채택이 되든지 아니면 절충점을 찾든지, 어찌 됐든 마지막으로는 하나의 결론이 도출돼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이란 공간은 다르다. 아고라처럼 합의점을 찾아야 할 필요도 없고 결론을 낼 필요도 없다.

애써 타인의 생각을 수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학급 토론시간에서라도) 토론이란 걸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안다. 내 생각의 논리가 상대의 논리보다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또 한 번 정립한 생각을 바꾼다는 게 얼마나 간단치 않은 일인지. 사람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생각을 드러내는 건 어떤 결론을 탐색하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다시 또 유유상종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반박보다는 공감을 원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 모이게 되고 그들끼리만 소통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폐쇄적인 커뮤니케이션은 극단주의를 낳게 된다. 폐쇄적인 집단은 자정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일베, 워마드, 그리고 최근에는 태극기부대까지. 모두 이렇게 탄생한 극단주의의 전형이다.

직장에서 점심을 먹을 때마다 일종의 눈치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소위 ‘통일’을 좋아하는 윗분들 때문에 벌어지는 치열한 눈치싸움 말이다. 본인이 먹고 싶은 메뉴가 있지만 섣불리 입 밖에 내면 안 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대세’를 파악하는 일이다. 눈치를 최대한 가동하여 현재 대세를 타고 있는 메뉴가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해도 되는지 판단할 수 있다. 먹고 싶은 메뉴가 대세인 메뉴와 다르다고 바로 포기할 필요는 없다. 나와 같은 메뉴를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이 유의미한 숫자에 이르면 함께 제2의 메뉴 그룹을 구성하면 된다. 예를 들어 짜장면을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숫자가 짬뽕을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숫자보다 적다고 해서 짜장면을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짜장면을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숫자 또한 꽤 많아져서 한 무리를 이루게 된다면 눈치 볼 것 없이 그 무리에 편승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나의 선택이 다수의 선택과 부합되느냐는 문제다. 제1의 메뉴든 제2의 메뉴든 다수의 선택과 부합된 선택을 해야만 음식을 주문할 때 눈총받는 일이 없다. 예를 들어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짜장면이나 짬뽕을 주문했는데 나만 홀로 우동을 주문한다면 나는 주변으로부터 무언의 압박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눈치가 없네.’, ‘개념이 없어.’, ‘특이한 사람이군.’, ‘저 사람 때문에 음식이 늦게 나오면 어쩌지?’ 하는 따가운 시선들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남들과 같은 돈을 내고 먹는 점심인데, 음식 메뉴 고르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니. 그래서 요즘 직장인들은 점심 메뉴를 통일시키는 상사를 혐오한다. 눈치 보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다. 그래야만 점심시간이라는 귀중한 권리를 오롯이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상황도 비슷한 것 같다. 각자가 어떤 가치관과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선거 때마다 주어지는 선택지는 제1당의 후보 아니면 제2당의 후보 두 가지뿐이다. 물론 그 외의 선택지도 있긴 있다. 제3당의 후보 혹은 제4당의 후보, 아니면 아무 당도 없는 후보까지. 하지만 이들의 표를 찍는 일은 거의 없다. 점심 메뉴를 통일하려는 눈치싸움 속에서 제3의 메뉴, 제4의 메뉴는 사장되는 것처럼 제3당의 후보, 제4당의 후보를 찍는 표는 사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제3의 선택, 제4의 선택을 막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주변의 압박과 상관없이 끝까지 나만의 메뉴를 고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선거에서도 대세의 흐름이 어떻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만의 가치관과 소신으로 후보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기검열이라는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점심 메뉴를 내 마음대로만 하지 않는 것은 주변의 눈총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검열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선거 때 낙선할 가능성이 큰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는 것도 내 표를 사표로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일종의 자기검열 때문이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게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내가 지지하는 정당 또는 후보자가 그만큼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 또한 당연한 권리다. 예를 들어 정의당의 지지율은 꾸준하게 10%를 상회하고 있지만, 실제 정의당이 국회에서 갖는 의석수는 5석밖에 안 된다. 정의당 지지자라고 하더라도 정작 선거에서 강요받는 선택지는 제1당 아니면 제2당 두 가지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가 확대되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다양한 가치 판단, 신념 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대리해줄 정치세력을 찾거나 만들지 못하고 있다. 선거 때마다 거대 정당의 독식 구조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깨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마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제도권 내로 진입해야 한다. 그래야만 억지로 통일된 점심 메뉴를 먹는 일 없이 오롯이 자신이 먹고 싶었던 점심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