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피할 수 없다. 고통은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다. 아무리 주의하고 대비한다고 해도 고통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건 고통이 무익함만을 남기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거창하게 니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통은 의외의 기능을 할 때가 많다.

고통은 일상을 환기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일상의 가치를 알 수 없다. 하지만 고통을 겪은 사람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당연하던 게 당연하지 않았던 기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은 사람은 일상에 안도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단조로운 일상이라도 그것이 주는 평온함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코로나를 겪은 후에야 친구들과 모여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당연하던 게 당연하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사람들과의 만남을 새롭게 환기시켰던 것처럼 일상이 단절되었던 기억은 일상을 소중하게 만든다.

그래서 일상을 더 적극적으로 누리려고 한다. 모임을 좋아하지 않던 이들마저도 사적 모임 제한이 풀리자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나려 한다. 고통에 대한 보상심리로 일상을 보다 의미 있게 채우려 하는 것이다. 고통이 삶에 대한 새로운 에너지가 되는 셈이다.

인간이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경험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나이 들기 전에는 절대 젊음의 가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직접 겪기 전엔 깨닫지 못한다.

가정적이지 않던 사람이 암 같은 질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부터는 가족을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단절되었던 기억, 잃어버릴 뻔한 기억만이 일상을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웨이트트레이닝은 근육에 상처를 만드는 작업이다. 손상된 근육이 재생되면서 부피가 증가할 때 근육이 커지기 때문이다. 결국 근육을 커지게 만드는 건 상처다. 상처가 나고 그것이 아무는 과정이 근육을 키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을 키우는 것도 고통이라고 보면 된다. 손상된 근육이 부피를 팽창시키는 것처럼 축적되는 고통의 경험이 삶의 층위를 두텁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삶의 변곡점이 되는 건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순간이다.

지금의 부모세대가 아이를 갖지 않는 건 그들의 어머니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사와 양육은 온전히 여성 개인의 몫이었던 시절, 여성은 가족을 위한 삶을 강요받았고 자식들은 그 수혜자이자 목격자로 엄마의 삶을 지켜봤다. 그리고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여성에게도 주어지는 시대가 오자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된 것이다.

딸들은 엄마에게 이중적 태도를 갖고 있다. 엄마를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지만 엄마를 닮고 싶어 하진 않는다. 엄마처럼 바보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남편이나 아이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고 싶은 거다. 그래서 아예 결혼을 하지 않거나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갖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0점대 출산율을 보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저출산(저출생) 정책은 이런 인식을 바꿀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아이를 낳아도 ‘엄마의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기대를 갖게 해줘야 한다.

제일 중요한 건 육아의 부담을 개인에게만 지우지 않는 거다. 아이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또는 국가가 책임진다는 인식이 생겨야 한다. 그만큼 보육시설이나 비용 지원이 전폭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수당 몇 십 만원 더 쥐어주는 차원이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이 사회는 출산율에 명운을 걸었구나 싶을 정도로 지원이 있어야 하는 거다.

저출산의 원인으로 페미니즘을 꼽기도 한다. 출산이나 육아를 등한시하는 페미니즘이 만연한 탓에 출산율이 떨어졌다는 주장이다. 현실을 정반대로 진단하는 것이다. 저출산은 여전히 여성이 육아로부터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에 온 것이다. 여성이 육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출산율은 반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마치 이제야 본연의 삶을 찾으려는 여성들에게 조선시대로 돌아가란 얘기다. 또 이들의 논리로는 유럽의 출산율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한마디로 페미니즘이 과해서 저출산이 온 게 아니라 페미니즘이 약해서 저출산이 온 것이다. 아직도 이 사회에서 아이를 낳으면 엄마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이를 안 낳는 것이다. 반대로 아이를 낳아도 자신을 잃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굳이 출산이란 본능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세계 유일의 0점대 출산율은 이 사회의 시한부 선고나 다름없다. 지금 상태에서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다. 여성들이 집안일과 육아를 전담하던 과거 사회로 되돌아가거나 아니면 여성들의 국가적 지원을 전폭적으로 확대하거나. 결국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딸들이 엄마의 삶을 거부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 거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오로지 선택의 문제이다. 각자 나름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며 사는 것뿐이다.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선택을 인정하고 그대로 존중해주면 되는 거다.

예전에는 적정 나이에 결혼을 하고 늦지 않게 아이를 낳고 사는 걸 ‘표준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여겼다. 따라서 누군가 혼기가 차도록 결혼하지 못하거나 부부에게 아이가 없는 건 일종의 결핍상태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뉴노멀시대가 되었고 라이프스타일에 모범답안은 없어졌다. 비혼주의자가 많아졌고 굳이 비혼이 아니더라도 혼자 사는 사람, 또는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도 많아졌다. 명절에 친척이 모여도 조카에게 장가 안 가냐고 묻는 건 실례가 된 지 오래다.

표준적인 라이프스타일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살려고 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뭐든 다수와 다른 길을 가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는 삶이 다른 삶보다 더 쿨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그건 단순히 기존의 라이프스타일을 거부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들의 삶을 수동적인 삶 또는 흘러가는 삶 정도로 평가절하하는 기저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민의식의 핵심은 ‘삶의 질’이란 건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삶의 질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혼자 책을 읽고 여가를 즐기는 시간이 자녀를 육아하는 시간보다 가치 있는 시간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질이란 노동시간을 법으로 정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던 시절에나 의미를 갖던 말이다.

쿨함의 상징이었던 히피도 먼지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있어 절대적으로 쿨한 가치는 없다. 무엇이 더 쿨한 건지 비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그건 비혼이나 무자녀를 결핍으로 보던 사고방식과 다를 게 없다. 정말 쿨한 건 각자 선택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어떤 합리화도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든 인권을 가진다는 명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구든’이란 전제이다. 만약 ‘누구든’이 아니라 일부만 인권을 가진다고 한다면 사실상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권 같은 기본권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정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기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일부만 그것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건 차별주의자의 논리이다. 예를 들어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할 수 있었던 건 흑인들에겐 아무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권이 일부에게만 인정된다는 인식을 가지는 순간 인권은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권이라는 개념도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정될 때 의미를 갖는다. 동물권을 선별적으로 인정하는 건 모순이다. 특정 동물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다른 동물의 생명을 외면하는 건 일종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동물권을 이야기할 땐 반드시 그것이 모든 동물의 권리임을 전제해야 한다.

인권이 모든 인간들의 권리인 것처럼 동물권도 모든 동물의 권리여야 하는 것이다. (소나 돼지처럼 식용 가축들은 생태계 먹이사슬로 치부하더라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낚시하는 손맛을 위해 물고기를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 개체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멧돼지를 사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물권을 이야기하는 이들 중에 낚시나 멧돼지 포획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동물보호론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기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백인우월주의자들처럼 인권을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일부 인종의 전유물로 보는 이들을 인권주의자로 볼 수 없듯이 동물권을 특정 동물에게만 적용시키는 이들도 진정한 의미에서 동물보호론자들이라 하기 어렵다.

동물보호란 개념에서 논리를 들어내면 남는 건 취향과 기호의 문제가 된다. 가치나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귀여움'이나 '가여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물은 존재만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설득할 게 아니라 차라리 학대 당하는 동물이 가엾지 않냐고 호소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논리적 허영심이 아니라 감정적인 호소만으로도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엔 충분할 것이다.

동물보호론자들의 활동은 ‘동물보호’가 아니라 ‘반려동물보호’에 가깝다. 인권주의자이기보다는 차별주의자에 가깝다. 따라서 근거 없는 도덕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차라리 솔직해지는 게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보다 진솔한 사람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386세대(지금은 586이 되었지만)가 저항세대가 아닌 기성세대의 지위로 등극한 순간, 그들의 요란한 목소리 안쪽에서는 얼마나 공허한 울림만이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이 노래하던 낭만적인 담론의 핵심엔 앙상한 안티테제만 남아있던 것이다. 자부심을 가졌던 저항의 기억은 그들에게 훈장인 동시에 족쇄였던 셈이다.

그들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능력과는 얼마나 유리된 세대였는지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야구해설가가 갑자기 배트를 쥐고 타석에 선 것처럼, 냉철하고 능숙한 판단이 필요한 현실세계에서도 그저 허울 좋은 이상과 이론만을 좇을 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윗세대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사이 스스로가 윗세대를 닮아버렸다는 점에 있다. 니체의 말대로 오랫동안 심연을 보다보니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윗세대로부터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을지 몰라도 그 안의 내용적 모순은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산업화세대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부작용을 필요악으로 치부했던 것처럼, 386세대도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한 주변적인 희생과 일탈을 불가피한 과정으로 여겼다. 각자의 지향점은 달랐을지 몰라도 방법론에 있어서는 똑같이 파쇼적이었다.

꼰대의 핵심은 본인이 꼰대인지 몰라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면에 있어서 386세대는 꼰대의 전형이다. 그들은 주로 윗세대와의 비교우위를 통해 스스로를 차별화시키지만, 아랫세대들이 봤을 땐 같은 꼰대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꼰대는 내로남불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선민의식 탓에 내가 하는 건 전부 아름다운 로맨스로 자각하지만, 남들에게는 똑같은 불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최근 들어 386세대라는 안티테제의 안티테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윤석열이라는 인물로 현상화되고 있는데, 그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어떤 가치관과 이념을 갖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윤석열의 스탠스는 안티 문재인(혹은 386)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법치주의의 회복을 얘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보기엔 빈약할 따름이다.

안티테제의 맹점은 테제가 사라지는 순간 드러난다. 안티 문재인의 한계는 정권이 교체되는 순간 모든 목적이 상실된다는 점에 있다. 386세대가 집권 후 스스로의 무능을 드러낸 것처럼,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정치적 진공상태를 낳았던 것처럼, 안티테제의 집권은 익숙한 공허함만을 드러낼 것이다.

사형제가 필요한 건 정의를 위해서다. 다른 이유는 필요없다. 그럼에도 예방, 격리효과, 비용 등 주변적인 논리를 끌어오다보니 오히려 설득력이 상쇄되고 마는 것이다. 정의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 사회과학이나 공리주의적 잣대를 들이미는 건 구차한 작업이다. 사형제도를 논하는 데 우선되어야 할 건 정의라는 개념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도덕철학자들이 밤새 토론해도 정리하기 힘든 문제다.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교집합의 영역은 엄연히 존재한다. 보편적으로 말하는 정의란 바로 이 부분을 의미하며, 사람들은 이를 토대로 정의로운지 여부를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있고, 반대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세상이 있다면, 누구든 전자보다 후자가 정의에 가까운 세상이라고 말하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 이걸 정의라고 여기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응보란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한 정의의 개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형제가 폐지된다면 ‘생명은 존엄하다.’는 명제는 선언적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생명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그 누구도 이를 빼앗을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도 살인자를 버젓이 살려둔다는 건 일종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모순을 안고도 사회가 유지된다는 건 누군가 그 불균형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희생되는 건 살인의 피해자다.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억울한데 알량한 계몽주의 탓에 두 번 희생되는 것이다.

살인의 가장 정당한 대가는 가해자의 생명을 몰수하는 것이다. 공권력을 두고 폭력이라 하지 않는 것처럼 사형제를 두고 살인이라 할 수 없다. 사형은 국가가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가족들이 가해자에게 몰려가서 돌팔매질을 하는 사적 제재와 최고형을 언도받은 범죄자에게 국가가 집행하는 사형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가 뜨거운 분노의 복수라면 후자는 차갑고 무정한 균형 맞추기이다.

사형제를 폐지하는 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정의가 훼손된 상황을 방기하겠다는 것이다. 본인 손에 피를 묻히려 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국가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들어 놓고도 굳이 사형 집행을 막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원래 옳은 길을 가는 건 불편하고 어려운 법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안일함으로는 정의든 뭐든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