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를 제외한다면, 사람이 사람을 제일 많이 죽이는 장소는 도로 위가 아닐까 싶다. 어떻게 보면 전쟁터보다 도로가 더 잔인한 곳일 수도 있다. 전쟁은 살상 그 자체가 목적이다. 적군을 죽이기 위해 전쟁터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는 사람은 없다. 도로 위의 사고는 대부분 의도와 무관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한순간 누군가를 죽일 수 있고, 영문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거다.
무작위로 발생한다는 건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군인은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전장을 나선다. 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차에 오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런 일이 당장 나한테 벌어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도로 위에서는 실수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도로에서는 사소한 실수 하나도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도로에서 실수하는 건 엘리베이터의 열림닫힘 버튼을 착각하는 거랑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끗 차이로 페달을 착각해 밟는 순간 누군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거다.
사고는 혼자 조심히 운전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이다. 수십 년 무사고를 자랑하는 이들도 결국은 운이 따랐기에 사고가 나지 않았던 거다. 예를 들어 아무리 안전하게 운전을 한들 맞은 편에서 덮쳐오는 음주운전 차량을 피하긴 어렵다. 그동안 무사고였다는 건 운 좋게 그런 차량을 만나지 않았던 것뿐이다. 도로는 불공정한 장소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사고를 당하고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에서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있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지만 운전이란 혼자 길을 만들어 가는 게 아니다. 운전은 도로의 흐름을 타는 것에 불과하다. 지금 도로는 어떤 흐름인지 내가 그 흐름에 반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항상 살펴야 한다. 무조건 천천히 가는 게 늘 안전한 건 아니다.
운전이란 가볍고 신나는 마음으로 대할 게 아니라 무겁고 진지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아무리 멋있고 예쁜 차라도 도로에 들어서는 순간 언제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거대한 쇳덩어리가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면허시험도 훨씬 어려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로에서 중요한 건 조작기술이 아니라 판단력이다.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판단력도 자격의 기준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단지 라인에 맞춰 주차할 줄 안다고 해서 자격증을 주는 건 도로 위에 거대한 쇳덩어리만 많아지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아이돌 음악은 거의 듣지 않았다. 팝이나 힙합 아니면 오래된 음악만 들었다. 관심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주변에서 뉴진스 이야기를 많이 하길래 청바지라는 어감상 남자그룹이 생겼냐고 물었다가 가차 없이 놀림을 받았다. 일행 중 한 명은 실망했다고까지 했다. 눈빛이 진짜로 보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반성하는 차원에서 열심히 k팝을 들었다. 그런데 더 반성하게 됐다. 예전에는 음악을 들을 때 아이돌 음악을 스킵했는데 지금은 나도 모르게 아이돌 음악이 아니면 스킵을 하고 있었다. 아이돌 음악이라고 하면 낯간지럽거나 유치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깨달았다. 나란 인간 역시 편견의 동물이었다는 것을.
요즘 아이돌 음악은 팝 못지않게 세련된 느낌이다. 부드럽게 표현하면 잘 다듬어져 있는 느낌이고 신랄하게 말하면 돈의 힘이 느껴진다. 제조품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품에 차이가 있듯이 음악도 기획사나 투자의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미 대중음악은 철저한 문화산업이 되었다. 이제 음악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건 자본이다.
한류 열풍 이후에 기획사가 노리는 건 해외시장이 되었다. 그만큼 투자도 많아졌다.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는 법. 실력과 감각을 갖춘 프로듀서들이 수준 높은 음악을 찍어내고 있는 거다.
90년대는 스펀지 같았던 시대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최후의 보루였던 일본문화까지 개방되면서 온갖 해외 문화를 흡수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에서 모든 장르를 아무런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락, 컨트리 같은 백인 음악이든 힙합, 재즈 같은 흑인 음악이든 이곳 사람들은 인종이나 역사적 맥락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기존 장르를 변형시켜도 보고 섞어도 보면서 오로지 기호에 따라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다. 마치 이 사회가 기초과학보다 응용과학에 두각을 보이는 것처럼, k팝도 하나의 장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오히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고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시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k팝의 인기는 90년대부터 왕성하게 축적되던 문화적 자산이 산업자본을 만나면서 꽃을 피운 덕분이다.
물론 안타까운 점도 많다. 돈 되는 장르만 주목받으면서 장르에 따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고, 인디장르는 여전히 배고프다. 예전보다 날것의 느낌이 덜한 점도 아쉽다. 실험적인 시도도 거의 사라졌다. 음악 작업이 개인의 창작보다 기업의 생산에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중음악에 대한 관심과 파이가 자체가 커진 건 의미 있는 일인 것 같다. 대중음악이 성장할수록 가장 큰 수혜자는 대중이 되기 때문이다.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듣는 귀가 즐거워진 건 반가운 일이다. 편견에 사로잡혀 대중음악을 등한시하고, k팝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스스로를 다시 반성한다. 한편으로는 취향마저도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든데, 다른 것에는 내가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갖고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는 무력함이 들기도 한다.
먹방은 간접체험이다. 직접 맛을 보는 게 아니다. 맛 표현을 읽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음식의 짜기나 맵기는 먹방 진행자의 기준에서 평가되고 보는 이들은 진행자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 음식의 맛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표와 기의는 무관한 것처럼 사실 음식의 맛과 진행자의 맛 표현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진행자는 맛있다고 한 음식이 누군가에겐 맛없는 음식일 수도 있고 반대로 진행자는 맛없다고 한 음식이 누군가에겐 맛있는 음식일 수도 있다.
드라마를 요약본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요약이라도 편집자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텍스트를 요약하는 건 ZIP으로 파일을 압축하는 것과 다르다. 선택과 집중은 텍스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해진다. 같은 강의를 듣고도 학생마다 강의 노트가 다른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해하지 않고 요약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영화, 드라마, 소설을 요약본으로 보는 건 그 작품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작품에 대한 편집자의 해석을 보는 거다. 먹방처럼 음식을 직접 먹어보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후기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다이제스트판이란 말처럼 짧은 시간 마치 소화하듯 작품을 감상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작품을 감상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감상을 감상한 것뿐이다.
지식의 양이 늘어나면서 그리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을 때가 많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무의미한 일들로 가득하다.
제주도행 여객선을 탔다는 이유만으로 익사를 당하고 심지어는 도심의 골목길을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다. 또 세상에 나오자마자 불치병이나 난치병으로 고통만 받다가 단명하는 아기들도 있다.
종교는 모두에게 말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하지만 불치병에 걸린 아기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아기나 부모 앞에서 천국 같은 내세를 이야기한다고 그게 어떤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종교는 세상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모든 건 신의 섭리에 따라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신의 세상에 무의미한 건 있을 수 없다. 아기가 불치병에 걸린 채 태어난 것조차 신의 뜻이 되어야 한다.
이해할 수 없으니까 믿어버리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심연을 신으로 메워버리는 건 옹색하다. 무책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래 약한 존재다. 약하기 때문에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는 대신 회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의 문제는 설교라는 명목으로 세계관을 강요하는 데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을 무책임하게 설명하려 한다. 신의 존재라는 동어반복으로. 그리고 아름답기는커녕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강요한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고통은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다. 아무리 주의하고 대비한다고 해도 고통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는 건 고통이 무익함만을 남기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거창하게 니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고통은 의외의 기능을 할 때가 많다.
고통은 일상을 환기시킨다. 고통이 없다면 일상의 가치를 알 수 없다. 하지만 고통을 겪은 사람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당연하던 게 당연하지 않았던 기억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은 사람은 일상에 안도하는 법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단조로운 일상이라도 그것이 주는 평온함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코로나를 겪은 후에야 친구들과 모여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당연하던 게 당연하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사람들과의 만남을 새롭게 환기시켰던 것처럼 일상이 단절되었던 기억은 일상을 소중하게 만든다.
그래서 일상을 더 적극적으로 누리려고 한다. 모임을 좋아하지 않던 이들마저도 사적 모임 제한이 풀리자 약속을 잡고 사람을 만나려 한다. 고통에 대한 보상심리로 일상을 보다 의미 있게 채우려 하는 것이다. 고통이 삶에 대한 새로운 에너지가 되는 셈이다.
인간이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경험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나이 들기 전에는 절대 젊음의 가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직접 겪기 전엔 깨닫지 못한다.
가정적이지 않던 사람이 암 같은 질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다음부터는 가족을 끔찍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단절되었던 기억, 잃어버릴 뻔한 기억만이 일상을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웨이트트레이닝은 근육에 상처를 만드는 작업이다. 손상된 근육이 재생되면서 부피가 증가할 때 근육이 커지기 때문이다. 결국 근육을 커지게 만드는 건 상처다. 상처가 나고 그것이 아무는 과정이 근육을 키우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을 키우는 것도 고통이라고 보면 된다. 손상된 근육이 부피를 팽창시키는 것처럼 축적되는 고통의 경험이 삶의 층위를 두텁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삶의 변곡점이 되는 건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