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우가 몰아친 덕분에 올해는 좀 잠잠하려나 싶었더니, 역시 또 시끌시끌하다. 해마다 복날이면 거리로 나와 저런 퍼포먼스를 펼치는 것이 거의 연례행사 수준이다. 요즘처럼 '표현의 자유'에 대해 말이 많은 때가 또 없었기에 그들의 이런 행위 자체를 내가 왈가왈부 한다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어찌 되었건 달갑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보신탕을 먹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태도다. 마치 요즘의 문명시대에는 걸맞지 못하는 야만인 따위로 여기면서 어떻게 반려동물인 개를 먹을 수 있냐며 치를 떤다. 참 독단적인 태도다. 논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들에게 논리적으로 개고기 반대 주장이 얼마나 허술한 주장인지 조목조목 따져주는 것도 이제 지겹다.

할 수만 있다면 시위를 하는 사람들 그대로 타임캡슐에 태워서 조선시대 사대문 거리로 보내고 싶다.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문명국가'의 거리에서, 고지식할 정도로 높은 문화적 식견을 갖고 있었던 양반과 선비들 앞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야만적 행위!"라고 한 번 외쳐보는 것은 어떨지. 굳이 '문화적 상대주의'니 뭐니 따지지 않더라도 언제부터 서양에서 들어온 애견문화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고상한' 문화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에는 푸아그라라는 요리가 있다. '절망의 진미'라고 불리는 거위 간 요리다. 거위 한 마리 당 손바닥도 되지 않는 극히 적은 양이 나오기 때문에 매우 귀한 요리이기도 하다. '절망의 진미'라 불릴 만큼 이 요리를 위해 매년 수많은 거위들이 끔찍하게 희생당한다. 프랑스인들은 최대한 많은 양의 간을 생산해내기 위해서 거위를 움직이지도 못할 좁은 철창 안에 가둬놓고 깔대기를 통해 엄청난 양의 사료와 물을 먹인다. 이에 거위의 간은 부을대로 부을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거위에게 억지로 '지방간'을 앓도록 만들어 거위 간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다. 매년 프랑스 주변국들은 프랑스인들의 잔인한 거위 사육을 질타한다. 문화선진국이라 자부하는 나라에서 이런 동물학대가 자행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응은 '콧방귀'다. 한 마디로 '늬들이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동물학대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단,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두둑한 배짱만큼은 눈 여겨 볼만 하다는 의미이다. 개고기 문화를 국제적 망신이니 후진문화라니 하고 떠드는 이들은 문화 사대주의에 찌들어 나라 밖 눈치를 보느라 바쁜 사람들일 뿐이다. 프랑스가 푸아그라로 많은 이들의 비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적 문화 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설령 우리의 개고기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들을 신경쓰지 않으면 될 뿐,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쩔쩔 맬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세상 어느 민족과 비교해봐도 남부럽지 않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를 영위해 나가고 있는 데 말이다.

푸아그라는 프랑스의 대표 요리를 넘어 세계적 별미가 되었다. 누구보다 프랑스인들 스스로가 푸아그라 요리에 자부심을 갖고 가장 맛있는 요리라고 치켜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만의 음식 문화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 하는 것일까.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먹는 전통이라며 외국인들에게 권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혹자는 축구를 종합예술이라 이야기한다. ‘발레+전쟁+체스=축구’라는 말도 있다. 선수들이 공을 가지고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발레를 하는 것 같다고 해서, 또 우리나라와 일본, 독일과 폴란드,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 등 국가 간 자존심을 내건 경기는 마치 전쟁과도 같다고 해서, 그리고 열한 명이 치밀한 전략과 전술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체스를 떠올린다고 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관중석 양쪽에서는 대형 국기가 휘날리고, 관중들은 서로에게 야유하고 함성을 지른다.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잔뜩 상기되어 어깨를 부딪치고 몸을 날려 상대를 막는다. 총성만 없지 전쟁이 따로 없다. 순간 가슴에 태극마크가 박혀있는 유니폼은 참전용사의 군복과 다를 게 없어진다. 한일전이라도 치러지는 날엔 대표 선수들 한 명 한 명은 선수라기보다는 손에 권총이나 도시락 폭탄만을 안 들었다 뿐이지 의사義士에 가깝다. 잉글랜드와 스웨덴의 라이벌전은 가관이다. 축구장에서만큼은 영국신사이고 점잖은 스칸디나비안이고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바이킹의 후예들뿐이다. 서로 욕하고 부르짖으며 자신들이 더 야만스러운 진정한 바이킹의 후예라고 으르렁거릴 뿐이다.

축구에는 지적인 면도 있다. 축구장에는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슈트를 입고 경기 내내 마치 책을 보는 것처럼 턱을 괴고 심각한 눈빛을 하고 있는 감독도 있다. 감독들에게 선수들은 체스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 말들을 어떻게 움직이고 배치시켜야 하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발레, 전쟁, 체스에다가 ‘드라마’를 추가시키고 싶다. 축구장은 극장이다. 하지만 다른 극들과는 달리 정해진 대본도 결말도 없다. 오로지 선수들과 공만이 라이브로 드라마를 진행시켜나간다. 그것을 보는 사람은 관중이 아니라 관객인 셈이다. 때로는 두 시간이 지루하리만큼 재미없고 그저 그런 드라마를 만들어내지만, 가끔은 반전영화보다 더 반전을 만들어내며 관객들을 열광시킨다. 2002년 월드컵 16강전에서 우리가 이탈리아를 꺾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축구는 스포츠가 아니다. 발레, 전쟁, 체스, 드라마가 합쳐진 종합예술이다.

‘법치주의’ ‘법치국가’...... 법조인 출신 대통령 시절에도 듣지 못했던 말들을 올해 들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것 같다. 여름의 촛불집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갖가지 시위, 노동운동 할 것 없이 무슨 일만 벌어진다하면 항상 나왔던 이야기가 ‘법과 질서’였다. 우리 사회가 무슨 혼란정국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냥 갑자기 법에 의한 질서가 최우선의 가치로 여겨지는 국가가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는 법치국가이다. 국가나 개인의 모든 권리나 의무, 행동 등은 기본적으로 법에 의해 규정된다. 그만큼 법을 존중하는 자세도 굉장히 중요하다. 법을 최우선의 판단 가치로 존중한다는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법치주의는 법을 잘 지키라는 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자가 헌법과 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하라는 의미도 중요합니다. 이건 상식이거든요.” 지난 ‘100분토론‘에서 유시민 전 장관이 했던 말이다. 그의 말대로 법치주의에는 국민들이 법을 잘 따르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권력자 또한 법에 의거하여 권력을 행사하라는 의미 또한 담겨있다. 하지만 현 정권은 겉으로 법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헌법 등을 무시한 채 임기가 보장되어있는 기관장의 직위를 박탈하는 등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야 말았다. 불법적인 시위나 파업 등의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법치주의를 운운하던 정권 스스로가 과연 그만큼 법치주의의 원리를 정확히 따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 뿐이다.

법의 ‘내용’ 자체도 이런 논의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국가의 법이라 함은 어떤 특정사회의 절대적 이성과도 같은 것이다. 각 국가마다 자신들의 고유한 역사나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각기 조금씩은 다른 법의 내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법이란 모름지기 한 시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담고 있는 것이다.

법 중에서도 가장 핵심인 헌법도 마찬가지다. 헌법이란 자고로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장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 정신을 담고 있는 법이라 할 수 있다. 서구사회의 경우 헌법은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때론 피를 보면서- 조금씩 때로는 혁명으로 인해 그 내용을 바꾸면서 지금의 내용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했다. ‘제헌절’이란 국경일처럼 1948년 7월 17일, 헌법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졌다. 우리나라에서 헌법은 절대 오랜 기간 끊임없는 국민들의 상호작용과 토론, 역사적 경험 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헌법 또는 법질서 그 자체에 대해 절대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법은 그 어떤 가치보다 존중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단지, 현 정권과 보수적 지식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처럼 헌법이 절대불변의 성질의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이다. 무려 60여 년 전 ‘일제히,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헌법의 정신은 현 사회의 가치와 유리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제한적이나마 시민들의 힘으로 개헌을 이루어냈던 87년의 경험처럼 헌법이나 법질서는 시대의 흐름이나 이성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단, 이미 제도적 민주화를 이루어낸 이상, 그 과정 역시 철저히 법의 질서에 기초하여 진행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순간 모든 것을 뒤집어엎자는 급진적 사고는 경계해야 함이 마땅하다. 다만, 지금의 현 제도권이 마치 법질서와 헌법을 절대불변의 최고의 가치인양 제멋대로 이용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보이지 않는 의도를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법에 대해 능동적인 자세를 갖는 것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법치주의, 법치국가란 말들을 내뱉는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법치주의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요즘 들어 말이 부쩍 많아진 국방부. 얼마 전에는 국방부가 '군가산점제' 문제를 꺼냈다. 사라진 군가산점제를 다시 부활시키자는 이야기였다. 그러자 역시 여성단체들과 인권위가 쌍수를 들어 반발하고 일어났다. 이렇게 주로 국방부에서 군가산점제에 대한 논의를 던지기 시작하고, 주로 여성단체에서 이러한 군가산점제에 대해 반발하고 나서는 그림이 반복되고 있다. 이 때문인지 군가산점제에 대한 논쟁을 남녀의 대결구도에서 바라보는 시각들이 많다. 다시 말해, 군가산점제는 남성에게는 이익이 되고 여성에게는 해가 되는 제도라는 단편적인 인식이 팽배해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절대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 오로지 남녀 대결이라는 감정 섞인 설전만 오고 갈 뿐이다.

과연 군가산점제는 '남성'을 위한 제도인 것인가? 가장 가까운 예,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만 하더라도 군가산점제가 부활할 경우 크게 불리해지게 된다. '나'와 같이 군복무를 하지 않는 사람들, 면제자라든지 혼혈, 외국인, 더 나아가 장애인까지, 이런 사람들은 군가산점제가 시행되면 가장 먼저 피해(?)를 보게 되는 남성들이다. 만약 이런 남성들이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다면, 불과 1,2점으로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에서 같은 남성이라 할지라도 군가산점은 엄청난 페널티로 작용될 수 밖에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군가산점제는 '남성'을 위한 제도라기 보다는 '군필자'를 위한 제도이다. 물론 군필자가 남성 중에 다수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군가산점제는 군필자를 제외한 남성들에게는 오히려 해가 되는 제도이다. 다시 말해, 군가산점제를 오로지 '남성'들을 위한 제도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인 것이다. 군가산점제를 오로지 '남성'과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군필자'로 그 범위를 축소시키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처럼 군가산점제를 '남성'이 아닌 '군필자'를 위한 제도라고 축소시켜 이해한다면, 지금까지 주로 여성단체에서 주도했던 남녀 성대립적 구도 하의 논쟁들이 얼마나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군가산점을 단지 '남성'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혜택이 아니라 '군복무'를 했기 때문에 받게 되는 혜택으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군필자들 또한 국가에 의한 피해자라 볼 수 있다. 2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군복무를 했지만 실질적으로 이에 대한 보상을 받는 것은 거의 없다. 굳이 찾아보자면 군복무 기간 동안 받는 불과 몇 만원의 월급 정도? 이십대 초반이라는 학업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가장 중요한 자기 계발의 시기에 짧지 않은 기간 군복무를 수행하면서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평소 그토록 외치고 있는 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미 외국의 경우 대부분의 국가가 군가산점제를 시행하고 있다. 또 군가산점제가 없는 국가의 경우 우리나라와 달리 모병제로 군대를 운영하고 있는 국가가 대부분이다.

아주 간단한 'give&take' 논리다. 절대 만만치 않은 군복무를 충실히 이행했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대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군가산점, 사실 이 제도가 시행된다고 해서 대다수의 군필자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입는 것은 아니다. 또 대다수의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공무원 관련 시험 준비를 하는 소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성단체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군가산점제에 대한 논쟁을 자꾸 성대결적인 구도로만 몰고 가며 이를 마치 '여성'에 대한 차별로 바라보게끔 만들고 있다.

난 절대 반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여성들보다도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아니, 군가산점제를 이야기하면서 왜 내가 반페미니즘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군가산점제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일부 사람(여성)들의 그릇된 인식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군가산점제는 절대 '남성'과 '여성'의 대립적인 구도에서 바라볼만한 문제가 아니다. '남성'이 아닌 단지 '군필자'들에 대한 보상에 관한 문제일 뿐이다. 그리고 이처럼 남녀 대결 구도의 감정적인 논쟁이 배제되고,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인식할 때 비로소 군가산점제에 대한 생산적인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아침부터 인터넷이 뜨거웠다. 모두들 최대 인파가 몰려들 것이라고 예상한 토요일 밤이 막 지난 때였다. 역시나 인터넷은 전날 밤의 뜨거웠던 집회 열기로 달구어져 있었다. 촛불집회 등으로 여론이 거세지자 현 정권도 다방면으로 국정쇄신책을 검토중이라는 속보도 끊임없이 보도되었다. 현 정부가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의 국정쇄신을 추진시킬지는 아직 의심의 여지가 많지만 일단은 들끓는 여론이 촛불집회를 통해 가시적으로 폭발한 덕분인지 정권이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버리고 한 발 물러선다는 것은 어쨋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일들은 여전하다. 더 이상 집회가 아니라 시위로 변모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어제 새벽에는 시위대가 청와대 진입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삼청동에서 청와대로 가려는 시위대와 이를 막는 경찰간의 충돌이 큰 이슈가 되었다. 시위대가 청와대로의 행진을 시작하자 경찰들은 버스로 길을 막고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물대포를 쏘고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과정에서 많은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인터넷에는 이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시위대의 사진들과 당시의 생생한 장면을 담은 동영상도 개진되어 있었다. 사진 속 광경은 매우 처참했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고, 동영상에서는 경찰의 무자비한 물대포를 맞는 시민들이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분했다. 아무런 힘 없는 학생들이 무기력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아팠다. 하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광경들을 본 누구라도 왠지 모를 슬픔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물론 무자비한 공권력에 짓밟힌 시위대의 처참함은 정말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집회가 시위가 되고, 이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는 것은 분명 우리가 경계해야 할 상황이다. 왜 촛불집회가 찬사를 받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촛불집회는 해외로부터도 호응을 얻을 만큼 평화적인 집회다. 촛불문화제라 불릴 만큼 집회 참가자들이 스스로 분위기를 즐기고 이어나가는 성격이 강하고, 갖가지 사회 현안에 대해 마음놓고 자신의 의견을 나누는 토론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시민들의 축제의 장인 촛불집회가 자꾸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촛불집회 그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흐름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현 정권인 이명박 정부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또 촛불집회 자체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직접 행동으로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는 집회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존경스럽다. 더불어 촛불집회를 강경 진압하고 해산하려 하는 경찰의 태도에도 많은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시위대가 청와대로의 진입을 시도했다는 것은 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그것도 한참을 넘어선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되면 인정하긴 싫지만, 평화스러운 촛불집회를 과격한 시위로 변질시키려는 불분명한 세력이 있다는 정부와 여당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청와대로 진입하려다 경찰에 의해 강압적인 진압을 당한 시위대들은 정권이 시대를 역행해 군사독재 시절로 돌아가려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 속 피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면 이 말이 그럴 듯 해보인다. 하지만 정작 시대를 역행해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은 청와대에 진입하고자 했던 그 시위대가 아닌가 싶다. 이승만 정권에 저항해 경무대 앞까지 들이닥쳐 이승만을 하야시켰던 50여 년 전과는 다르다. 그 당시와 현재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만큼 그 당시는 민주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너무나도 잘못된 정권이었고 지금은 그 후 몇 50여 년에 걸쳐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으로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화를 실현시킨 민주주의 정국이다. 청와대에 진입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급진적인 혁명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것인가. 순수하게 그들 말대로 대통령을 만나 대화를 나누겠다하더라도 이런식으로 물리력을 이용해 무작정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은 법과 질서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다.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또래가 힘들게 정착시켜온 민주주의의 법과 질서를 말이다.

청와대 앞에서 자행되었던 경찰의 강경 대응은 어찌보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어느 나라의 경찰이 현 정권 최고통치자의 집무실을 시위대가 저항 없이 진입하도록 놔두겠는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찰의 강경 대응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경찰은 경찰 나름데로 그들의 의무를 충실이 이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민주주의라지만 그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의 최소한의 시스템과 절차는 필수적인 것이다.

평화적이지만 규모있고 열정적인 집회를 통해 시민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의사를 표현한다. 그리고 정부는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을 수정하고 좀더 여론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갖추고, 국회는 시민들을 대변하여 그들을 위한 법안을 만들고 정부를 경계한다. 현재 진행 중인 촛불집회가 갖을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절대 급진적이고 과격한 변화와 혼돈은 필요치 않다. 현재 국가의 시스템에서 권력은 절대적으로 국민으로부터 발생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과 법, 질서 등을 무시하고 현재의 정국을 감정적이고 폭력적으로만 몰고가는 것은 분명 지양해야 할 것이다.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온 아줌마들, 아이를 목에 태운 아저씨들, 부모형제가 걱정되어 나온 중학생부터 대학생들까지. 기존의 시위와 다르게 이번 촛불집회가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다양한 계층의 참여, 그리고 그들끼리 즐기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문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인터넷상에서의 활발한 참여들은 더 이상 최루탄과 돌멩이로 대변되는 저항과는 색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누가 아닌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긍정적인 참여의 형태다. 도대체 촛불집회를 과격한 시위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누군지는 잘 몰라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분명 그들은 촛불집회에 의사를 표현하려 온 순수한 시민들을 과격한 시위의 현장으로 몰고 갈 것이 분명하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한 공권력과의 충돌을 이용하여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해 더욱 급진적이고 과격한 시위로의 양상을 꾀할 것이 분명하다.

'감정'에서 벗어나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감정적인 대응은 절대적으로 삼가야 한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응집되는 상황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또 그래야만 지금의 정권과 사람들에게 더욱더 설득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 이미 촛불시위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각 언론들은(물론 의도적으로 관심에서 배제시키는 보수 언론들도 존재하지만) 앞다투어 촛불집회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단순히 집회의 양상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집회의 특징과 배경, 그리고 시민들의 목소리 등을 원론적인 수준에서부터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부도 바짝 긴장해있다. 미군 여중생 장갑차 사건, 탄핵 정국 등 굵직굵직한 사건 등이 있었지만 이미 이번 촛불집회는 그 수준을 넘어섰다. 정부 또한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일부 운동권의 과격한 행동과 시민들에 대한 선동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번 촛불집회는 정권과 여당이 계속 지적하고 있는 불순세력데 대한 의심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좀더 효과적으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을 집회로부터 배제시키지 못한다면 무고한 시민들은 어제의 청와대 앞에서와 같이 과격한 시위의 현장으로 내몰릴 것이며 정부와 시민의 대립은 더욱더 감정적인 갈등의 양상으로 치다을 것이다.

이번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민주주의 축제의 장과 다름없다. 누구한테든 자랑스럽게 찬사받아야 마땅하다. 외환위기 때의 금모으기 운동, 월드컵 당시의 길거리 응원 등을 보며 이미 우리의 역동적인 시민들의 참여 의식을 실감해 왔던 외국 언론들은 이번에는 촛불집회로 높은 시민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우리의 국민들에게 또 한번 놀라고 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지금까지 시민들의 모습은 완벽했다. 이제 이 집회를 어떻게 끌고가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관철시키느냐 역시 시민들에게 달렸다. 보여주어야 한다. 이 시대의 시민들이 얼마나 성숙하고 민주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그 힘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