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폭행, 사기, 마약, 도박, 유괴 등등. 현실에서는 모두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이지만 drama에서는 심심찮게 다루는 소재들이다. 이런 행위가 drama의 소재로 허용되는 이유는 극이라는 것 자체가 작가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허구적 사실에 불과하고, 그 소재로 다른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작가의 표현을 극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흡연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상황 설정이나 서사 전개보다도 담배 한 모금이 인물의 심경이나 극적인 상황을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담배 연기가 그려내는 미장센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진심으로 청소년들의 모방심리를 우려했다면 음주 장면도 검열했어야 했다. 또 성관계, 살인, 폭행 장면들도 모두 검열 대상으로 편집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흡연 장면을 편집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일관된 논리라도 갖출 수 있었을 것이고, 논점은 표현의 자유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야 하느냐 하는 무겁고 심오한 주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TV에서 흡연만을 검열하는 것은 일종의 차별에 불과하다. 흡연에 대한 차별, 나아가 흡연자들에 대한 차별. 필자도 담배 연기라면 질색을 하는 비흡연자이고 흡연률이 낮아지길 바라는 사람이지만, 이런 식으로 흡연자들을 규제하고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치'와 '민생'을 따로 생각할 수 있을까. 일단 두 단어에서 오는 어감상의 차이는 크다. 정치는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고매한 권력 다툼을 떠올리게 하는 반면, 민생이란 말은 '일반 국민의 생계'라는 사전적 정의처럼 시급한 경제적 문제로 여겨진다. 때문에 정치와 민생을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로 구분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들어 '정치가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 '정쟁보다는 민생에 집중하겠다.' 같은 레토릭을 자주 접할 수 있는 것 또한 이런 경향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정치와 민생은 모두 잡을 수 없고 반드시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고루한 정치투쟁은 '덜' 중요한 이차적인 문제가 되고 민생은 '당장' 중요한 시급한 사안이 된다.

하지만 정치와 민생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애초부터 정치란 '먹고 사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협의적 의미에서의 정치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인간이 잉여 생산물을 가지면서부터다. 잉여 생산물을 분배하는 규칙, 그리고 그 규칙을 유지하는 힘이 수직적 권력 구조를 만들어냈고 인간들 사이에서 정치적 관계가 발생했다. 정치학 개론서에는 정치를 '사회적 제반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일'이라 뜻한다. 이는 유한한 자원 속에서 어떻게 가치를 생산하고 분배해 나갈 것인지 연구하는 경제학과 닮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정치학과 경제학은 따로 있지 않았다. 대신 정치경제학(economical politics)이 있었다.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것도 정치경제학(politischen Ökonomie)이지 경제학이 아니었다. 이처럼 정치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특히 정치와 민생(경제)을 분리시켜 보고자 했던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먼저 일제의 식민 논리가 그러했다. 식민통치로 인한 정치적 탄압은 불가피했지만 대신 한국의 근대화 시기를 앞당겼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굉장히 익숙한 논리다. 뒤이어 집권한 군부정권도 이를 답습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논리가 과거사에 대한 책임 회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이 시기는 경제의 탈정치화가 전격적인 슬로건으로 등장했다. 이처럼 경제를 탈정치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주로 집권세력의 정당성이 부족했거나 정치 철학이 부재할 때 나타났다.

요즘 회자 되고 있는 '민생법안'이란 말을 살펴봐도 민생이란 의미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민생법안은 '경제를 살리기 위한 법안'이므로 정치적 논의나 정쟁과는 상관없이 조속히 통과되어야 할 당위를 지닌 법안을 의미하는 듯 하다. 하지만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새로운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법을 만든다는 것은 경제적 가치와 자원을 분배하는 규칙을 세우는 것에 불과하다. 가령 보조금을 지원하는 신규 법안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이 법안 때문에 보조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국가의 세금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법적 합의가 '변경'될 뿐이다.

더욱이 국가 자원의 분배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는 속전속결로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민생법안'의 내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시장의 규제 완화가 바로 경제 활성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의 활성화를 불러일으킬지 혹은 더 심각한 양극화를 초래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처럼 지금의 불황이 시장실패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공공성의 부재에 따른 것인지는 신중함을 갖고 계속해서 토론해야 할, 시대적 과제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도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중차한 내용의 법안을 국회에서의 최소한의 논의도 없이 신속히 통과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민생'이란 공허한 선전을 이용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경제의 탈정치화를 옹호하는 이런 주장이 가진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어디서 경제가 끝나야 하고, 어디가 정치가 시작되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경제의 영역에 속하는) 시장은 그 자체가 정치의 산물이다. 시장을 지탱하는 모든 소유권과 기타 권리들은 정치적인 기원을 가진다는 점에서 시장 역시 정치의 산물인 것이다. 경제적 권리는 정치적 기원을 갖는다.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많은 경제적 권리들이 과거에는 정치적으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런 사례들 중에는 아이디어를 소유할 권리, 그리고 어린 나이에는 일하지 않을 권리가 포함된다. 이런 권리들이 정치적인 논쟁의 대상이었을 당시에는, 이것을 존중하는 것이 왜 자유 시장과 양립할 수 없는가 하는 무수한 '경제적'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경제를 탈정치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경제와 정치의 구분선이 옳다는 가정이 있는데, 여기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中

1961년 예루살렘에서는 아이히만이란 사람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는 수백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의 전범 중 한 명이었다. 태연히 수백만의 사람을 죽였던 경력을 생각한다면 그가 정신이상자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괴물의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만, 재판을 받기 위해 사람들에 공개된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한 인간에 불과했다. 수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의 심리 상태를 판정했지만 그의 정신적 상태는 ‘정상’을 넘어 ‘바람직한’ 성품을 보이기까지 했다. 더욱이 그는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를 갖고 있었거나 반유대주의 사상에 세뇌를 받은 상태도 아니었다.[각주:1]

재판의 참관인으로 참석하여 눈 앞에서 아이히만을 접했던 한나 아렌트는 적잖은 충격을 받고,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 동시에 무자비한 수백만(600만 명이라고 추산)의 학살자가 될 수 있었는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분석은 아이히만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근대 이성의 완성이 눈 앞에 있다고 여겨졌던 20세기 서구 사회에서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어떻게 가능했는 지, 즉 ‘악의 평범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자 고민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말’에 주목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언어가 매우 공허하고, 현실 인식에 심각한 괴리를 보이고 있으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하다고 분석했다. 아이히만이 나치의 언어 규칙을 철저하게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를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 등으로 불렀고, 학살은 ‘안락사 제공’, ‘최종해결책’ 등으로 명명했다.[각주:2] 나치 수뇌부는 의도적으로 스스로가 만든 인공적인 표현을 전국가적으로 통용시켰다.

본래 정상적인 인간들에게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전쟁도 명분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전쟁이라는 공식적인 살인도 이를 정당화해주는 명분이나 구호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일방적인 학살은 더욱 그렇다. 2차 대전 말에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죄책감을 호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치의 언어 규칙은 무자비한 ‘범죄’를 불가피한 ‘의무’로 만들어주었다. 유태인 학살은 체계적인 업무 중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얼마 전 영화 ‘변호인’을 봤다. 보통의 한 대학생을 일순간 북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 간첩으로 만들어버리는 공권력의 무시무시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공안당국이나 사법부가 사용하던 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안당국이 통용하던 언어 규칙들, ‘국가 전복 세력’, ‘반국가단체’, ‘빨갱이’, ‘간첩’, ‘적화통일’. 유죄를 선고 받았던 당사자들은 실제 반국가단체를 조직하지도 않았고 국가 전복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들은 빨갱이도 아니었다. 모두 현실적인 판단 기준과는 거리가 먼 언어들이었다. 영화 속 변호인이 법정에서 울분을 토하는 이유도 현실과 언어 사이의 간극 때문이었다.

이는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기득권층은 사회의 건전한 비판 세력마저 ‘종북좌파’로 명명한다. 종북세력과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을 동일시 해버리는 사회의 언어 규칙 속에서 정당한 비판과 문제 제기마저 북의 지령을 받고 온 종북세력의 분열 조장으로 치부된다. 때문에 영화 속에서 변호인에게 계란을 투척하던 할아버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멀쩡한 젊은이들을 상대로 종북 척결을 외치는 집회를 하고 계신다. 이들의 언어는 여전히 공허하다.

사실 언어는 현실을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에스키모인들의 십수 개가 넘는 눈에 대한 언어를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를 통한 현실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와 현실 사이는 늘 벌어져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간극을 인지하고 ‘사유’하는 것이다.[각주:3] 아렌트는 언어와 현실 사이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만이 악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라 강조했다. 이를 ‘두려운 교훈’이라 했다. 아이히만은 실제로 자신이 수행하는 임무가 안락사 제공인지 아니면 학살인지 의심하지 않았다. 때문에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했고, 종국에는 그마저도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아이히만이 학살자가 된 것도 80년대 무고한 대학생을 범죄자로 만든 것도 모두 ‘사유’가 결여된 까닭이었다.[각주:4]  사진이라는 것도 대상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표상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렌즈나 필터, 필름에 따라 천차만별의 사진이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언어를 매개로 보는 세상이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현실과 그 대상에 조금이라도 더 접근할 수 있는 핵심이 되며,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타자와의 대화 속 언어는 전과는 전혀 다른, 현실의 힘을 담은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을 테다.

(영화 '변호인'을 보고)

  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년, p79 [본문으로]
  2.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년, p177 [본문으로]
  3.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이 부림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 간극을 알아차리고부터다. 북한과는 전혀 상관없는 국밥집 학생이 빨갱이 간첩으로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공안당국이나 주장이나 사법부의 견해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 지를 몸소 깨달았던 것이다. 이계기는 주인공을 속물 조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본문으로]
  4.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년, p391 [본문으로]

누구나 세금에 대해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다. 들어오는 건 없고 나가기만 하는 돈이라 그럴까.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공공적자'란 말만 들으면 눈에 쌍심지부터 켠다. 그만큼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피 같은 세금이 지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적자'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다. 무언가 잘못된 상태이고 개선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더구나 '공공'적자는 우리의 세금이 본래 쓰이지 않아도 될 곳에 쓰이고 있다는 어감을 풍기고 있다.

하지만 철도나 버스 같은 교통, 전력, 수도, 가스 같은 대표적인 공공재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지하철을 운영하고 있는 서울도시철도공사가 계속 적자를 내고 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 세금을 투입하지 않고 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할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은 요금을 올리는 것이다. 단순하게 본다면 요금 인상은 결국 지하철 이용객이 그 부담을 스스로 지는 것이기 때문에 세금으로 적자를 메우는 것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공정해보일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하철 같은 공기업의 적자를 요금 인상으로 상쇄시키는 것과 세금으로 메우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세금 투입은 소득을 재분배하는 효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세금은 납세 의무가 있는 전 국민이 부담한다. (물론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갖고 있지만) 아울러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서울도시철도공사가 적자를 낸다는 것은 이 같은 납세자들의 세금이 지하철 이용객들의 요금에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방만한 경영 구조나 비효율성 등은 개선되어야 한다. 세금 투입과 요금 인상 사이에서의 고민은 어디까지나 비용 절감을 전제로 한 논의다. 공공적자를 무감각하게 바라보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적자라는 용어에서 비롯되는 막연한 부정적 인식과 선입견은 지양할 필요가 있다. 적당한 수준에서의 공공적자는 사회에 악순환이 아니라 오히려 '선순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연’과 ‘인공’의 경계는 어떤 지점일까? 우선 ‘자연’과 ‘인공’ 두 가지의 의미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자연의 개념 정의는 상대적으로 쉽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본연 그대로의 사물이나 상태를 자연이라 한다. 그렇다면 인공은 무슨 의미일까? 사전적으로는 인간이 가공하는 것, 다시 말해 사람에 의해 모양이나 형질이 바뀌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실상 이 두 개념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일반 도시 가정의 가스레인지나 시골 주택의 오래된 아궁이나 모두 엄밀히 따지자면 사람의 손길을 탄 똑같은 ‘인공물’이지만 사람들은 아궁이에 나무를 태우고 밥 지어 먹는 것을 ‘자연적’이라 말한다. 때로는 건강에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자연과 인공을 구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산업화나 근대화를 기준으로 두 개념을 구분하기도 한다.

원론적으로 접근하면 더 모호하다. 자연 상태와 문명을 가르는 기준인 문화라는 말은 ‘재배하다’ 혹은 ‘경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culture에 근거한다. 이에 따르면 밭을 가꾸고 농작물을 재배하는 행위도 ‘자연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인공적인 행위에 해당한다. 텃밭을 가꿔 직접 무친 나물 요리도 사실 자연의 음식이라기보다는 철저히 문명의 산물이란 것이다. 따지고 보면 culture란 의미처럼 인간이 만든 가공물들도 모두 자연의 것들을 축출하거나 혼합하는 등 변형하여 만든 것들이기에 자연에는 없는 인공물이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다. 플라스틱도 자연에서 나온 원유 등을 합성하고 가공하여 만든 것 뿐이지, 플라스틱이란 물질이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서론이 길었지만) 조미료도 마찬가지 아닐까? MSG(monosodium glutamate의 약칭)라 하여 최근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인공조미료도 사실 사탕수수 같은 천연의 재료에서 축출된 성분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공조미료의 주성분은 글루타민산은 소고기, 다시다, 멸치, 토마토, 치즈, 콩 등 일상의 식품은 물론 심지어 모유에도 포함되어 있는 성분이다. 단지 인공조미료는 천연 재료에서 글루타민산만을 축출하는 일련의 화학적 공정 과정을 거친다는 것 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한 ‘화학적 공정 과정’이란 말에 어감상 두려움을 갖기 쉽지만, 사실 알고 보면 이 과정은 염전에서 소금을 축출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과정 자체의 유해성은 없다고 한다(글쓴이는 공학도가 아니므로 자세한 공정 과정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부작용 경험 등을 근거로 인공조미료에 대한 안전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의들이 진행 중인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1987년 세계보건기구가 MSG 1일 섭취량 제한을 해제하고 1995년 미국실험생물학회연합의 정밀한 임상 실험 결과 MSG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긴 하지만 유명한 ‘중국음식 증후군’ 논란이라든가 개개인이 느끼게 되는 생리적인 반응 경험 등은 아직까지도 MSG의 안전성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걷을 수 없게 만든다. 더구나 과거 방사선 노출의 유해성을 몰랐던 것처럼 미래 과학 수준의 향상으로 MSG의 유해함이 새롭게 증명되는 일말의 가능성도 남아있다. 하지만 이 같은 논란의 여지는 말 그대로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나 가능성일 뿐, 어찌됐건 오늘날의 과학적 연구들에서는 MSG의 유해성을 입증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사람들은 MSG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갖고 있지만 이는 대부분 MSG가 인체에 유해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는 매스컴의 영향이 크다. 시청자나 독자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MSG의 유해성에 대해 소란스럽게 떠들며 공포심과 경각심을 조성하다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관심은 MSG 자체의 유해성 논란에만 함몰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MSG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점은 따로 있다. MSG 자체의 유해성보다는 이를 둘러싼 식습관이나 일률화된 입맛, 요식업자들의 편법 등에 대해서 고민해볼 때가 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MSG의 향미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2010년 일본에서 발표된 통계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1인 1일 MSG 추정 섭취량은 약 2g 정도다. 반면 유럽인들의 추정 섭취량은 0.2g 정도, 북미인들은 0.6g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럽이나 북미에 비해 많게는 10배에 이르는 MSG를 섭취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고작 2g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MSG 2g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천연 상태의 멸치를 무려 17kg이나 먹어야 한다. 다시 말해 멸치 십수 개의 박스를 하루만에 전부 먹는 것과 마찬가지다.

MSG를 많이 먹게 되면 자연스럽게 소듐(나트륨) 또한 많이 섭취하게 된다. MSG는 글루타민산과 소듐이 결합되어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권장량을 넘어선 과도한 소듐 섭취가 우리 몸에 얼마나 나쁜 해악을 끼치는 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각종 성인병은 물론이며 혈압이나 심장병, 위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이나 찌개 같은 국물을 즐기는 식습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나물을 간하기 위해서는 소량의 MSG로도 충분하지만 냄비 한가득 들어있는 찌개의 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MSG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소듐의 섭취량 또한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한 번 MSG에 길들여진 입맛은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맵고 짜고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지면 덜 자극적인 음식들은 싱겁고 맛없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외식을 하고 오면 이따금 집에서 먹는 반찬들이 싱겁게 느껴지는 것도 혹은 집에서 온갖 재료를 넣고 아무리 열심히 떡볶이를 만들어도 분식점 떡볶이 맛이 나지 않는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MSG를 사용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레 그 사용량은 늘 수밖에 없다.

가장 큰 문제는 MSG의 자극적이고 강한 맛이 음식의 다른 맛들을 죽인다는 점이다. MSG는 비용도 적게 들 뿐만 아니라 매우 빠른 시간 내에 훌륭한 맛을 내게 해준다. 덕분에 요식업자들은 MSG만 있으면 굳이 질 좋고 싱싱한 재료를 쓰지 않아도 충분한 감칠맛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횟집에서 나오는 매운탕 맛이 어느 식당을 가든 똑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어떤 해물을 넣든 야채를 무엇을 쓰든 일반인들이 느끼는 매운탕 맛은 결국 MSG의 맛 한 가지로 수렴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형편없는 조리 과정과 질 나쁜 재료를 MSG의 감칠맛으로 포장하는 식당들이 늘어났다. MSG의 맛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이 저렴한 가격과 감칠맛의 유혹에 넘어가 ‘불량식당’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좋은 재료로 정성 들여 음식을 내던 식당들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문을 닫게 되었다. 결국 거리에 남게 된 것은 MSG만으로 맛을 내는 식당들 뿐. ‘먹거리 X파일’이라는 프로그램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도 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MSG를 둘러싼 논의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냉정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 일부 매스컴이나 기업들이 조장하는 MSG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은 과학적 근거도 갖추지 못했을 뿐더러 사회적인 피로도만 높일 뿐이다. 그렇다고 MSG의 무분별한 남용을 방조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과도한 MSG의 사용은 음식 재료 본연의 다양하고 기품 있는 맛들을 가려버리기 십상이다. 반면 적당한 수준에서 MSG를 사용한다면 요리 본연의 맛과 더불어 감칠맛 또한 느낄 수 있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즐길 수 있을 테다. 따지고 보면 우리네 어머니들에게도, 시골 큰댁의 할머니들에게도 오랜 세월 ‘미원’은 부엌의 필수품이나 다름없었다.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은 단순히 MSG가 있냐 없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아득한 어머니의 손맛, 할머니의 구수한 시골 밥상을 그리워하는 것은 음식을 맛있게 먹을 식구들을 위해 직접 싱싱한 재료를 고르고 긴 시간 요리를 마다 않는 이들의 정성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