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경쟁시장과 시장만능주의(혹은 자유방임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건 아마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겁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론자들이 믿고 있는 바와는 달리 사실 스미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시장의 모습은 자유방임과 거리가 멀었죠.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유로운 경쟁시장과 시장만능주의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개인의 합리적 이익 추구에 따라 효율적으로 부가 분배되는 이론적 완성모델이라 한다면, 자유방임주의는 홉스가 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상태' 혹은 약육강식의 세태가 벌어지는 무국가상태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스미스는 시장만능주의를 경계했습니다. 그는 상공업자들을 믿지 않았죠. 아무런 제재 없이 방치한다면 그들은 끊임없이 담합과 독점을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감시하고 규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스미스의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그 국가의 역할은 가능한 한 작을수록 바람직하다는 것이죠. 여기서 뉘앙스가 중요합니다. 신자유주의론자들은 '가능한 한 작은'이란 말에 주목합니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대한 줄이는 게 선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본래 스미스의 핵심은 '자유로운 시장경제'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완전경쟁시장과 가까운 시장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자유방임을 견제할 수 있는 제3자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만약 현실의 시장에서 독점이나 담합이 방대한 규모로 행해지고 있다면 그만큼 국가의 감시와 규제 또한 늘어나야 하겠죠. 다시 말해 스미스는 국가를 통해 당시 시장의 모습을 최대한 완전경쟁시장에 가깝게 만들고 싶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스미스는 왜 정부의 개입이 '최소한'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요? 그가 살고 있던 당시의 유럽은 중상주의의 시대였습니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내부의 산업자본을 성장시키고 관세를 만들어 보호주의를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자국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일련의 수단으로 국가가 특정 자본들에게 법적 독점권을 부여하던 정경유착의 시절이었죠. 국가의 보호 아래 기업 자본은 폭리를 취하고 소비자들은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던 합법적 독과점이 성행했던 것입니다. 스미스가 혐오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독과점이지 국가의 개입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독과점과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였기 때문에 국가의 개입을 줄이는 것은 바로 곧 독과점을 줄이는 주장과 마찬가지였죠.

오늘날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독과점과 담합의 주체는 국가가 아니죠. 바로 민간기업들입니다. 물론 민간기업의 영향력은 몇 백 년 전 스미스가 상상할 수도 없었을 만큼이나 막강해졌습니다. 그만큼 독과점의 행태도 복잡해지고 견고해졌습니다. 따라서 이들을 견제하고 감시할 국가의 역할과 규모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이제는 '시장이 국가를 넘었다'고 할 만큼 민간시장의 영역이 방대해지면서 국가가 이를 규제하기가 버거워지고 있습니다. 스미스가 말하던 완전경쟁시장은 (물론 그 자체가 이론적 설정이라고 할지라도) 실체의 부분마저도 찾아보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스미스가 하늘에서 이 사회를 지켜보고 있다면 지금도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을까요?

다시 말하지만 스미스가 정말 혐오했던 것은 국가의 개입이 아니라 시장의 독과점과 담합이었습니다. 또 그가 몰아세웠던 건 중상주의에서의 국가였지 시장의 감시자로서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독과점과 담합이 팽배한 자유방임으로부터 벗어나 완전경쟁을 가능한 한 최대로 실현시키는 것만이 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는 것이라 믿었던 것이죠. 스미스는 자유로운 시장경제를 추구했던 것이지 자유방임 상태와 같은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기업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은 다수로부터 '빨갱이' 취급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이들의 목소리는 그저 없는 자들이 갖고 있는 막연한 반기업 정서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저 또한 외환위기 이후 기업 규제가 완화되는 추세에 대해 굉장히 우려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시장경제 자체를 배격하거나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북한의 주체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조에 물든 빨갱이는 더더욱 아니고요. 오히려 저는 신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시장원리와 자유경쟁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과연 자유경쟁을 토대로 한 시장원리에 충실한 경제 질서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청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노임을 단가 후려치기로 과식하고 있는 대기업이 과연 자유로운 경쟁시장의 주체인지요. 라면, 정유, 밀가루나 이동통신 기업들이 틈만 나면 가격 담함을 모의하고 소비자로부터 부당이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과연 경쟁시장에서 바람직한 기업가적 윤리라 할 수 있는지요. 오죽하면 '저녁이 있는 삶'이 정치 피켓구호로 등장할 만큼 지금 이 시간에도 찍소리 못하고 야근을 하고 있는 수많은 직장인들의 단면이 과연 자유로운 시장원리로부터 비롯된 모습인가요. 금융, 기업, 관료가 유착하여 서민들의 예금을 그야말로 '먹튀'한 저축은행이 경쟁시장의 올바른 은행가였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자들은 기업이나 은행 같은 시장 주체들의 자유와 권리를 더욱 확대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 우리 시장이 과연 효율적으로 잘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미 독과점 현상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죠. 독과점 시장에서 자원 배분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점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2008년 금융위기로 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이미 유행이 지난 사조가 되었죠.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신자유주의 혹은 시장만능주의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우면서 말입니다. 헌데, '빨갱이'를 시장주의원리를 반대하고 배격하는 이들이라 한다면 오히려 그들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누가 진정한 의미의 '빨갱이'에 가까운 걸까요? 과연 아담 스미스는 뭐라 말했을까요?

한국은 연예인의 나라이다. 텔레비젼을 켜면 온종일 연예오락 프로그램이 나온다. 라디오도 마찬가지다. 연예인들의 신변에 대한 잡담 천지다. 인터넷 뉴스도 팔할 이상이 연예인들에 대한 소식이다. 연예인이 어떤 이야기를 했고, 어떤 옷을 입었는지가 기사로 등장한다. 광고에도 연예인 천지다. 길거리를 가다가 연예인이 등장한 광고판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의 대화도 온통 연예인 이야기다. 누가 어디에 출연했고, 누구와 누구가 어떤 사이이고 하는 이야기들로 대화가 채워진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미디어를 양적으로 확장시켰다. 인터넷을 따라잡기도 버거운 마당에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모바일 미디어가 등장했다. 이로써 사람들은 신문, 잡지, TV, 라디오, 인터넷, 스마트폰 등 다양한 미디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엄청나게 커진 셈이다. 하지만 그 그릇을 채우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시 말해 미디어는 무한히 확장되어갔지만 이를 채울 수 있는 콘텐츠는 한정적이었다. 결국 만만한 것은 연예오락이었다. 사람들은 집, 지하철, 공원 등 어디에서든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들이 읽고 보는 건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에 대한 기사들 뿐이다.

사람들도 연예오락을 찾기 시작했다. 민주화 이후 사람들은 정치나 이념 같은 거대담론보다는 주변의 것에 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각박해지는 삶, 학업과 업무의 부담, 그리고 날로 극심해지는 사회적 갈등과 이념 대립 속에서 연예계 이야기는 손쉽게 시간을 죽일 수 있는 부담없는 오락거리였다. 취향이나 관심거리에 있어 공통 분모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 현대인들 사이에서 연예오락은 누구와도 쉽게 공유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대화의 소재이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현재 우리 한국 사회는 '연예공화국'이라해도 무방할 정도로 연예계에 대한 관심과 연예 가십거리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 물론 연예계에 대한 관심 자체를 나쁘게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사회문화적 관심에 있어서 어느 것이 고급스럽고 어느 것이 천박하다는 기준은 없다. 다만 그 관심이 지나치게 어느 한 쪽으로만 편중되는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TV 프로그램의 하루를 생각해보자. 아침 뉴스의 상당 부분은 연예계 뉴스로 채워진다. 하지만 말이 연예게 뉴스일 뿐, 실상은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에 대한 보도가 전부다. 어느 배우가 어떤 CF 촬영을 했고, 어느 탤런트의 다이어트 식단이 어떠하며, 어느 가수가 트위터에 어떤 말을 남겼다는 등등. 연예계에 대한 비판적 저널리즘은 찾아볼 수 없다. 뉴스가 끝나면 주부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침 토크쇼'가 이어진다. 여기서도 역시 주인공은 게스트로 초대된 연예인에 대한 이야기다. 연예인의 집을 방문하고, 연예인이 자주 먹는 음식을 소개한다. 오후에는 전에 방영되었던 밤 시간 예능 프로그램들이 재방송된다. 역시 별다른 내용은 없다. 게스트로 초대된 연예인의 근황, 개인사와 같은 사생활에 대한 에피소드 등이 전부다. 그걸 물어보는 MC가 누구냐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

문제는 사람들이 마치 거울을 보듯 TV를 보며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연예계를 닮아가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TV, 인터넷의 영상 미디어 속에서 연예인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그들의 외양적인 이미지를 통해서다. 화려한 겉치레로 유행을 만들고 그 유행에 뒤처지는 이들을 촌스런 '루저'들로 만들어버리는 연예계의 외면적인 생리가 고스란히 대중들에게도 전해지고 있다. 외양이나 언변이 실력과 내공을 전도시키는 외모지상주의가 팽배해졌다. 사람들은 TV 속 배우들처럼 되기 위해 성형을 하고, 과도한 다이어트를 감행하면서도 좀처럼 만족할 줄 모른다.

한창 자신만의 개성을 가꿔나가야 할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다. 요즘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여학생들을 보면 모두 하나 같이 연예인을 따라 짙은 화장을 한다. TV나 인터넷 이미지 속 연예인처럼 예뻐지고 싶어서다. 그들에게는 이미 여성 연예인이 예쁘고 예쁘지 않고의 기준이다. 그들의 대화도 대부분이 아이돌 가수에 대한 이야기들뿐이다. 서로가 연예인에 대한 관심을 나눌 때 비로소 또래로 어울릴 수 있게 된다. 

다른 세대에 비해 젊은층의 정치 참여가 현저히 부족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관심이 민주화 같은 정치적 담론에서 TV, 가요 같은 문화적인 담론으로 옮겨갔던 바로 그 시기에 태어난 이들이다. 때문에 정치나 사회적 담론에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대신 연예오락 중심의 대중문화에 푹 빠져있다. 신문을 읽기보다는 인터넷으로 연예기사를 즐겨보며, 뉴스 대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챙겨본다. 이들은 본인의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도 새로 데뷔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 이름을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울러 연예계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소모적인 논쟁과 부정적인 병폐를 낳고 있다. 사람들은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궁금해 하지만 모두 일회적인 관심에 불과할 뿐, 결국 연예인 당사자나 대중들 양쪽 모두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따금씩 터져나오는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 서태지와 이지아의 이혼 사건, 지금도 진행 중인 타블로 사건 등, 대중들은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자신들도 알아야 할 일종의 공유물로 여기고 흥미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는 연예, 대중오락을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어 문화풍토가 매우 척박하다. 연예인의 사생활 소식이 일부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소개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마치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건처럼 포장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최근의 현상은 후진사회가 보여주는 모습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선진 사회로 가려면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좀더 성숙한 모습이 필요하다.

-신광영 중앙대 교수


경제규모에 비해 정치사회적인 의식이 낮기로 유명한 나라가 일본이다. 3S 정책이 연상될 만큼 일본의 집권 보수 세력은 연예계에 대한 일본 사회의 높은 관심을 그대로 방치하고 이용했던 탓이다. 일본에서는 공중파 방송에서 연예인의 결혼식을 생중계한다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는 웃긴 일이지만 지금의 추세라면 우리 또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살면서 관심 가져야 할 게 참 많다. 가족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면 친구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사람만이 아니다. 날씨에도 관심을 가져야 외출할 때 무슨 옷을 입어야하는지 우산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냉장고 속 음식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하고, 현관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문단속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무엇보다 외모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리해야 한다. 물론 "나는 외모에 관심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외모에 관심을 갖든 갖지 않든 그것은 자유다. 다만 지저분한 매무새에 너더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을 좋게 볼 사람은 없다.

정치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치에 관심을 갖든 갖지 않든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외모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그 자신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것처럼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또한 그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사람들이 바쁜 와중에도 뉴스나 신문 혹은 라디오로 정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술자리나 택시에서 정치 이야기를 나누고, 노년의 어르신들이 힘겹게 투표소를 찾는 것은 단지 심심해서가 아니다. 그만큼 정치와 '나'는 구분될 수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고 정치는 우리의 삶 모든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페이지를 보면 분야별로 기사 목록이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국제, 교육, 스포츠, 연예 등등. 학문의 분과도 마찬가지다. 국문학, 경제학, 정치학, 경영학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래서일까, '정치'라는 것이 많은 분야 중 별개의 영역으로 떨어져나와 있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정치는 전체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하위 분류의 개념이 아니다. 정치란 공간은 사회의 꼭대기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회, 경제, 문화, 스포츠 등 모든 것들을 직접적으로 아우른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국회를 생각하며 정치 뉴스에서 보던 국회의원들의 몸싸움 장면을 떠올릴 뿐 정작 그곳이 우리의 권리와 의무를 규율하는 모든 법을 만드는 곳이라는 사실은 쉽게 잊어버린다.

어떤 강남 아파트의 주부들은 선거일에 계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선거일이 쉬는 날이기 때문이 아니다. 단체로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온단다. 선거라는 것이 당장 내일의 아파트 값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총선이 끝나자 정부는 KTX 민영화 사업안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까닭으로 막바지 국정 운영에 탄력을 받았기 때문이다. 선거일에 투표를 하지 않은 사람들도 당장 몇 개월 후부터는 민영화로 비싸진 운임 때문에 KTX 대신 고속버스나 새마을호 열차를 이용할지 모른다. 또 선거는 당장 내일 사먹을 라면, 과자, 딸기 값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환율에 대해 어떤 정책을 펼치냐에 따라 당장 서민들이 체감하는 물가 수준이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이다.[각주:1] 이처럼 정치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직결되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이다.

변희재는 후진국일수록 투표율이 높다고 언급했지만 그런 논리는 군주가 누군지 몰라야 나라가 태평성대였다는 고대 은,주나라 때나 통했던 이야기다. 민주주의가 형식상의 요건이라면 그 형식을 채우는 알맹이는 선거권자들의 투표이다. 독일은 그 유명한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하고도 사상 최악이었던 나치 정권을 맞이했다. 최첨단의 민주주의제를 만들어놓았지만 그 제도를 뒷받침할 수 있는 독일 국민들의 정치 참여가 부족했던 탓이었다. 선진국의 투표율은 우리나라를 훨씬 앞서고 있다. 독일이나 프랑스는 80%에 가까운 투표율을 보이고 있고, 우리나라랑 정치 구조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대통령제와 양강 구도의 의회) 미국 또한 60%를 상회한다. 경제력에 비해 정치 성숙도가 낮기로 유명한 일본 또한 60%가 넘는다. 이같은 비교는 OECD 회원국의 평균 투표율이 70%에 이르는 것을 염두해 둔다면 더욱 심각해진다.[각주:2]

"그 밥에 그 나물",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정치에 무관심한 가장 큰 이유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정치 지도자는 우리가 선별하고 만들어내는 것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 이상 YS나 DJ 같은 민주화 영웅은 없다. 이제는 선거, 여론, 미디어, 정당이 인물을 만들어나갈 뿐이다. 견제와 갈등을 원동력으로 삼는민주주의 하에서 100%의 지지를 받는 완전무결한 인물이 탄생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누가 선택을 많이 받느냐에 따라 인물이 만들어지고 또 몰락하는 것 뿐이다. 일례로 노무현이나 버락 오바마는 대선에서 승리하기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여론과 미디어가 그들이 제시하는 신념과 청사진에 관심을 갖고 커다란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비교적 단기간에 넓은 지지층을 형성하며 대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결국 정치 인물, 지도자를 만드는 건 투표에 참여하고 정치에 관심을 갖는 바로 '나'이다.

정치 무관심과 혐오증이 많아지길 바라는 정치꾼들
대의 민주주의에서 선거철만 되면 항상 투표율이 낮아서 문제라지만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원래 국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인들은 국민들이 정치에 넌덜머리가 나서 더 이상 관심 갖기를 거부하도록 유도해 왔다.
이렇게 사람들이 정치와 정치인에 지겨워서 나가 떨어지도록 하는 능력이 탁월할수록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능력있는 정치인이라고 평가한다.  정치에 무관심한 우민들이 많아질수록 정치인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간다. 자신들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이런 우민들은 부정부패에도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그들을 보위할 소수의 극렬지지자들 뿐이다. 이런 우민을 양산하는 능력이 가장 탁월한 정치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유형의 정치인은 바로 국민들이 정치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개입하도록 만드는 카리스마가 있는 정치가이다.

- 찰스 스트릭랜드, '정치의 심리학', p.135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을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결국 지금의 정치인들이다. "꼴 보기 싫다"며 등을 돌리는 순간 그 꼴 보기 싫은 정치인들을 도와주고 있는 셈이고, "개판이다"며 외면하는 순간 정치판을 더욱 개판으로 만드는 셈이다. 똥은 그냥 피하면 되지만 정치는 혐오할수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 어려운 관심도 아니다. 꼭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야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정당에 가입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정치에 대한 일상적인 수준의 관심만으로도 충분하다. 대표성과 정당성을 지닌 정치의 실현, 그리고 정치권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와 견제는 '나'라는 개인들의 정치 참여도에 달려있다.


  1.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는 친기업적인 정책을 모토로 고환율 정책을 유지시켜왔다. 대기업들의 수출 실적 위주로 고성장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고환율에 따른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국내의 물가는 폭등하고 말았다. 물가란 '보이지 않는 세금'과도 같다는 점에서 대기업들의 수출 호황은 서민들의 물가 부담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본문으로]
  2. 물론 투표율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그 나라의 정치 수준 또한 높다고는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투표율은 80%에 육박하지만 현재 이탈리아의 집권 세력인 베를루스코니 정권은 외부로부터도 상당한 비판을 받고 있는 정권이다. 지배 세력의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잠식 당해 관습적인 투표 행태를 보이는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보여진 바가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높은 투표율 만큼 시민들의 정치 의식 또한 성숙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본문으로]

바로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노트북. 그렇다면 나는 이 요상하게 생긴 물건이 어떻게 노트북인지를 알게 되는 것일까? 굉장히 쓸데없고 할 일 없어 보이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철학, 아니 현재의 모든 학문의 시작은 이 같은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먼 옛날 플라톤 같은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 거창한 '이데아'를 이야기하기도 했고, 신학자들은 그들이 믿는 '신'을 논증의 장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또 흄 같은 짖궂은 회의주의자들은 앞의 노트북 그 자체는 노트북을 보고 있는 시각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는 것(노트북의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다)이라고 이야기 했고, 데카르트나 칸트는 노트북이 나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노트북을 구성하고 있다고 발상을 뒤집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갖고 있을까? 지금의 학자들은 대부분 '대상'이나 '나' 자체보다는 그 둘을 특정한 형식으로 관계짓는 '구조'에 주목한다. 그동안 '나'와 대상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구조나 체계로, 즉 판 전체로 확대시킨 것이다. 이 같은 사조를 뭉뚱그려 '구조주의'라고 한다. '나'는 '대상'의 참된 속성보다는 '나'와 그 '대상'이 이루고 있는 총체적인 체계와 위치, 규칙 속에서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은 OK 사인이 영미권과 우리나라에서는 'ok'와 같은 긍정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일본에서는 돈을 의미하고 브라질에서는 모욕을 주는 욕설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는 이야기처럼 같은 모양의 제스쳐라도 각 사회의 약속 체계마다 완전히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사실 앞서 말한 구조주의는 바로 이 언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구조주의 학자들 중에서 언어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몸이 영혼의 집인 것처럼 우리의 존재 또한 언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언어 덕분이다. 내가 지금 눈 앞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노트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노트북'이란 말 때문이고, 그 노트북이란 사물을 블로그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또한 '노트북'이란 말 때문이다. 물론 앞에 놓여져 있는 네모난 사물을 꼭 '노트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휴대용 컴퓨터'라고 부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언어적 약속에 의해서는 '사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사물과 언어의 관계는 임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때때로 '언어' 자체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언어가 우리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 의식을 규정하는 거대한 체계, 규칙임을 의미한다. 내가 타이핑 하고 있는 이 네모난 물건을 '노트북'이라 부르는 것과 '휴대용 컴퓨터'라 부르는 것은 큰 차이를 가진다. '휴대용 컴퓨터'란 명칭은 다소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노트북'이란 명칭은 우리에게 공책이란 이미지를 그리게 만듦으로써 공책처럼 마음껏 가방에 넣고 휴대할 수 있는 컴팩트하고 편리한 느낌을 준다. 같은 사물이라도 그 명칭에 따라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천지 차이가 된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면 매순간 기업들이 새로운 상품에 대한 참신한 이름을 고안하기 위해 그토록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참신한 상품명이 상품의 매출액을 좌지우지 하는 사실은 단어 하나가 본래의 지시 대상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주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동사 중심의 언어 구조를 갖고 있다. 의식적으로 행위, 관계에 중점을 둔다. 반면 서양에서는 명사가 중요시된다. 같은 동사라 할 지라도 명사의 속성에 따라 그 형식이 바뀐다. 따라서 동양과 달리 사물, 독립적인 개체에 중점을 둔다. 동양에는 be동사(독어로는 sein동사, 불어로는 etre동사)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명사, 주어 중심의 서양 언어체계에서 be동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풍부한 서술어 표현을 갖고 있는 동양적인 언어 구조에 be동사는 굳이 필요가 없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일찍이 동양에서는 행위와 관계에 대한 도덕론이 발달한 반면, 서양에서는 사물에 대한 관찰을 중시하는 인식론, 형이상학 등이 발달했다. 또한 동양에서는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소속에서 자신을 보는 반면 서양에서는 비교적 독립적인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동서양이 갖고 있는 언어 구조의 차이는 수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양쪽의 상이한 문화, 관습, 의식을 만들어냈다. 언어는 더 이상 우리 외부에 있는 개별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 더 깊숙하게 우리 안에 자리잡고 우리의 행위, 의식과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다.

그런데 초등학교의 원어민 영어 수업도 아니고, 대학생과 교수를 상대로 영어로 강의하라는 것은 한 마디로 '무식한' 자태다. 더욱이 역사나 국문학 등 과목을 가리지 않고 영어 강의를 독려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때문에 지금 강의실에는 국문 시를 영어로 배우는 참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얇은 사 고이 접어 나빌레라" 같은 표현에 대해 어떻게 영어로 설명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언어는 단순히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지식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지식의 한 부분을 이룬다. 같은 내용이라 할 지라도 우리말로 강의하는 것과 영어로 강의하는 것은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우리말이 갖고 있는 언어 구조와 의미화에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무작정 우리말과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 영어로 강의를 듣고 이해하게 하는 것은 빵에 된장을 발라먹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대학의 영어 강의는 지식 전달이라는 목적은 물론 그 과정까지도 비효율적으로 만든다.

영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세계화라 불리는 요즘 같은 세상에 영어를 잘한다는 것, 분명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영어에만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실무적인 차원에서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대학 강의까지 영어로 수업하게 만들 까닭은 없다. 대학은 기업에 양질의 인력을 제공하는 단순한 인력 양성소가 아니다. 대학은 그 사회의 학문과 지성의 보고이다. 한국 사회라는 지형 아래 오랜 세월 축적된 학문, 지식, 교양이 이어져오고 덧붙여지고 새롭게 변용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언어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 곳에서 굳이 '영어교육'에 몰입할 필요가 있을까. '영어몰입'은 영어 수업이나 기업, 외무 등 실무적인 차원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 그렇게 해도 충분히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의 '모든 것'이다.

혐오감 嫌惡感 [명사] 병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

국어사전에 나오는 '혐오감'의 의미이다. 말뜻처럼 혐오감이란 어떤 것에 대한 불쾌한 느낌이 극대화된 감정.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대상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가식적인 정치인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정리 안 된 겨드랑이 털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은 징그럽게 생긴 바퀴벌레를 혐오한다. 혐오감이 참 불편한 감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혐오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혐오감을 느끼는 대상들을 없애려 하는 것은 과도한 발상이다. 물론 이런 발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반 세기 전, 아돌프 히틀러란 인물에 의해.

개고기를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애완견을 길러온 사람들, 혹은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혐오하고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혐오하고 개고기 식문화를 혐오한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복날마다 거리로 나와 개고기 반대 시위를 벌인다. '개는 인간의 반려동물입니다', '개를 먹는 것은 야만적입니다', '개에게도 감정이 있습니다' 등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말이다. 이들을 거리에 나서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역시 혐오감일테다. 자신이 사랑하는 개가 끔찍하게 잡혀먹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는 혐오감, 불에 그을린 채 모란시장에 늘어져 있는 식용 개들을 바라볼 때 드는 혐오감 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안방극장 가족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동성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느 연인들처럼 사랑을 속삭이고 스퀸십을 하는 게이 커플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드라마의 동성애 코드에 왜 불편해 했을까?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천륜이 무너진 것에 대한 인류애적인 죄의식 때문에? 아니다. 단지 동성애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남남 커플의 다정다감한 모습이 보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했던 어느 날, 야동을 보려다가 실수로 남성끼리의 성행위가 찍힌 야동을 본 적이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보기에 너무 불편했다. 혐오스러웠다.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게이 커플의 모습을 볼 때도 어떤 때는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성애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동성애자들의 동성애가 적어도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마음 속의 약간의 불편함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동성애 자체를 반대할 수 있을까?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마다 천성과 환경이 다른데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이 바라는 건 자신들에 대한 혐오감을 거두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이 불편한 것을 인내할 수 없어서 그 혐오감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