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몹시 고픈 늦은 오후, 지하철 역에서 나와 집으로 가던 중 삼겹살을 사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육점에서 삼겹살을 사고 입속으로는 군침을 삼키며 신나게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맛있는 삼겹살을 기대하며 들떴던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길을 가던 중 마주치게 된 한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골목을 다니며 손수 모으셨을 폐박스가 실려 있는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계셨다. 헌데, 그 할아버지와 리어카가 내 바로 옆을 지나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저렇게 폐휴지를 모아서 과연 얼마를 버실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삼겹살, 저 할아버지는 이 삼겹살을 드셔본 지 얼마나 오래 되셨을까?"
어머니는 운전을 하고 계셨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횡단보도를 지나가려는 도중 무거운 행상을 한껏 짊어진 아주머니 한 분이 무단횡단을 하시고 계셨다. 어머니는 급제동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고, 그 아주머니는 무단횡단이 미안했던지 우리 차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짐을 양 손에 한가득 든 채 힘겹운 걸음을. 어머니는 뭐 저런 사람이 있냐며 투덜거리며 넘어갔지만, 내 뇌리에는 아직도 그 아주머니의 멋쩍은 웃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분명 어머니와 같은 또래의 한 아주머니. 양 손에 무거운 짐을 든 채 분명 중앙차로에 있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었던 그 아주머니의 표정에는 힘겨운 주름이 가득했다. 같은 또래의 두 아주머니였지만 어머니는 음악을 들으며 자가용을 몰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무거운 짐을 든 채 버스를 타려고 힘겹게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니체가 대표적인 안티크리스트로 뽑히는 까닭은 단순히 그가 기독교의 도그마틱한 신의 진리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니체가 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이런 말을 직접 했던 적은 없었으며 단지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등장했던 대사의 한 마디였을 뿐이었다(물론 '신은 죽었다'는 말은 니체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지만 단순히 안티크리스트 차원에서 보자면). 이처럼 그가 그리스도교를 혐오했던 까닭은 단순히 신이 있고 없고, 기독교적 진리가 맞고 안 맞고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싫어했던 것은 우리나라 말로 '공감'으로도 번역되는 sympathy, 다른 말로는 연민의 감정이었다. 그는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보편적인 연민의 감정을 혐오했다. 연민의 감정이야말로 열등하고 무능하고 뒤쳐지는 대중들이 갖는 패배의식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리스도교(불교를 비롯한 대개의 종교들이)의 윤리가 이러한 보편적 감정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남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마음이 아파진다는 의미의 공감은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감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말하는 윤리에는 이 보편적 공감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대신 그는 영웅을 찬양한다. 그가 찬양하는 영웅적 인간 '위버멘쉬'는 대개의 사람들이 갖는 보편적 감정에서 벗어나, 아니 보편적 감정을 극복하고 열정적이고 진취적은 삶을 쟁취하는 초인이다. 시시한 사람들은 시시하게 고통스러워하지만, 영웅과 같은 위대한 사람들은 위대하게 고통을 감내하며 위대한 수난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나 보편적 감정이 바라는 고통의 부재는 순전히 부정적인 이상이며, 오로지 니체가 예를 들고 있는 알키비아데스, 프리드리히 2세,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만이 그 위대한 수난을 감내하는 고귀한 존재들인 셈이다.
어쩌면 니체는 맞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삶에 있어서 고통의 부재를 바라는 건 허무한 일일 뿐이다. 고통과 슬픔 없는 삶은 없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지 이런 고통과 슬픔에 대한 동정심에 불과하다. 니체에게 있어 사랑의 원천은 동정심, 연민의 감정인 셈이다.
개인적 고통에 접근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그런데 동정은 고통으로부터 개인적 특성을 제거하기 때문에 동정하는 자는 원수 못지 않게 우리의 의지와 가치를 박탈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정을 과시하는 사람은 고통의 필요성 즉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빈곤과 박탈, 위험과 모험, 실수 등의 불운이 그 반대의 사항만큼이나 '개인적인 필요'를 가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동정하는 자들은 불운이 한 존재를 구성하는 경제에 필수적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동기와 이유를 얻고, 오래된 상처를 치유하며, 과거 전체를 벗어던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개의치 않는 것이다.
-how to read 니체 중-
이처럼 니체는 고통과 불운이 인간의 '개인적인 필요'를 가진다고 말했다. 즉 고통은 그 인간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과제이자 필요인 셈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극복의 과정을 통해 고귀한 열정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과 불운 속에 살았던 한 인간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인간에게 고통은 단순히 필요였을까? 필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가 그 고통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열등한 존재로 끝이 났던 것이었을까? 그 인간에게 고통이란 걷어냈어야 할 어떤 것이었다면?
니체는 인류의 보편적 사랑을 경멸하고, 이 사랑이야말로 동정심으로부터 연유된 나약한 심성이라고 여겼다. 물론 사랑의 원천이 고통에서 비롯된 동정심이라는 니체식의 인식 그 자체도 많은 논란이 불거질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동정심 혹은 연민의 감정을 니체의 표현 그대로 시시한 사람들의 훌쩍거림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니체의 반대편에 서려면 동정심, 다르게 말하면 인간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들 또한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니체는 나폴레옹 같은 정열적인 영웅들을 노래하지만, 사실 우리 주위에는 사랑의 영웅들도 많다. 인류의 죄를 짊어진 예수부터 최근 우리 곁을 떠난 고 김수환 추기경이나 고 법정스님, 혹은 지진의 참사에서 한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구조대원들, 스스로 아프리카 오지를 찾는 열혈 의사들 등. 사람들은 나폴레옹 같은 강렬한 영웅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김수환 추기경 같은 사랑의 영웅에게는 머리를 조아린다.
니체가 추구하는 정열의 삶이 인간사를 수직으로 뻗쳐 가른다면, 예수와 같은 사랑과 동정심의 삶은 모든 인간들을 횡으로 아우른다. 고통의 극복, 이를 통해 쟁취할 수 있는 진취적인 삶도 물론 고귀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이야말로 지금의 인류의 모습을 가능케 했던 인간사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아니었을까. 또 사랑이야말로 니체의 궁극적 목적인 '니힐리즘의 극복'을 이룰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함께 살아가는 삶에 더 가치를 두는 것,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건 이런 자세가 아닌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나'만의 성공이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저 '나'가 밟고 이겨야할 상대들일 뿐, '경쟁'이라는 번지르르한 말 뒤에 숨겨진 치졸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철저하게 파편화된 개인들로 이루어진 지금의 사회는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삶이 가장 현실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위버멘쉬, 초인들로만 이루어진 사회.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능과 열등감에서 오는 고통을 그대로 감내할 줄 알며 오로지 자신만의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그런 사회. 어쩌면 니체의 긍정적 이상은 바로 오늘날 바로 이 자리에서 실현되었다. 영웅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역설적으로 영웅은 찾아볼 수 없는 이 사회에서 말이다.
다음달부터 군대의 고기 반찬이 줄어든다고 한다. 돼지갈비는 1년에 13번에서 9번, 오리고기는 12번에서 9번, 닭고기 순살은 하루 20g에서 15g으로 각각 횟수와 양이 줄어든다. 국방부에 따르면, 지난해 육류 가격은 15%나 상승한 반면 올해 군대 급식 예산은 고작 4% 정도만 늘어났다고 한다. 때문에 군 장병들의 식탁에 고기 반찬을 줄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고기 대신 오징어나 굴, 버섯, 파프리카 등을 배식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맛있는 고기 반찬에 환호하던 장병들이 지을 실망스러운 표정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고기 가격이 올라서 사병들에게 고기 반찬을 줄 수가 없다니, 처음에는 무슨 북한 관련 뉴스인 줄 알았다. 북한 같이 못 사는 나라가 아니고서야 돈이 없어서 사병들 급식을 줄인다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상황인가? 겉으로는 '강한 군대'를 표방하면서, 한편으로는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병들의 먹거리를 줄이려는 현 정권이다.
우리나라의 국방비 지출은 국내총생산의 약 3% 정도로 일본, 중국, 영국보다도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또 정부지출 분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국방예산이기도 하다. 해마다 막대한 돈을 국방비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돈이 대체 어디에 쓰이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사병들에 대한 지원은 열악하기만 하다. 올해 예산이 깎이자 당장 사병들의 고기 반찬부터 거두어들였고, 작년에는 금융위기가 닥치자 얼마 되지도 않는 사병 월급부터 동결시켰다(참고로 장교들의 월급은 동결되지 않았다). 또 이전 정권이 선진 병영문화 수립을 위해 늘린 사병들에 대한 군 복지 예산 또한 대폭 삭감시켜버렸다. 덕분에 사병들은 보일러 한 번 마음 편히 못 틀어보고 올 겨울을 버티게 되었다. 불행이도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이렇게 사병들이 추위에 벌벌 떨 동안 군 수뇌부와 장교들은 두둑한 월급은 물론 퇴임 후 연금까지 받아가면서 호위호식하고 있다. 참고로 국내 복지단체 중 군인공제회 만큼 큰 손을 가진 단체는 찾아볼 수 없다.
정부나 군은 사병들에 대한 지원을 굉장히 아깝게 여긴다. 아무리 군 복무가 의무라고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월급이나 열악한 복무 환경은 그 의무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마저 지급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라에 돈이 없어서도 아니다. 요즘 지어지는 정부나 지자체 건물들을 보라. 마치 첨단 IT기업의 연구소에 와있는 것처럼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들 일색이다. 나라가 돈이 없다는 것은 순전히 옛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병들에 대한 지원은 전무하다. 의무라는 명분으로 젊은이들을 징병하고 긴 시간 복무하도록 강제하면서 국가나 군이 이들에게 해주는 것은 거의 없다. 말이 좋아 국방 의무이지, 국가가 20대 청년들을 상대로 하는 '착취'나 다름 없는 수준이다. 그러는 와중에 정부와 군 수뇌부가 군필자들을 상대로 마치 군 복무를 보상해주는 것 같이 생색을 내는 제도가 하나 있다. 바로 '군 가산점 제도'이다.
아쉽게도 대부분 맞는 말이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삭막한 아파트들, 더러운 공기와 물, 이외에는 어떠한 특색도 찾아볼 수 없는 무색무취의 도시 서울이다. 서울시가 서울이란 브랜드를 알리는데 아무리 많은 투자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정작 그 브랜드 안의 내용은 별로 볼 게 없는데 말이다.
사진 속 차가운 돌벽에 상처 같은 구멍들은 무엇일까? 바로 총알 자국이다. 지금도 저 돌벽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처형장에 고스란히 남겨져있다. 그 비참하고 처절한 모습 그대로 말이다. 벽에 총알이 튀고 피가 얼룩지면서 총살 당했을 수감자들을 생각하면 잔인한 역사에 대한 충격과 슬픔에 가슴이 먹먹해지기 마련이다.
폴란드 정부는 총탄 자국이 새겨진 돌벽을 치우지 않았다. 오히려 애써 보존하고 전시하기까지 했다. 자신들의 조상이 독일 나치에게 당한 그 처참한 현장을 과거 모습 그대로 드러냈다. 전례가 없었던 잔인한 학살을 당한 폴란드인들에게는 너무나 아프고 치욕스러운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 수용소를 개방하였다. 입장료 한 푼 받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경주가 수학여행지의 1순위로 꼽힌다면, 유태계 학생들의 수학여행지 1순위는 바로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이곳에 가면 단체로 수용소를 둘러보는 학생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폴란드인들과 유태인들은 왜 후손들에게 이토록 처참했던 공간을 직접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서울시가 2020년까지 1400억 원을 들여 남산을 새롭게 가꾸는 '남산 르네상스 마스터플랜'을 내놓았다. '르네상스'가 어떤 뜻인지 정확히나 알고 이런 명칭을 정했던 것이었을까? 서울시는 뚝딱뚝딱 새로 건물이나 짓고 공원만 보기 좋게 가꾸면 뭐든 '르네상스'가 되는 줄 알았나보다. 일제 통감관저 터, 안기부 본관 등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곳들을 굴착기로 밀어버리려는 그들이 '르네상스'라는 말 속에 '과거의 재생'이란 의미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나 했을까?
우리는 심한 편식을 하고 있는 듯하다. 기억에 대한 편식말이다. 그저 자랑스러웠고 영광스러웠던 기억만을 되뇌이려 한다. 부끄러웠던 순간, 치욕스러웠던 순간들은 애써 잊으려 할 뿐이다. 결국 되풀이 되는 것은 부끄러운 역사였다. 부모들은 아이를 혼내고 다그치지만, 아이들은 혼났던 기억은 잊은 채 제 멋대로의 잘못만 반복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반만 년이라는 긴 역사를 갖고 있고, 강대국들 사이에서의 격동의 근현대를 거쳤던 우리만큼 소중한 경험들을 갖고 있는 민족이 세상에 또 있을까. 설령 그 경험과 기억이 치욕스럽고 창피하다고 한들, 그 기억을 감추고 숨기는 것보다는 드러내고 함께 의미를 다지는 것이 더욱 가치 있는 선택이 아닐까. 우리가 과거로부터 얻어낼 지혜와 경험은 너무나도 많다.
수치스러운 기억을 되뇌이는 것은 절대 과거에 얽매이는 것도 아니요,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영광스러웠던 과거에서 자부심을 느꼈던 것처럼 수치스러웠던 과거에서 반성과 고민을 느끼는 것 뿐이다. 유태인들이 과연 여태껏 과거에 얽매여있는 탓에,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여러 유태인 수용소를 보존하고 있을까? 이미 그들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민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에 대한 답은 너무나 뻔해 보인다.
과거 전범국가였다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성숙한 국가로서 주변국들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과거에 대한 반성 덕분이었다. 반대로 일본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주변국들의 질타를 받고 있다. 과거에 대한 반성은 커녕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탓이었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 망언을 일삼을 때마다 우리는 발끈하며 일본인들을 호되게 몰아친다. 그런데, 기억하지 싫은 역사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 또한 일본인들과 똑같은 부류가 아니던가.
카니발리즘, 우리나라 말로 식인풍습. 수만 년의 인류의 긴 역사에서 식인풍습이 사라지게 된 것은 불과 수 십 년 전의 일이다. 그만큼 식인풍습은 우리 인간들과 멀지 않았다. 오세아니아의 한 부족은 참 애틋한 식인풍습을 갖고 있었다. 그 부족에서는 죽은 가족의 몸과 영혼을 자신의 몸에 영원히 간직한다는 믿음으로 부모형제의 인육을 먹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식인풍습 치고는 상당히 애절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인육을 먹는 풍습은 야만적인 악습이라며 당장 이를 그만하라고 강제할 수 있을까. 어느 날 낯선 이방인들이 와서 우리에게 죽은 가족의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사람고기'는 안 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들, 다시 말해 '생명존중'이나 '인간에 대한 존엄성' 같은 개념들도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 아닌 이상 결국에는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로 인해 지금 이 순간에도 '보편적 가치'라는 정체 모를 믿음에 의해 너무나 '인간적'이기만 한 인간의 모습들이 '야만적'인 모습으로 폄하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고기도 안 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하물며 개고기는 왜 안 된다는 것인지 더더욱 이유를 모르겠다. 채식주의자가 일반 사람들에게 육식을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꼴과 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차라리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지 말라고 주장한다면 일면의 일관성이라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개고기 문화를 반대하면서 드는 일관성 없고 무지한 논리와 생각들이란 참 갈수록 가관이다.
언제부터인가 '반려견'이란 말이 많이 떠돈다. 개는 인간의 반려동물이기 때문의 도의적 차원에서 개를 잡아먹는 것은 도리가 아니란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애완견을 반려동물의 하나로 키우는 사람들도 많지만 동시에 개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 또한 많다. 조물주가 인간과 개를 반려 동물이라고 짝지어준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를 반려동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취향을 무슨 동물에 대한 범인간적인 의무라도 되는양 타인에게까지 강요하고 있는 노릇이다. 서로 자신의 범위 내에서 자신이 반려동물이라고 생각하는 동물들을 보살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커피전문점에서 에스프레소나 라떼를 마시는 사람이 설탕이 잔뜩 들어간 다방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촌스럽다며 흉을 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방커피는 촌스러운 취향이니 더 이상 마시지 말라고 커피잔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보면 생태계에서 가장 힘 있는 동물로서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너무나 흔하고 자연스러운 광경이다. 어디 먹기만 하겠는가. 기름도 얻고 가죽도 얻는다. 하지만 이를 어렸을 적 개를 잡던 광경을 목격했던 불편한 기억과 오버랩시켜 유독 개를 잡아먹는 것만이 잔인하고 몰지각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참 편협한 태도가 아닐까. 그럼 소고기집 주인 아저씨는 인간답고 개고기집 주인 아저씨는 인간답지도 않단 말인가.
'톰과 제리'라는 만화영화가 있다. 고양이 톰은 귀여운 쥐인 제리를 쫓지만 매번 제리에게 골탕을 먹기 일쑤다. 그런데 어느날 톰이 제리를 잡아먹어버렸다고 해서 우리가 톰에게 왜 그런 몹쓸 짓을 했냐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귀엽고 깜찍한 제리라 할지라도 톰이란 고양이 앞에서는 한낱 한 마리의 쥐에 불과할 텐데 말이다. 물론 마음은 편치 못할 것이다. 그 귀여웠던 제리가 잡아먹히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내 마음이 불편하다고 톰에게 제리를 잡아먹지 말라고 강제할 수 있을까. 아니면 톰이 제리 말고 다른 쥐를 잡아먹게 내버려둔다면 마음이 편해질까? 제리와 다른 쥐들은 뭐가 다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