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은 기분을 짧게 이야기하자면, 잘난 척을 하는데 잘난 게 맞기 때문에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기분이랄까. 게이치로는 단지 내면의 명령에 따라 쓸 수밖에 없는 것을 썼을 뿐인데, 나 같은 범인은 그것을 잘난 척으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잘난 척이라고 느꼈을까 싶은데, 그건 아마 작가의 여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험을 할 수 있는 여유랄까. 장편 한 권을 탈고하는 과정에도 사력을 다해야 하는 범인들과 다르게 히라노 게이치로는 천오백 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방대한 참고 서적으로 일련의 문학적 실험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문학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현 시점에서 문학이 정점에 있었던 시대로 돌아가보려 했다는 그의 의도를 돌이켜보면 그가 왜 천재라고 평가받는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전 작품들과는 완전히 달라진 문체에서 오는 낯섦도 이해가 되고.

두꺼운 책이지만 내러티브의 은근한 재미도 괜찮았고 인물의 독백을 빌려 이야기하는 작가의 사색적 묘사 때문에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스킵하고 싶은 유혹이 일 정도로 간간히 난해한 표현도 많았지만, 인내하고 읽다보면 나름대로 남겨지는 것도 있었다. 아무리 고운 가루라도 체에 거르면 또 뭔가가 남는 것처럼(인내하며 정독하는 건 작가 스스로가 '책을 읽는 방법'에서 강조한 독서법이기도).

쇼팽과 들라크루아라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와 화가를 통해 그려내는 작가의 예술론, 미학적 관념들은 천천히 음미해볼만 내용들이고, 들라크루아가 실토하는 천재론은 순전히 작가 개인의 고백인 것 같아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다. '달'이나 '일식' 같은 기존의 작품처럼 메모해 놓고 싶을 정도로 유려한 묘사의 소절도 많았다. 양이 많아지면 그만큼 밀도는 낮아질 것만 같은 고정관념을 무색케 할 정도로.

왠지 천재라는 말은 성실함, 노력 같은 개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천재란 왠지 게으르고 단명하고 나약한 이미지이기도 하니까. 작중의 쇼팽과 같이. 하지만 히라노 게이치로는 천재이지만 동시에 끈질기고 원대하기까지 하다. 독자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울 뿐. 들라크루아의 고뇌처럼 천재가 쉬지 않고 작업에 열중해야 하는 건 내면적인 강박 때문만이 아니다. 작품을 기다리는 나 같은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꾼은 정치가와 다르게 신념보다 계산을 앞세운다. 정치적인 가치 판단이 아니라 정치공학적인 이해타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권력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는 현실적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불가피한 경우에 한정된 선택이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꾼에게는 이해타산이 전면적인 기준이 된다. 그들에겐 공천을 받고 표를 얻고 자리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지역의 후보자 중에는 정치가가 아니라 정치꾼에 가까운 사람이 많다. 예를 들어 그들의 학력이나 경력의 면면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 대부분 경영학 또는 행정학 석사 정도의 학위와 지역이나 정당에서의 온갖 직함들을 갖고 있다. 특정한 목적을 위해 쌓은 경력인 것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의 경력에 주목하는 건 그것으로 그가 어떤 경험을 해온 사람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력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정치꾼들의 경력은 순전히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경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치가와 정치꾼의 옥석 가리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지역에는 정치가보다 정치꾼의 숫자가 많기도 하고, 정치가보다 정치꾼이 정당에 잘 보여 공천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유권자들은 소속 정당을 기준으로 표를 주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후보자 개인적 자질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갖지 않는 경우도 많다. 풀뿌리 민주주의나 대표성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무관심이 야기하는 정치적 진공상태를 무혈로 잠식하는 건 항상 거대 정당들이다.

따라서 정치가와 정치꾼을 가려내는 건 지역정치가 아니라 중앙정치의 역할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유권자보다 정당의 몫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지역구를 줄이고 비례대표를 늘리는 건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 비례대표 후보는 정당이 외부의 인물을 영입하는 방식으로 정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처음부터 정치판에 발을 들이던 사람이 아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이미 성과를 거두거나 공로를 인정받고 있던 중, 우연한 기회로 정치계에 스카웃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적 자질에 대해 각 분야에서 이미 검증이 된 상태이고, 전문성도 갖고 있다. 또 정치공학적 셈법과도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정치꾼적 기질보다는 정치가적 기질을 갖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물론 비례대표제도 완벽한 방법은 아니다. 모든 제도가 장단이 있듯이. 다만 정당보다 개인에 대한 정치적 불신이 만연한 상황에서 이런 방법을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뭔가 자리 잡히기 전까지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건 필요한 일이니까. 정치제도라는 건 결국 게임의 규칙이고, 그 규칙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골목식당'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예능을 챙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지 골목식당은 빠짐없이 보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메시지가 좋아서 그랬던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요식업에 대한 노하우나 골목상권 재생에 관해 다루는 듯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건 직업의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평생고용이 사라지고 요식업은 핫한 직종이 되었다. 퇴직자들이 저비용으로 쉽게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하는 것처럼 퇴직을 하면 요식업을 시작하는 게 보편적인 생계 루트가 되었다. 요식업에 어떤 뜻을 갖고 뛰어든 게 아니라, 단지 생계를 위해 떠밀리듯 시작한 것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음식에 대한 애착, 위생관념, 적극성 등이 부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골목식당에서도 노하우보다는 직업적인 자세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백종원이 식당 주인들에게 전수하는 건 레시피만이 아니다. 그는 요식업에 대한 직업의식, 음식이나 손님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치려 한다. 책임감을 갖고 고민하며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맛있게 먹는 손님의 피드백에 보람을 느낄 줄 아는 마음가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백종원도 이런 태도를 갖춘 주인들에게는 어떤 도움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백종원이 힌트를 주지 않아도 언젠가는 일정한 위치에 다다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건 시행착오의 시간을 줄여주는 것뿐이다.

직업의식이라는 건 사실 요식업이나 자영업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강조되어야 할 가치다. 속물적인 직업관이 팽배한 이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사회에서 직업에 대한 잣대는 철저하게 타자적 기준으로 평가된다. 판검사나 의사, 교수처럼 명예롭거나 잘나가는 사업가처럼 돈이 많거나, 그게 아니면 남들처럼 건실한 회사를 다니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진로를 설계하는 데 있어 정작 중요한 내면적인 기준들, 예를 들어 적성이나 성취감 같은 문제들은 철저히 외면당하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적성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밥벌이라는 게 기호나 취향을 따질 정도로 만만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업의식이라는 건 단순히 좋고 싫음의 문제 그 너머에 있는 가치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어떤 직업이 주어진 상황에서 그 일에 어느 정도의 애착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삶 자체에 대한 태도와도 비슷하다. 삶이라는 것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특정한 모습으로 내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을 포기한 사람들은 아무런 가능성 없이 무기력한 세월을 보내는 것처럼, 일에 대한 애착이 없는 사람 또한 단지 돈이나 밥벌이에 급급한 속물적인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골목식당을 보며 시청자들이 흐뭇함을 느끼는 것도 식당 주인들의 달라진 태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흐뭇함은 대박을 향한 값싼 대리만족 같은 게 아니다. 그건 속물의 영역이다. 그걸 넘어서 시청자들이 깊은 울림을 느끼는 건 음식장사 자체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와 의지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 변화로 스스로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언론보도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 관련 뉴스다. 아니, 절반이 아니라 체감상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비중이 코로나에 관한 내용들이다. 코로나 이슈가 사회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잠식해버린 상황이다. 하루종일 코로나에 대한 이야기만 떠들어대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와 관련된 이슈들이 과연 그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가 그 정도의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그만큼 심각해야 하고 위험성이 높아야 한다. 위험성이 높다는 건 결국 치사율이 높아야 한다는 건데, 공교롭게도 코로나의 치사율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지금까지 코로나로 사망한 이들도 거의 전부가 기저질환을 갖고 있던 이들이다. 세월호와 같은 대형 참사에 대한 기억이 각인된 탓에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코로나 같은 유행성 바이러스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늘 존재해왔다. 단지 이번처럼 주목을 받거나 숫자로 집계되지 않았을 뿐이다.

교통사고 사망자가 나온다고 해서 전국의 차량 통행을 통제하진 않는다. 사망자가 발생한 건 분명 가벼운 일이 아니지만, 전국의 차량 운행을 막는 것은 그것과 별개의 가치를 지닌 일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나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해, 아니 더 정확히는 확진자 발생을 막기 위해 전반적인 사회적 동력을 감속시키는 것은 별개의 가치를 지닌 일이다.

이런 고민의 부재는 참담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마스크 5부제라는 듣도 보지도 못한 정책이 시행되고, 약국마다 무슨 맛집인냥 줄을 서서 마스크를 기다리고, 재난영화처럼 거리를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서로를 경계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까지는 웃지 못할 촌극,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 불황이 더 심각해지는 건 해프닝이라고 할 수 없다. 전자가 가벼운 찰과상이라면 후자는 치명상에 가깝다.

코로나에 대한 과잉 대응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자영업자들만이 아니다. 모두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소비가 줄어드는 건 전반적인 경기 침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기라는 건 분위기를 타기 마련인데, 사회가 코로나라는 악재에 매몰되어 있을수록 경기는 더욱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이미 위기설이 돌고 있고 코스피 같은 각종 지표들도 경보를 울리고 있다. 이런 흐름이라면 바이러스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보다 경기 침체로 자살을 택하는 이들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온 건 언론의 탓이 크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마치 시한부 판정이라도 된 것마냥 그 위험성을 과대포장하여 불안감을 높이고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페이지 노출수에 따라 광고 액수가 정해지는 인터넷상에서, 관심의 정도는 결국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의 선정적 행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확대재생산시키는 누리꾼들도 한 몫을 했다.) 대부분이 간과하고 있지만, 이번 사태로 가장 큰 혜택을 얻고 있는 건 언론이다. 그리고 그 언론의 자극적인 돈벌이에 놀아나는 건 파리 날리는 식당의 주인들만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 모두다.

'이단'이란 말의 뜻을 찾아보면, '자기가 믿는 이외의 종교',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주장이나 이론'이라고 나온다. 이단이라는 말이 제일 쉽게 쓰였던 시기는 중세였다. 당시는 모든 것이 기독교적 신의 섭리에 의해 정해져 있었다. 가장 교조적인 시대였다. 진리는 한 가지밖에 없었고, 그 외의 것들은 전부 이단이 되었으니까. 이단을 따르는 것으로 여겨지면 그 누구도 마녀사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단이란 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절대적 진리 혹은 주된 진리라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이단이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주변화하기 위한 절대성, 주류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그것을 상대적인 차이로 환원시키거나(모더니즘), 그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뿐이다(포스트모더니즘). 어느 쪽이든 이단이란 개념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신천지를 향한 혐오의 감정에는 격하게 공감한다. 다만 그 혐오를 근거로 신천지를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실 모든 종교는 비슷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절대자, 신자, 그리고 둘 사이에서 절대자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신자에게 전달하는 성직자, 교리, 성전. 신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기 위해 가짜 종교 행세를 하는 사이비 종교가 아닌 이상, 모든 종교는 내용만 다를 뿐 전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종교에 있어 정파와 시파라는 게 구분될 수 있다 한들, 사실 그 차이는 종이 한 장만큼의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향해 이단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론이든, 교단이든, 사법부든, 도지사든, 누군들 어떤 대상을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다. 아니,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말조차 틀린 의미일 수도 있다. 이단이란 개념이 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P.S. 이런 논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강조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pc는 사회적 편견을 경계한다. 주류는 편견을 재생산하고 그 편견으로 비주류를 차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편견을 깨고 차별을 없애는 건 pc운동의 핵심이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란 잣대를 특정한 영역에만 겨누고 그 외의 영역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건 결국은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이 아닐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