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다. 반면 김애란은 국내에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보다 김애란의 단편집을 좋아한다. 김애란의 단편집에 적힌 거의 모든 언어들에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가가 그려내는 배경 분위기나 인물의 어조 같은 것들을 내 머릿속에서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 건 작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같은 땅에서 태어나 같은 언어를 쓰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문학은 번역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것을 잃는다. 작가가 쓴 언어와 다른 언어로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나와 다른 언어권, 문화권에 살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보다 김애란의 작품을 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작가와 다른 언어권,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정서, 배경을 오롯이 이해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만들어진 문학작품을 일률적으로 줄 세운다는 건 사실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만든 '보편성'이라는 잣대에 모든 문화권을 맞추려고 하는 서구 비평가들의 자만일 뿐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았다고 한들, 내가 그 작품을 읽는 것과 영국인이 번역본을 읽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국내 작가 중 누군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한들, 그의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건 같은 땅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국내 독자들뿐이다.

최근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봤다. 북미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국내에서는 반응이 미적지근한 영화다. 60년대 후반 할리우드를 오마쥬하는 영화이다 보니 국내에서는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타란티노가 만들고 브래드 피트, 디카프리오가 열연한다 한들, 작품의 콘텍스트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재미는 반감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다.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엑시트'란 영화가 북미에서 상영된다고 한들, 북미 관객들이 그 작품이 갖고 있는 한국적 정서들을 제대로 읽을 수는 없다. 실내 가든 파티, 보습학원, 고깃집 환풍기, 헬스장, PC방, 해병대 등은 해외에서 이해하기 힘든 소재들이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쓴다. 스스로에게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아야만 열등감으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 혹은 노벨상, 올림픽 금메달 같은 것에 집착하는 것도 서구에 대해 갖고 있는 일종의 열등의식에 기인하고 있다.

더구나 문학은 일률적으로 성적을 매길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언제쯤 국내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을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문학을 잘 모르고 잘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 집착하는 이슈일 뿐이다. 노벨문학상을 누가 수상하든, 국내 문단에는 재능 있는 작가들이 계속해서 좋은 작품을 내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점에 가서 그 작품들을 구입하고 읽고 즐기는 것뿐이다.

남오여삼. 남자는 오십대, 여자는 삼십대.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남성 앵커는 오십대, 여성 앵커는 삼십대. 비유하자면, 남성 앵커는 연륜, 여성 앵커는 미모랄까. 최근에도 인권위에서인가 국회에서인가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는 보도를 봤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여성 앵커라고 해서 남성 앵커에 비해 능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김주하 같은 앵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방송국에서 여전히 남오여삼의 뉴스를 진행시키는 건 남존여비적인 관행이 답습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젠더 감수성’이란 ‘여혐’이라는 실체 없는 대상을 향할 때가 아니라 바로 이런 상황일 때 필요한 것이다.

‘골목식당’을 보면 백종원이 식당 메뉴를 줄이라고 조언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장사가 안 되는 식당일수록 불필요한 메뉴가 많기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을 못했던 것이다. 손님을 한 명이라도 더 잡고 싶은 마음에 메뉴를 하나둘 추가하다보니 결국 재료 관리도 안 되고 전문성도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장사가 잘 되는 식당일수록 간소한 메뉴를 갖고 있고, 특화된 음식 몇 가지만으로 많은 손님을 끄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을 잘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선택과 집중이다.

그런 점에서 ‘엑시트’는 본연의 색깔을 확실하게 한 영화다. 재난영화라는 기존의 장르를 코미디로 리듬감 있게 재해석했다. 그리고 그 외의 요소들, 그러니까 영웅담, 멜로, 신파는 과감히 배제했다. 선택과 집중을 했고 그 결과물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뷔페까지 와서 굳이 김밥을 찾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취향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보통 뷔페에 가는 건 육회처럼 평소 먹을 일이 없는 잔치음식을 맛보러 가는 게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엑시트’ 같은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건, 개연성으로 잘 짜여진 서사를 감상하러 가는 게 아니다. 그저 생각 없이 웃고 짜릿한 스릴을 느끼기 위해서 가는 것뿐이다. 그걸 모르는 이들에게는 영화 속 대사를 빌어 말해주고 싶다. “너 여기 왜 왔냐? 김밥천국이나 가지.”

판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관성'이다. 일관성이야말로 공정성을 담보해주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심판에게도 '스타일'이라는 게 있다. 심판의 스타일이 제각각이라고 해서 문제될 건 전혀 없다. 엄격한 잣대로 판단하는 심판이 있고 웬만하면 경기가 끊기지 않게 진행시키는 심판도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스타일이건 일관성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같은 상황이면 항상 같은 판단이 나오는 것, 그 일관성만 정확히 유지하면 선수와 팬들 모두 만족시킬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건 공이 팔에 맞았느냐 맞지 않았느냐 따지는 게 아니다. 공이 팔에 맞았다고 해서 무조건 핸드볼 파울을 선언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하면,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공격수들은 공으로 수비수 손만 맞추고 다닐 것이다. 그만큼 파울이라는 건 전체적인 상황과 맥락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하는 것이고, 당장 어떤 접촉이 있었다고 해서 파울이 성립되는 건 아니다. 따라서 VAR로 접촉의 유무를 현미경으로 보듯 심사하는 건 결코 판정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축구는 90분 내내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스포츠다. 그만큼 흐름이라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VAR은 그 흐름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VAR이 중시되면서 요상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특히 견딜 수 없는 건 골이 들어가는 순간 모두가 VAR의 눈치만을 보고 있는 장면이다. 이제는 아무리 멋진 골이 들어가도 그 골에 바로 환호할 수가 없게 되었다. VAR로 사후에 골 판정이 번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수든 관중이든 골이 들어갔을 때 그 골을 넣은 선수 또는 그의 세레모니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VAR과 심판의 눈치부터 살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VAR의 비중이 높아지다보면 언젠가부터는 우리 모두 골이 터진 직후의 그 흥분의 도가니탕을 맛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퍼포먼스를 끝내고 심판의 평점을 차분히 기다리는 체조나 다이빙 같은 스포츠처럼, 축구 또한 마찬가지로 골을 넣고도 체조선수들처럼 차분하게 심판의 선언을 기다려야만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축구 같은 스포츠에서 심판의 존재감은 작을수록 좋다. 정확한 판정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심판의 無존재감이다. 심판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을 감출수록 선수와 팬은 오롯이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심판들도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감추고 불가피한 순간에만 경기에 개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VAR은 그 노력과 완전히 반대되는 지점에 있다. 판정을 위해서 경기가 멈춰버리고 모두의 이목이 VAR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존재감의 문제가 아니라, VAR이 경기를 지배하고 결정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심도 경기의 일부다" 같은 케케묵은 말이 아니다. 오심은 경기의 일부여선 안 된다. 오심은 없을수록 좋다. 불합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축구라는 스포츠를 놓고 봤을 때, 흐름을 유지하는 것도 오심을 줄이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지금까지 크고 작은 오심은 늘 있어 왔지만, 그동안 축구라는 스포츠가 팬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전해주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단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 때문에 축구가 고유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걱정이 드는 건 사실이다.

프로스포츠 선수가 갖춰야 할 건 두 가지면 된다. 퍼포먼스와 팬서비스. 하지만 국내에서는 추신수의 사례처럼 한 가지가 더 요구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애국심’이라는 덕목인데, 특히 해외에서 활약 중인 선수일수록 이런 대중의 기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는 아직도 스포츠를 국위선양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류현진이나 손흥민이 해외에서 활약하는 건 한국이란 나라를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소위 말해 큰물에서 놀면서 더 뛰어난 선수가 되기 위해 해외에 진출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이 더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건 순전히 개인적 커리어를 위한 것이지, 어떤 공동체적인 사명을 가져서가 아니다. 팬들 입장에서는 이런 선수들이 해외에서 뛰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선수들 입장에서는 자국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행동, 마음가짐 같은 것에 신경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다. 그 선수가 실제로 한국이란 나라를 대표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냥 우연히 한국이란 국적을 가진 것뿐이다.

중요한 건 우연성이다. 류현진이나 손흥민이 한국 국적을 갖고 미국이나 영국에서 활약하게 된 건 우연한 결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영국의 스포츠팬들이 두 선수를 통해서 한국이란 나라를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 것 또한 자연스럽게 생겨난 현상일 뿐, 계획되고 의도된 결과는 아니다. 다시 말해, 선수 개인으로서는 본인의 성과를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우연히 그 외의 결과들이 수반된 것이다. 우연과 필연은 다르다. 우연성의 결과까지 책임을 지우는 건 가혹한 일이다.

스포츠는 국위선양의 수단이 아니다. 스포츠와 나라의 위상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스포츠는 그저 즐길거리일 뿐이다. 류현진이 사이영상을 수상한다고 해서 한국이란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단지 한국야구에 대한 현지 팬들의 관심 정도만 생길 뿐이다. 다만, 그것으로 선수 개인에게 공동체적인 책임이나 의무 같은 걸 기대할 수는 없다. 선수 개인에겐 나라를 대표할 어떤 권리나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능력 발휘를 위해 노력하면 그만이다. 팬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활약을 보고 즐기면 그만이다. 그 이상은 서로에게 기대할 것도 빚질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추신수 아들의 국적 선택에 대한 논란은 의미 없는 논쟁이다. 미국 시민권을 따든 국내에 들어와 군대를 가든 우리가 신경을 쓸 일도 아니고 감정소모를 할 일도 아니다. 다만, 논란에 대해 해명하기 위하여 인터뷰에서 본인이 그동안 한국을 알리려는 마음으로 야구에 임해왔다고 이야기한 건 부적절했던 것 같다. 설령 진심으로 그런 마음가짐을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건 개인적 태도에 불과한 것일 뿐, 그건 누군가에게 강요받거나 인정받기를 원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