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무대를 비춘다. 무대는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무대는 방송국이라는 전체 공간에서 극히 일부만을 차지한다. 무대의 반대편에는 수많은 카메라와 스탭이 있고 그 이면에는 대기실, 분장실, 편집실 등 다양한 공간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항상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무대일 뿐이다.

무대에서 쇼가 보여지기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드라마의 경우에는 배우들이 대본을 외우고 연기를 연습하고 만들어진 세트에서 연기를 하고 그것을 촬영을 해서 녹화하고 편집하는 과정을 거친다. 예능이나 뉴스도 마찬가지다. TV에 송출되는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송출되는 시간보다 몇 배 혹은 수십 배의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TV에는 아이돌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어떻게 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아이돌이지만, 사실 TV는 아이돌 자체만을 비출 뿐, 그 아이돌이 있기까지의 이면을 비추지는 않는다. 이 아이돌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수많은 연습생들의 실패나, 데뷔까지 오랜 시간 연습하고 땀을 흘려야 했던 인고의 시간들은 절대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절망스런 과정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밝은 결과만을 비춰주는 거다.

TV라는 건 빙산의 일각만을, 아니 빙산의 일각의 일각의 일각만을 비춰준다. 아름답고 멋있고 좋아 보이는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는 거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또는 습관적으로 그것을 본다.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스마트폰을 통해 보고, 컴퓨터나 노트북으로도 본다. 사실 TV에서 비춰주는 빙산의 일각은 세상에서 굉장히 특별한 일부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매시간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거나 가장 멋있는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SNS에 올리는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다. 사람들이 유명한 여행지에 가거나 예쁜 카페에 가서 찍은 사진들은 정지우가 말하는 ‘상향평준화된 이미지’다. 이런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림으로써 TV로 보던 이미지처럼 본인의 삶도 그런 이미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스스로 위안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나르시시즘적인 도취는 찰나의 만족감만을 가져다줄 뿐이다. 삶은 TV와 다르기 때문이다. TV에서는 24시간 빙산의 일각만을 보여주지만, 실제 개인의 삶은 빙산의 일각 이면의 감춰진 영역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SNS에서의 ‘나’는 아름다운 장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힙한 사람으로 전시되지만, 실재하는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집에서 가사를 돌보면서 보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 삶의 모습 또한 TV가 그리고 있는 이미지에 맞춰져야 한다는 강박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반복적이고 지루한 시간들을 견디는 건 점점 더 힘든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좋든 싫든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빙산의 일각이 아니라 감춰진 영역에서 살아야 한다. TV에서 보여주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따분한 일상을 살아야 한다. 따라서 일상 안에서 삶의 의미나 만족을 찾지 못하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하루키의 ‘소확행’처럼 평범한 삶 속에서도 나름의 소시민적인 행복을 탐색해야 하는 거다.

TV도 없고 인터넷도 없었던 과거였다면 달랐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빙산의 일각만이 비춰지는 세상이고 그 이미지들은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범람하고 있다. 거실의 TV에서도 책상의 컴퓨터에서도 그리고 구석구석을 점령한 소비 광고에서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끊임없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미지와 현실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온전한 내 삶을 되찾는 건 점점 더 힘든 시도가 될 것이다.

기계는 실수하지 않는다. 프로그래밍 된 알고리즘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차가 인간이 운전하는 차보다 안전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알고리즘에 오차라는 건 실재하지 않는 결과값에 불과하다.

하지만 돌발적인 변수 앞에서까지 기계가 인간보다 잘 대처할 거라고 확신하긴 힘들다. 위험하고 긴박한 상황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본능이란 건 인류가 수만 년 동안 생존을 위해 축적해온 값비싼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 정보를 위해 수많은 목숨이 수업료로 지불됐다.) 따라서 알고리즘이 본능보다 더 적절한 대처능력을 갖추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도 의문일 뿐더러,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자율주행이 보편화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운전대를 잡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인간이야말로 도로 위에서 가장 크고 많은 변수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직접 운전하는 차가 없고 모든 차가 자율주행차로만 이루어진다면 이론적으로 변수가 발생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워진다. 결국 인간은 운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운전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이다. 운전을 하고 싶을 때마저도 운전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생존에 필요한 알약이 나와서 이 알약만 먹어도 영양분 섭취가 충분히 이루어지는 상황이 온다고 한들, 그것 때문에 요리 자체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요리만 하지 않더라도 설거지나 쓰레기 처리 같은 지긋지긋한 가사노동에서 해방될 수 있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의 행복과 요리하는 행위 자체가 주는 즐거움 또한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운전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큰 돈을 지출해서 자가용을 사는 건 단순히 이동수단으로서의 기능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운전대를 잡는 즐거움, 운전하는 재미도 고려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출퇴근할 때만 운전을 하는 건 아니다. 여행을 가거나 놀러갈 때도 운전을 하고, 순전히 운전을 즐기기 위해 드라이브를 할 때도 있다.

여기에 자율주행의 딜레마가 있다. 안전한 자율주행을 위해선 인간을 운전으로부터 추방시켜야 하지만, 인간에게는 운전하는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자율주행에 대한 신화적인 믿음은 모든 사물을 기능으로 보는 유물론적 관점에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었다고 해서 손목시계가 사라지고 있지 않고 전자책이 나왔다고 해서 종이책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기술이란 건 정치적, 사회적인 맥락에 따라 육성되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한다. 기술의 속도대로 세상이 변하는 건 아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한대로 세상의 속도대로 기술이 변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동차의 자율주행 시대가 코앞에 온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사이드미러 하나를 없애는 데에도 수십 년이 걸리고 있는 게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기안84의 웹툰이 여성혐오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다. 여성혐오가 맞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기 때문이다. 웹툰은 영화, 문학 같은 창작물이다. 그것도 도덕적 규범에서 비교적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B급 창작물. 이런 창작물에 특정 부류에 대한 혐오적 표현이 함의되어 있다고 해서 그 표현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면, 전 세계의 모든 창작물들은 전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만든 작품에서 누구를 조롱하든 혐오하든 그것은 창작자의 마음이고 자유다. 그것을 넣어라 빼라 말할 수 있는 자격은 오로지 창작자에게만 있다. 대신 다른 이들은 그 작품 자체에 대해 마음껏 논할 수 있다. 비판할 수도 있고 폄하할 수도 있고 욕할 수도 있다. 창작자에게는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자유가 있고, 보는 이들은 이를 마음대로 평가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권리이지만, 그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우리 선배들이 독재정권과 맞선 시간이 수십 년이고 인류가 권위주의와 맞선 시간이 수 세기다. 하지만 일부 여성들은 단지 불쾌한 감정이 든다는 이유로 그 피비린내 나는 긴 시간을 무의미하게 되돌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는 부자와 빈자 모두를 혐오하는 비유가 가득하다. 제목부터 빼박이다. 그래서 만약에 (실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가사도우미협회 같은 단체에서 본인들에 대한 혐오적 표현을 이유로 상영관에서 영화를 내려달라고 요구한다면, 또 전경련 같은 곳에서 기업인에 대한 불쾌한 표현을 이유로 마찬가지의 요구를 한다면, ‘기생충’의 상영을 중지시켜야 함이 맞는 것일까.

매체나 맥락, 형식과 내용에 상관없이 여성 혐오적인 표현을 무조건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이는 건 페미니즘이 스스로를 성역화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평등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또다른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페미니즘은 소수의 여성들만 공유할 수 있는 자기 위안의 담론이 아니다. 교조화 되는 건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밀려나게 만들면서 페미니즘 본연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꼰대가 되는 게 아니라 꼰대를 없애는 데 있다.

드레스코드는 시대적으로 간소화되어왔다. 어떤 옷을 입느냐는 과거엔 신분에 따라 정해져 있기도 했고 직업에 따라 정해져 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TPO와 같이 상황에만 맞게 입으면 되는 분위기다. 요즘 출근길을 보면 ‘샐러리맨=정장차림’이란 공식도 많이 깨진 것 같다. 미팅이나 공식행사가 아니면 민간 기업들의 드레스코드도 한층 여유로워졌기 때문이다.

다만 여전히 엄격한 기준을 유지하는 곳도 많다. 어떤 옷을 입느냐는 사실 모든 류의 매너가 그렇듯 스스로를 높여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힘을 행사하는 집단일수록 엄격한 드레스코드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검찰이나 법원에서 공권력 행사 주체로서의 권위를 위해 주로 어두운 색 정장을 입거나 조폭들이 조직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검은 정장을 맞춰 입는 것처럼.

하지만 의회라는 곳은 좀 다르다. 의회는 공권력을 행사하는 기구가 아니다. 대국민보다는 대정부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공화제에서 의회는 민의 대리자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회는 권위적일 필요가 없는 곳이다. 오히려 탈권위적이어야 한다. 자유롭고 개방적일수록 바람직하다. 그래야 의회의 본질적인 기능인 토론과 민의수렴이 활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의회에서 격식을 따지는 건 의원들이 신분에 따라 가발을 쓰고 회의에 참석하던(영국의 법관은 지금도 가발을 쓰고 판결을 한다) 영국 같은 나라에서나 의미를 가질 뿐이다. 절대 왕정의 공백을 귀족들의 의회로 대신하던 역사적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품격이나 권위를 우리의 국회에도 동일하게 적용시키려는 건 의회라는 제도의 역사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 의회정치에 있어 자주 언급되어 온 건 대표성에 관한 문제점이다. 사회에는 다양한 사람들과 이해관계가 존재하지만 정작 그것을 대변해야 하는 국회는 법조계처럼 일부 직업군의 중년 남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분단 현실로 인해 국회는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해왔고, 이는 필연적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초래했던 것이다. 튀는 것을 참지 못하는 꼰대들에게 필요한 건 격식이 아니라 파격이다. 그래야만 국회가 사회의 다양성, 이질성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류호정의 원피스는 정의당의 말마따나 여느 여성의 출근차림에 불과했다. 핫팬츠나 레깅스도 아니었고, 20대 여성을 대변하는 의원으로서 충분히 입을 수 있는 수준의 차림이었다. 이번 논란은 사실 상황보다는 인물에 초첨이 맞춰져 있다. 옷차림보다는 정의당과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당사자가 류호정이 아니라 다른 의원이었다면 애초에 논란이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류호정이 정의당 1번에 어울리는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을 거둘 수 없지만, 자의든 타의든 국회 내에서 이런 논의가 터져나오게 했다는 건 의미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도발적인 이슈를 이끌어내는 것도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