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이 박해수를 만난 순간부터 영화가 갈 길은 정해진다. 그 이후부터는 변명만 남는다. 왜 그 길로 가야만 하는지. 수리남이라는 배경과 기시감 어린 캐릭터들은 단지 그 길을 위해 소모될 뿐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되는 건지 설명해주는 느낌.
윤종빈이 공작에서 선보인 서스펜스는 수리남에서도 자기복제된다. 공작에서의 언더커버가 황정민이었다면 수리남에서는 하정우가 그 역할을 맡는다. 절대권력자를 동요시켜야 하는 언더커버의 페이소스가 반복될 뿐.
물론 변명과 자기복제를 좇는 것만으로도 6시간은 금세 지나가버린다. 그만큼 재밌고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다(영화든 시리즈든 일단 재밌고 봐야 한다). 하지만 물 만난 고기, 아니 넷플릭스를 만난 윤종빈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 윤종빈처럼 젊은 천재형 감독이 벌써 자기복제를 하거나 쉬어가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직무유기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인권을 가진다는 명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구든’이란 전제이다. 만약 ‘누구든’이 아니라 일부만 인권을 가진다고 한다면 사실상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인권 같은 기본권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정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기본권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일부만 그것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건 차별주의자의 논리이다. 예를 들어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할 수 있었던 건 흑인들에겐 아무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권이 일부에게만 인정된다는 인식을 가지는 순간 인권은 부정되고 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물권이라는 개념도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인정될 때 의미를 갖는다. 동물권을 선별적으로 인정하는 건 모순이다. 특정 동물의 생명은 소중하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다른 동물의 생명을 외면하는 건 일종의 차별이기 때문이다. 동물권을 이야기할 땐 반드시 그것이 모든 동물의 권리임을 전제해야 한다.
인권이 모든 인간들의 권리인 것처럼 동물권도 모든 동물의 권리여야 하는 것이다. (소나 돼지처럼 식용 가축들은 생태계 먹이사슬로 치부하더라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낚시하는 손맛을 위해 물고기를 죽이기도 하고 심지어 개체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멧돼지를 사냥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동물권을 이야기하는 이들 중에 낚시나 멧돼지 포획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동물보호론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기만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백인우월주의자들처럼 인권을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일부 인종의 전유물로 보는 이들을 인권주의자로 볼 수 없듯이 동물권을 특정 동물에게만 적용시키는 이들도 진정한 의미에서 동물보호론자들이라 하기 어렵다.
동물보호란 개념에서 논리를 들어내면 남는 건 취향과 기호의 문제가 된다. 가치나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귀여움'이나 '가여움'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동물은 존재만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설득할 게 아니라 차라리 학대 당하는 동물이 가엾지 않냐고 호소하는 편이 나을 수 있다. 논리적 허영심이 아니라 감정적인 호소만으로도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엔 충분할 것이다.
동물보호론자들의 활동은 ‘동물보호’가 아니라 ‘반려동물보호’에 가깝다. 인권주의자이기보다는 차별주의자에 가깝다. 따라서 근거 없는 도덕적 우월감을 내려놓고 차라리 솔직해지는 게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보다 진솔한 사람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386세대(지금은 586이 되었지만)가 저항세대가 아닌 기성세대의 지위로 등극한 순간, 그들의 요란한 목소리 안쪽에서는 얼마나 공허한 울림만이 있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이 노래하던 낭만적인 담론의 핵심엔 앙상한 안티테제만 남아있던 것이다. 자부심을 가졌던 저항의 기억은 그들에게 훈장인 동시에 족쇄였던 셈이다.
그들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능력과는 얼마나 유리된 세대였는지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치 야구해설가가 갑자기 배트를 쥐고 타석에 선 것처럼, 냉철하고 능숙한 판단이 필요한 현실세계에서도 그저 허울 좋은 이상과 이론만을 좇을 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윗세대를 부정하고 증오하는 사이 스스로가 윗세대를 닮아버렸다는 점에 있다. 니체의 말대로 오랫동안 심연을 보다보니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윗세대로부터 형식적 민주주의를 쟁취했을지 몰라도 그 안의 내용적 모순은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다.
산업화세대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그에 대한 부작용을 필요악으로 치부했던 것처럼, 386세대도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한 주변적인 희생과 일탈을 불가피한 과정으로 여겼다. 각자의 지향점은 달랐을지 몰라도 방법론에 있어서는 똑같이 파쇼적이었다.
꼰대의 핵심은 본인이 꼰대인지 몰라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런 면에 있어서 386세대는 꼰대의 전형이다. 그들은 주로 윗세대와의 비교우위를 통해 스스로를 차별화시키지만, 아랫세대들이 봤을 땐 같은 꼰대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꼰대는 내로남불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선민의식 탓에 내가 하는 건 전부 아름다운 로맨스로 자각하지만, 남들에게는 똑같은 불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최근 들어 386세대라는 안티테제의 안티테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윤석열이라는 인물로 현상화되고 있는데, 그는 압도적인 지지율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가 어떤 가치관과 이념을 갖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윤석열의 스탠스는 안티 문재인(혹은 386)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는 법치주의의 회복을 얘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보기엔 빈약할 따름이다.
안티테제의 맹점은 테제가 사라지는 순간 드러난다. 안티 문재인의 한계는 정권이 교체되는 순간 모든 목적이 상실된다는 점에 있다. 386세대가 집권 후 스스로의 무능을 드러낸 것처럼, 그리고 프랑스혁명이 정치적 진공상태를 낳았던 것처럼, 안티테제의 집권은 익숙한 공허함만을 드러낼 것이다.
사형제가 필요한 건 정의를 위해서다. 다른 이유는 필요없다. 그럼에도 예방, 격리효과, 비용 등 주변적인 논리를 끌어오다보니 오히려 설득력이 상쇄되고 마는 것이다. 정의의 본질에 관한 문제에 사회과학이나 공리주의적 잣대를 들이미는 건 구차한 작업이다. 사형제도를 논하는 데 우선되어야 할 건 정의라는 개념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도덕철학자들이 밤새 토론해도 정리하기 힘든 문제다.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교집합의 영역은 엄연히 존재한다. 보편적으로 말하는 정의란 바로 이 부분을 의미하며, 사람들은 이를 토대로 정의로운지 여부를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만약 죄를 저지른 사람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있고, 반대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세상이 있다면, 누구든 전자보다 후자가 정의에 가까운 세상이라고 말하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응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 이걸 정의라고 여기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응보란 가장 쉽고 가장 확실한 정의의 개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형제가 폐지된다면 ‘생명은 존엄하다.’는 명제는 선언적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생명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그 누구도 이를 빼앗을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도 살인자를 버젓이 살려둔다는 건 일종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모순을 안고도 사회가 유지된다는 건 누군가 그 불균형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 경우 희생되는 건 살인의 피해자다. 죽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억울한데 알량한 계몽주의 탓에 두 번 희생되는 것이다.
살인의 가장 정당한 대가는 가해자의 생명을 몰수하는 것이다. 공권력을 두고 폭력이라 하지 않는 것처럼 사형제를 두고 살인이라 할 수 없다. 사형은 국가가 정의를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가족들이 가해자에게 몰려가서 돌팔매질을 하는 사적 제재와 최고형을 언도받은 범죄자에게 국가가 집행하는 사형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가 뜨거운 분노의 복수라면 후자는 차갑고 무정한 균형 맞추기이다.
사형제를 폐지하는 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다. 정의가 훼손된 상황을 방기하겠다는 것이다. 본인 손에 피를 묻히려 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바로잡기 위해 국가라는 초월적 존재를 만들어 놓고도 굳이 사형 집행을 막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원래 옳은 길을 가는 건 불편하고 어려운 법이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안일함으로는 정의든 뭐든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영화에서 서복은 말한다.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었어요,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무언가가.” 하지만 이 대사의 화자는 서복이 아니라 영화 자체인 것 같다. 영화가 관객에게 하는 변명으로 들린다. 끝내 무언가가 되지 못하고 죽어버린 서복처럼 이 작품도 의미를 찾기 전에 자폭하고 말기 때문이다.
영화는 삶과 죽음, 실험체 윤리, 인류의 영생, 국가윤리, 양심과 탐욕 등 SF 장르가 다룰 수 있는 소재는 거의 전부 건드려 놓는다. 그리고 수습이 되지 않자 모든 인물을 한 곳에 모아 폭발시킨다. 그리고 서복마저 없애버린다. 장황한 세계관치고는 무책임한 결말이다. 가장 손쉬운 마무리니까.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방식도 투박한 편이다. 복제인간에 관한 철학적 고민을 영화 속 인물이 전부 이야기해버린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여운이 없다. 영화를 본 후 관객의 머리에 남아야 할 질문들을 인물의 대사가 직접 말해버리기 때문이다.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영생은 무엇을 가져올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직접적인 대사가 아니라 메타포로 그려져야 한다. 영화의 서사, 인물, 이미지, 분위기는 그 메타포를 위해 쌓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게감은 작품의 깊이를 만든다. 좋은 작품을 본 후의 묵직한 뒷맛은 여기서 오는 거다.
예를 들어 ‘기생충’에서는 “가난하다는 게 어떤 의미야?”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가난을 “가끔 지하철 타다 보면 나는 그런 냄새”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영원하다는 건 어떤 거야?”, “죽는다는 건 어떤 거야?” 같은 대사보다 이에 대한 독창적인 비유가 있어야 했다.
감독이 밝힌 것처럼 이 작품의 키워드가 두려움이었다면, 영생이 왜 두려운 미래인지에 대한 메타포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매일 골수를 뽑는 서복의 고통은 영화적인 설정일 뿐 영생이 두려운 이유를 비유하진 못한다. 두려움은 서복을 제거하려고 하는 악역들의 명분으로 소모될 뿐이다.
메타포가 부재한 SF물에는 화려한 클리세만 남는다. 감독의 담백한 연출이 되레 진부하게 다가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건 배우의 연기인데, 그나마도 인상적인 편은 아니었다. 박보검의 순진무구한 복제인간 연기는 ‘응답하라1988’의 기시감을 벗어나지 못했다.
복제인간이란 고작 히어로를 만드는 데 써먹을 소재가 아니다. 이왕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면 보다 깊은 고민을 다뤘어야 했다. SF라고 해서 반드시 장황한 설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작고 사소한 내러티브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방대한 세계관일수록 개연성과 흡인력은 옅어지기 마련이다. 스케일의 강박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비유로 미래를 그려내는 상상력, 국내 SF 장르에서 필요한 건 이런 게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