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FO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다는 점이다. 사법부의 판결문이라도 읽는 듯한 기시감이 들지만, 그 이상 UFO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건 없다. 다만 이건 아직 드러난 게 없는 것일 뿐, 어느 쪽으로든 확실한 답이 있을 수밖에 없는 명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그나마 진리에 가까울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는데, 나는 후자가 그것에 가깝다고 보는 편이다.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건 인간의 근대적인 습성일 뿐이다. 불과 몇 백 년 전만 해도 인간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은 거의 없었다. 경험적으로 체득하거나 그냥 그렇다고 믿을 뿐이었다. 근대과학이란 미명하에 많은 부분이 과학적 인과관계로 설명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성을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역시 하나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UFO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UFO나 외계 생명체를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인간이 갖고 있는 기술 수준에서 우주, 그것도 지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시공간을 탐색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마치 플랑크톤이 고래를 하나의 개체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외계 생명체는 우리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광활한 차원의 존재일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차원의 존재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UFO의 크기가 비행기와 유사하고 외계인의 생김새마저 팔, 다리, 눈 두개의 인간을 닮아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으로 외계 생명체를 상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실제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나사가 밝혀낸 슈퍼박테리아(그나마도 지구에서 발견된 것이지만)처럼 인간이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생명의 질서를 완전히 벗어난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발견된 외계인이 SF영화에서처럼 E.T.의 생김새라면 외계 생명체라기보다 차라리 인류의 조상이거나 후손이 아닌지 의심해보는 게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UFO의 존재 가능성을 믿는 것이 (윗분들의 말대로 사회 혼란을 부추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우주에 대한 상상력을 굳이 이성의 한계 안으로 가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UFO 출현 영상을 보면서 조소의 눈빛으로 "이건 합성이야", "이건 빛이 왜곡된거야", "이건 먼지가 찍힌 거야"라고 단정하는 건 무수한 가능성을 좁은 앎의 영역으로 구겨넣는 것이나 다름없다. 차라리 이문세의 노래 가사처럼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두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인간은 상상하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 해설가를 영어권에서는 코멘터(commenter)라고 한다. 말 그대로 코멘트를 하는 사람이다. 중계방송에서 코멘터를 두는 이유는 경기를 재밌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캐스터는 객관적인 상황만을 전달해줄 뿐이지만, 코멘터는 지금 상황이 왜 흥미로운지를 이야기해준다. 그래서 구수한 코멘터가 있으면 장장 서너 시간의 야구 중계도 지루할 틈이 없다.

인터넷 기사에서는 댓글을 다는 사람이 코멘터가 된다.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가 캐스터가 되고 댓글을 다는 사람이 코멘터가 되는 것이다. 기사가 객관적인 사실을 보도해주는 것이라면 댓글에서는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달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날 야구에서 어느 팀이 다른 팀을 이겼다는 기사가 실리면 댓글에서는 누구 덕분에 이겼는지 또는 누구 때문에 지게 됐는지 각자의 평을 다는 것이다.

댓글 중 대부분은 소소한 관전평 정도였지만, 간혹 넷상에 묻혀있던 재야의 고수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축구나 야구 평론을 전공으로 비유한다면, 박사 학위 정도는 가볍게 땄을 법한 고수들이 메이저 방송사의 해설진들도 갖추기 힘든 식견을 보여줬던 것이다. 인터넷 뉴스라는 콘텐츠를 풍성하고 흥미롭게 만드는 데에는 사실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보다 이들의 역할이 컸다.

또 어떤 이들은 개그맨이나 카피라이터 못지 않은 창작능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기사 내용을 희화화하거나 패러디해서 굉장한 유머를 구사하거나 밈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사무실에서 뉴스를 보다가 터지는 ‘풉’ 소리를 참아야 할 정도로.

저질 댓글이 많았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댓글창 폐쇄라는 극약처방으로 이어져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실제 경기장에서도 선수를 향해 고함을 지르거나 욕을 하는 사람은 쉽게 볼 수 있지만, 그들 때문에 팬들의 입장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소수 악플러들의 행태를 이유로 댓글창을 닫아버리는 건 나머지 다수에게는 너무 가혹한 처방이다.

인터넷이라는 건 원래 다양한 인간들이 집합하는 공간이다. 때문에 뉴스 댓글도 각양각색이다. 진중하고 차분한 글을 남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악의적인 조롱만을 남기는 관심종자도 있다. 지상파 방송도 시청자 기대 수준을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에 맞출 뿐이다. 인터넷에서 어떤 수준 이상을 요구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걸 기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깨끗한 댓글만 달리기를 기대하는 건 결벽증적인 집착이 아닐까 싶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걸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욕설과 비하가 난무한다 해도 그냥 무시해버리면 된다. 댓글창 자체를 폐쇄해버리는 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고, 그 덕에 오늘도 간이 안 된 국물처럼 밍밍한 뉴스를 훅훅 넘기게 된 것이다.

본토의 힙합은 백인 주류문화라는 타겟이 있었지만, 국내 힙합은 타겟이라고 할 만한 대상이 없었다. 레이시즘 같은 건 그저 먼 나라의 얘기에 불과했으니까. 대신 국내 힙합은 사회 전반을 타겟으로 삼았다. 제도권의 권위주의나 물신주의, 꼰대정신 같은 것들이 힙합의 재료가 된 것이다.

1020은 제도권의 외부에서 그것을 디스할 뿐이다. 아직 제도권으로 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3040은 제도권 안에 있다. 사회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세대다. 그래서 제도권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도권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하다. 제도권 사회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완충장치 없이 세상의 풍파를 직격으로 맞는 것이다.

사회적인 목소리는 20대의 대학생들이 더 크게 낼지 몰라도 사회의 부조리를 직접 체감하는 건 3040이다. 단지 20대처럼 분노하고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3040은 가족도 생각해야 하고 직장도 계속 다녀야 하고 주변의 눈치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가진 게 많아진 사람은 그만큼 잃을 것도 많아지고, 잃을 게 많으면 매사 조심스러워지는 게 세상의 이치인 것처럼.

자유를 갈망하는 건 1020만이 아니다. 어쩌면 3040이 더 간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세상을 비뚤게 보고, 얽매이지 않으려 하고,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힙합은 1020보다 3040에 어울리는 장르일 수도 있다.

개신교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닮아 있다. 자존감 낮은 사람이 인정욕구에 집착해서 조급하게 자신을 어필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개신교도 공격적인 전도활동을 벌인다. 거리에서 물티슈를 나눠주기도 하고 때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협박하기도 한다. 이렇게 외부에 자신을 보이려고 하는 건 둘 다 외부로부터의 인정 혹은 외연적인 확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존감 낮은 사람은 타인의 이야기를 수용하기보다 자기 주장만을 고집한다. 내적인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외부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여유가 부족한 것이다. 종교 중에 가장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경향이 강한 건 개신교이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종교적 수준을 넘어 이제 정치 영역까지 영향을 끼치려 하고 있다.

자존감 낮은 사람은 명품 소비를 통해 부족한 내적 자신감을 대신하려 한다. 개신교 교회들도 호화로운 성전을 건설하거나 양적인 성장을 통해 부족한 정통성을 메우려 한다. 요즘 새로 지어지는 대형 교회의 건물만 봐도 이들의 관심이 사회적 약자보다 교세 과시에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가톨릭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을 닮아 있다. 자존감 높은 사람은 인정투쟁에 매달리지 않는다. 타인의 인정보다 내적인 자아실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톨릭에도 전도활동은 존재하지만 개신교처럼 요란하지 않다. 기존 성도의 신실한 신앙생활 자체가 하나의 본보기로서 전도활동이 된다고 보기도 한다.

자존감 높은 사람은 타인의 의견에 쿨한 태도를 가진다. 쓸데없는 자존심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타인의 의견이 타당하면 그것을 받아들여 더 나은 방향을 찾을 뿐이다. 가톨릭은 유일신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과학 담론이나 종교간 상생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그만이 갖고 있는 나름의 가치와 역할, 그리고 오랜 역사의 전통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성역화하여 납세를 회피하는 종교가 대부분이지만 가톨릭은 자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여 세속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도 자존감 높은 사람의 성품을 닮아 있는 것 같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온라인 소통이 활발해지면서 노사모, 박사모 같은 정치인 팬덤이 형성되었다. 연예인의 팬들이 팬카페라는 집단을 형성해서 팬덤문화를 소비하듯이 정치인의 지지자들도 그룹화되어 상상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일종의 새로운 공적 참여로 인식되었다. 투표로만 권리를 행사했던 수동적 유권자들이 이제는 누구의 지지자임을 당당히 밝히고 주체적으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정치를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인식하던 기존의 관념을 타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라인상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해지면서 일상적으로도 누구나 공적인 참여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예를 들어 출근길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다가 댓글을 다는 것만으로도 여론을 형성하는 데 일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적인 참여가 일반화되면서 정치 팬덤문화는 선구자적 지위를 잃었고 순기능적인 역할보다는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정치적 무관심을 가속화시킨다는 점에서 오히려 하나의 병리적인 현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정치라는 건 가치 판단을 통해 한정된 자원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다. 정치가 어려운 건 각자의 가치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나 각자의 입장과 가치관과 인생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세상사에 대해 동일한 가치 판단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며, 한 사람의 가치 판단이 다른 모든 이를 만족시킬 수도 없는 법이다.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건 한쪽이 이익을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한쪽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아무리 훌륭한 정치인이라 하더라도 플라톤의 철인 같은 존재가 아닌 이상 공과 실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특정 정치인을 덮어놓고 지지하는 것은 민주적인 지지가 아니라 맹목적인 우상화에 가깝다.

건전한 정치에 있어 비판과 견제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며, 만약 이것이 결여된다면 토론이 실종된 진영논리에만 함몰되기 마련이다. 외부를 정상적으로 인지하지 못하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에 비유하면서 박근혜를 신격화하는 태극기부대는 그 전형적인 예이고, 수준 차이만 있을 뿐 대깨문이나 문빠라 불리는 이들도 마찬가지의 특성을 갖고 있다.

또 정치 팬덤문화는 정치인에게 연예인의 역할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부작용을 갖고 있다. 연예인은 대중에게 행복과 감동을 주는 존재이지만, 정치인은 그들처럼 행복과 감동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실망과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가 많다. 시민들이 정치인에게 요구하는 건 순결무구한 봉사정신이지만, 정치인에게 정치라는 건 권력욕이라는 개인적 동기를 원동력으로 하는 집권투쟁의 장에 가깝다. 현실 정치가 사회적 요구로부터 이반되는 건 이 때문이다. 두 목적 가치가 합치되기보다는 상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치는 시민에게 기대보다 실망을 안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정치인에게 연예인처럼 긍정적인 피드백만을 바라는 건 정치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이고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만 양산해낼 뿐이다.

백화점에서 삐까번쩍한 신상을 고를 때와 중고마켓에서 그나마 괜찮은 중고품을 고를 때의 마음가짐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인을 팬덤으로 소비하려는 건 중고마켓에서 신상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상을 기대하는 눈으로 중고품을 둘러보다보면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기 마련이다. 정치 무관심은 여기서 비롯된다. 실망하고 실망하면서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모든 시민은 중고품 중 반드시 하나를 골라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그들이 무관심할수록 골라야 하는 중고품 상태는 최악의 품질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TV에서 가덕신공항 광고를 봤다. 기존 김해공항을 확장하는 것보다 가덕도에 신공항을 만드는 게 낫다는 걸 강조하는 내용이었는데, 처음에는 이런 광고도 있구나 하고 신기하게 봤지만 먼 동네의 이야기라 이내 무관심해졌다. 단지 상업광고도 아니고 공익광고도 아니고 이런 것도 광고를 하는 구나 하는 생소함 덕분에 이렇게 언급할 수 있을 정도의 기억으로만 남겨졌을 뿐이다.

한편으로는 공항 건설이 불러일으키는 막대한 파급력을 생각해보면 지자체가 치열한 유치 경쟁을 벌이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한다. 예상되는 경제 효과가 뻔히 보이는데 점잔빼고 있을 수만은 없을테니까. 아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총력을 기울일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공중파 광고도 못할 건 없다.

하지만 동해/일본해에 대한 다툼은 실체 없는 싸움일 뿐이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듯 국제표준상으로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된다고 해서 그 해역에 있는 독도가 일본땅이 되는 건 아니다. 대마도가 대한해협에 있다고 한국땅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이들 주장으로는) 이미 국제문서의 97%가 일본해로 표기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독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이 위협받은 적이 있던 것도 아니다. 국외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일말의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중에 걸프만을 ‘페르시아만’으로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아라비아만’으로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사자들이야 열을 올리든 말든, 이런 바쁜 세상에 먼 바다의 지명 분쟁까지 신경쓸 여력도 흥미도 없기 때문이다. 편의상 어느 쪽이든 표준으로 정해지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다.

바꾸어 봐도 똑같다. 우리나 일본이 동해를 두고 치열한 외교전을 벌인다 해도 두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실상이다. 외부인들에게 당사자들의 주장은 그저 소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 동해가 ‘동해’나 ‘일본해’로 불려야 하는 당위는 당사자들에게만 있을 뿐이다. 이를 외부인들에게까지 강요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미국을 USA가 아니라 ‘미국’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들이 동해를 어떻게 부르든 그건 그들 마음이다.

국제표준이 ‘일본해’가 되었다고 해서 ‘동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국외에서 어떻게 부르든 우리가 ‘동해’라고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동해를 ‘동해’로 부르는 이상 ‘동해’가 사라질 일은 없다. 걸프만을 ‘걸프만’으로 부른다고 해서 ‘페르시아만’이나 ‘아라바이만’이 사라지는 게 아닌 것처럼.

동해가 ‘동해’가 된다고 해서 국가의 자존심이 세워지는 것도 아니다. 국격은 국가가 자국민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지 외부로 보여지는 것에 따라 평가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관심 없는 문제에 대해 우리의 주장을 강요하려 할 수록 스스로가 자존감 낮은 국가라는 사실을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건 외부로부터 인정 받고자 하는 열등감의 한 양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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