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이라 불리는 영화일수록 영화를 단순히 보는 느낌 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읽는 느낌이 강하다. 마치 책을 읽는 느낌이다. 영화는 관객의 상상력을 제한한다.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장면, 장면과 스토리의 울타리 안에서 관객들은 영화를 받아들일 뿐이다. 최근 개봉되고 있는 화려하고 빠른 전개의 영화들, 물론 이런 영화들처럼 역동적이고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영화는 없겠지만 진정 영화를 음미하는 시간, 마음 속으로 영화 속 주인공도 되어보면서 충분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시간을 갖기엔 너무나 속도감이 넘친다.

반면 책은 다르다. 책은 영화처럼 구체적이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오히려 독자들을 매료시킨다. 책과 소설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툭툭 소스만 던져주고 있을 뿐, 그 소스를 가지고 가슴과 머리로 진정한 스토리를 엮어나가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보고 있는 것은 깨알 같이 글자가 적힌 흰 종이에 불과하지만 느끼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 방대하고 재미있는 상상이다.

어렸을 적, 으레 그 또래 남자아이들이 한번쯤은 그러했던 것처럼 나 또한 삼국지에 빠져있었던 때가 있었다. 어린 내가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은 작은 삼국지 소설책에 불과했지만 이 책은 나로 하여금 넓은 황야를 가득 메운 수백만의 대군들과 희대의 장수들이 뿌연 먼지와 거대한 함성을 일으키며 천하의 자웅을 겨루는 장면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렸던 나에게 삼국지라는 책은 황홀한 상상의 삼매경이었다. 그러던 중, 외가댁에 갔다가 외할아버지가 보시던 당시 중국 영화 '삼국지'를 우연히 보게 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영화는 내가 상상하던 삼국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드넓은 황야를 가득 메운 백만 대군은 온데간데 없고 영화 속에서는 그저 볼품없는 수십의 엑스트라들이 당시의 전쟁을 힘겹게 재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영화는 실망스러웠다.

이 영화는 마치 책과 같았다. 영화를 보고 있다기보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느낌이었다. 주인공들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큰 여운이 몰려왔고 요즘 영화랑 다르게 느릿느릿하면서도 낭만적인 장면들은 그 대사들의 여운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여운도 그냥 텅빈 공간이 아닌 뭔가를 계속 생각하게 하는 의미 넘치는 여운이었다.

사실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한 카드 광고에서 카드 이용액을 늘리기 위해 인용했던 좀 유명한 말에 불과한 줄 알았다. 인생을 즐기라는 이 문구는 현란한 조명 아래 춤을 추는 한 젊은 남자와 더불어 인생과 청춘은 즐기기에 부족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춤사위를 보고 있자면 당장 지금이라도 카드를 가지고 흥청망청 생각 없이 내 인생을 즐겨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훨씬 무겁다. '카르페 디엠', 현재를 잡으라는 말은 그보다는 보다 무겁고 의미있고 진중하다. '특별한 인생을 만들어라(Make your life extarordinary).' '카르페 디엠'이란 말을 비로소 완성시켜주는 문구다. '카르페 디엠', 순전히 '생각 없이' 인생을 즐기란 뜻은 아니다.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삶을 만들라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함, 그것을 완성시키고 그것을 즐길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을 즐길 줄 아는 것이 바로 영화에서의 '카르페 디엠'이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명문 고등학교. 해마다 몇명의 아이비리그 진학 졸업생들을 배출하느냐가 이 학교의 유일한 목표다. 이런 영미식의 교육제도는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하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도 다를 바가 없었다. 연말마다 걸려졌던 명문대학 합격자 명단은 마치 학교의 교육에 대한 슬로건과 마찬가지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공부와 대학 입시가 우선되어졌다. 그 외의 것들, 대학 입시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들은 철저히 배제되어졌다. 오로지 입시와 공부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입시와 공부만으로 얽매여져야만 했던 학생들 그 하나하나가 그 누구보다도 깊은 감수성과 삶에 대한 열성을 갖고 있을 나이의 소년들이란 점이다. 멋진 시의 한 구절에 꽂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꿔버리는가 하면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든 아름다운 소녀에 눈이 멀어 정신을 놓기도 한다. 명백한 이유라는 것은 없다. 단지 이끌리는데로 이끌려가는 것 뿐.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 교정은 봄만 되면 흐드러진 벚꽃으로 만개되어졌다. 산 중턱에 자리한 학교였는데 그 산 거의 대부분이 벚꽃으로 뒤덮이는 바람에 우리는 일년에 한 번 그 아름다운 광경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교실 창문으로 흐드러진 연분홍 빛의 향연을 보려 시커먼 남자아이들은 쉬는 시간마다 창문을 향해 턱을 괴고 있었다. 때론 교정으로 나가 떨어진 벚꽃잎들을 쥐고 뿌리며 놀기도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아침 일곱시부터 저녁 열시까지 하루종일 입시에 매달리는 건조한 일상을 지내야 했지만 연분홍 벚꽃들을 보면서 설렜던 것, 창문 밖으로 화창한 날씨를 보며 연애시를 쓰고 그 연애시를 적은 종이 테두리를 라이터로 이쁘게 태우며 가슴 졸였던 그 날들.

당시 하루하루 힘들게 공부했던 것은 지금의 나를 또는 앞날의 나를 있게끔 해주는 시간이었고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말그대로 나의 삶을 그리고 미래를 유지시켜주고 가능하게끔 만드는 것 뿐이다. 삶을 지탱해주는 것, 삶의 에너지는 따로 있다.

밤 열시가 되면 비로소 하루 일과가 끝났다. 나와 같이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던 친구들과 우르르 도서관에서 밀려나왔다. 도서관은 산 꼭대기에 위치했다. 늦은 오후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올라갔던 무거운 발걸음과는 달리 내리막 산길은 매우 가벼웠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시원한 밤공기와 저멀리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야경, 어깨동무하고 있는 친구들, 그리고 뿌듯함.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이 영화가 입시만을 강조하는 학교와 교육제도를 비판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영화에서 노래하고 있는 낭만과 이상은 영화 속 학교와 사회에 의해 날개가 부러지고 한계에 부딪힌다. 하지만 영화가 꼭 현 사회와 영화 속 학교의 모습을 비판하려고만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교사의 말대로 학교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존재다.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제도나 사회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카르페 디엠', 암울하고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현실 속에서도 시와 낭만을 통해 현재를 잡을 줄 아는가, 인생을 즐길 줄 아는가다. 중요한 것은 포근한 밤공기에서 낭만과 기분을 느낄 수 있느냐,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을 깨닫느냐다.

세상은 믿음 없는 자들로 넘쳐있기에, 전통과 규율, 딱딱함 밖에 모르는 바보들로 넘쳐있기에 시와 사랑이 더욱 낭만적인 것이 아닐까. 삶을 유지하는 것들, 먹고 자고 일하고 공부하고.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어쩔 수 없는 바보들이 있기에 나만의 낭만, 나만의 즐김이 빛을 바라고 나만의 시가 한 편 쓰여지는 것이 아닌가.

역설적이다. 시인은 지금 죽어있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더욱 그 가치를 발하고 시 또한 법률, 경제, 기술 등이 세상을 뒤덮고 있기에 더욱 낭만적이다. 물론 모두가 이를 깨닫고 아는 것은 아니다. 현재를 쥘 수 있는 사람만이 알 뿐이다.

아침부터 인터넷이 뜨거웠다. 모두들 최대 인파가 몰려들 것이라고 예상한 토요일 밤이 막 지난 때였다. 역시나 인터넷은 전날 밤의 뜨거웠던 집회 열기로 달구어져 있었다. 촛불집회 등으로 여론이 거세지자 현 정권도 다방면으로 국정쇄신책을 검토중이라는 속보도 끊임없이 보도되었다. 현 정부가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과연 어느 정도 수준의 국정쇄신을 추진시킬지는 아직 의심의 여지가 많지만 일단은 들끓는 여론이 촛불집회를 통해 가시적으로 폭발한 덕분인지 정권이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버리고 한 발 물러선다는 것은 어쨋든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려스러운 일들은 여전하다. 더 이상 집회가 아니라 시위로 변모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어제 새벽에는 시위대가 청와대 진입까지 시도했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삼청동에서 청와대로 가려는 시위대와 이를 막는 경찰간의 충돌이 큰 이슈가 되었다. 시위대가 청와대로의 행진을 시작하자 경찰들은 버스로 길을 막고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물대포를 쏘고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는 과정에서 많은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 인터넷에는 이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시위대의 사진들과 당시의 생생한 장면을 담은 동영상도 개진되어 있었다. 사진 속 광경은 매우 처참했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었고, 동영상에서는 경찰의 무자비한 물대포를 맞는 시민들이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지고 있었다. 분했다. 아무런 힘 없는 학생들이 무기력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아팠다. 하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광경들을 본 누구라도 왠지 모를 슬픔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물론 무자비한 공권력에 짓밟힌 시위대의 처참함은 정말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집회가 시위가 되고, 이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는 것은 분명 우리가 경계해야 할 상황이다. 왜 촛불집회가 찬사를 받는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촛불집회는 해외로부터도 호응을 얻을 만큼 평화적인 집회다. 촛불문화제라 불릴 만큼 집회 참가자들이 스스로 분위기를 즐기고 이어나가는 성격이 강하고, 갖가지 사회 현안에 대해 마음놓고 자신의 의견을 나누는 토론의 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시민들의 축제의 장인 촛불집회가 자꾸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촛불집회 그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흐름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현 정권인 이명박 정부에 대해 누구보다도 비판적인 시각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또 촛불집회 자체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직접 행동으로 자신의 권리를 증명하는 집회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존경스럽다. 더불어 촛불집회를 강경 진압하고 해산하려 하는 경찰의 태도에도 많은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시위대가 청와대로의 진입을 시도했다는 것은 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그것도 한참을 넘어선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쯤되면 인정하긴 싫지만, 평화스러운 촛불집회를 과격한 시위로 변질시키려는 불분명한 세력이 있다는 정부와 여당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청와대로 진입하려다 경찰에 의해 강압적인 진압을 당한 시위대들은 정권이 시대를 역행해 군사독재 시절로 돌아가려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진 속 피를 흘리는 학생들을 보고 있자면 이 말이 그럴 듯 해보인다. 하지만 정작 시대를 역행해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은 청와대에 진입하고자 했던 그 시위대가 아닌가 싶다. 이승만 정권에 저항해 경무대 앞까지 들이닥쳐 이승만을 하야시켰던 50여 년 전과는 다르다. 그 당시와 현재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할만큼 그 당시는 민주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너무나도 잘못된 정권이었고 지금은 그 후 몇 50여 년에 걸쳐 시민들의 지속적인 저항으로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화를 실현시킨 민주주의 정국이다. 청와대에 진입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급진적인 혁명이라도 일으키겠다는 것인가. 순수하게 그들 말대로 대통령을 만나 대화를 나누겠다하더라도 이런식으로 물리력을 이용해 무작정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을 만난다는 것은 법과 질서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일이다.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또래가 힘들게 정착시켜온 민주주의의 법과 질서를 말이다.

청와대 앞에서 자행되었던 경찰의 강경 대응은 어찌보면 불가피한 것이었다. 어느 나라의 경찰이 현 정권 최고통치자의 집무실을 시위대가 저항 없이 진입하도록 놔두겠는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찰의 강경 대응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경찰은 경찰 나름데로 그들의 의무를 충실이 이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리 민주주의라지만 그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의 최소한의 시스템과 절차는 필수적인 것이다.

평화적이지만 규모있고 열정적인 집회를 통해 시민들은 그들의 목소리를 높이고 의사를 표현한다. 그리고 정부는 이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책을 수정하고 좀더 여론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갖추고, 국회는 시민들을 대변하여 그들을 위한 법안을 만들고 정부를 경계한다. 현재 진행 중인 촛불집회가 갖을 수 있는 최상의 시나리오다. 절대 급진적이고 과격한 변화와 혼돈은 필요치 않다. 현재 국가의 시스템에서 권력은 절대적으로 국민으로부터 발생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과 법, 질서 등을 무시하고 현재의 정국을 감정적이고 폭력적으로만 몰고가는 것은 분명 지양해야 할 것이다.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끌고 온 아줌마들, 아이를 목에 태운 아저씨들, 부모형제가 걱정되어 나온 중학생부터 대학생들까지. 기존의 시위와 다르게 이번 촛불집회가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다양한 계층의 참여, 그리고 그들끼리 즐기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문화,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인터넷상에서의 활발한 참여들은 더 이상 최루탄과 돌멩이로 대변되는 저항과는 색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누가 아닌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긍정적인 참여의 형태다. 도대체 촛불집회를 과격한 시위로 몰아가는 사람들이 누군지는 잘 몰라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 분명 그들은 촛불집회에 의사를 표현하려 온 순수한 시민들을 과격한 시위의 현장으로 몰고 갈 것이 분명하며 이 과정에서 불가피한 공권력과의 충돌을 이용하여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해 더욱 급진적이고 과격한 시위로의 양상을 꾀할 것이 분명하다.

'감정'에서 벗어나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 감정적인 대응은 절대적으로 삼가야 한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응집되는 상황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이성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또 그래야만 지금의 정권과 사람들에게 더욱더 설득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 이미 촛불시위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각 언론들은(물론 의도적으로 관심에서 배제시키는 보수 언론들도 존재하지만) 앞다투어 촛불집회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단순히 집회의 양상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집회의 특징과 배경, 그리고 시민들의 목소리 등을 원론적인 수준에서부터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정부도 바짝 긴장해있다. 미군 여중생 장갑차 사건, 탄핵 정국 등 굵직굵직한 사건 등이 있었지만 이미 이번 촛불집회는 그 수준을 넘어섰다. 정부 또한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일부 운동권의 과격한 행동과 시민들에 대한 선동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번 촛불집회는 정권과 여당이 계속 지적하고 있는 불순세력데 대한 의심의 눈초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좀더 효과적으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을 집회로부터 배제시키지 못한다면 무고한 시민들은 어제의 청와대 앞에서와 같이 과격한 시위의 현장으로 내몰릴 것이며 정부와 시민의 대립은 더욱더 감정적인 갈등의 양상으로 치다을 것이다.

이번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민주주의 축제의 장과 다름없다. 누구한테든 자랑스럽게 찬사받아야 마땅하다. 외환위기 때의 금모으기 운동, 월드컵 당시의 길거리 응원 등을 보며 이미 우리의 역동적인 시민들의 참여 의식을 실감해 왔던 외국 언론들은 이번에는 촛불집회로 높은 시민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우리의 국민들에게 또 한번 놀라고 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지금까지 시민들의 모습은 완벽했다. 이제 이 집회를 어떻게 끌고가서 시민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관철시키느냐 역시 시민들에게 달렸다. 보여주어야 한다. 이 시대의 시민들이 얼마나 성숙하고 민주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그 힘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쥬라기공원>에서 관객들은 난생 처음보는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에 감탄했다. 스크린 속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살아넘치는 공룡들을 보며 관객들은 그저 신기해할 뿐이었고 이 영화는 괴수 영화의 새로운 한 획을 긋게 되었다. 그 후, <고질라>에서부터 <킹콩>, 우리나라에서는 <괴물>에서 <디워>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컴퓨터 그래픽(CG)로 무장한 괴수영화들이 연달아 개봉되었고 긍정적인 성과를 얻었다.하지만 <클로버필드>는 이런 기존의 괴수영화들과는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다른 괴수영화들보다 유난히 작품성이 높다는 것은 아니다. 시나리오나 작품성 등을 떠나서 단지 이 영화는 다른 괴수영화와는 확실히 특이했다. 영화는 철저히 1인칭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영화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들고 다니던 캠코더 렌즈의 시각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약 10년 전 <블레어위치>란 영화가 처음 시도했던 캠코더 1인칭 시점 화면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런데 1인칭 시점 화면과 괴수란 아이템의 절묘한 만남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로스트>,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인기 '미드'다. 한 장면, 장면이 긴박한 빠른 전개와 흥미로운 시나리오 구조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드라마에서 제작진이 자주 사용했던 흥미 요소가 바로 보이지 않는 '공포'였다. 등장인물들은 분명 누군가에게 공격당하고 쫓겨다녔지만 드라마에서는 그 공격자들의 정체를 절대 시청자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았고 그런 보이지 않는 적에게 우리는 더욱 긴장해야만 했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에서의 괴물은 다른 괴수영화와는 달리 철저히 가려졌다. 빌딩에서 빌딩 사이로 몸을 숨기거나 캠코더의 렌즈 시야에서 벗어나면서 절대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괴물이 어떠한 생김새였는지 확신이 안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괴물의 숨바꼭질은 관객들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관객들은 단 몇 초씩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괴물에 대해 일말의 갈증을 느끼고, 때로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괴물 때문에 꼴딱꼴딱 침을 삼켰다.

등장인물이 캠코더를 들고 폐허가 된 거리를 뛸 때 내는 긴박한 숨소리는 마치 내 숨소리 같았고, 조그마한 괴물들이 등장인물들에게 덤빌때는 마치 내가 공격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캠코더를 들고 있는 등장인물이 마치 나처럼 느껴지는 생생함. 이것 또한 1인칭 시점이었기에 가능했다. 괴물이 캠코더를 향해 덤벼들때마다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질끈 거려야 했다. 대신 영화 속 인물이 무자비할 정도로 캠코더를 흔들어댄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어지러움을 참아야 했다. 우리야 스크린 한 쪽에 쓰여진 자막을 읽느라 잠깐씩이라도 눈을 고정시킬 수 있었지만 쉴틈없이 스크린만을 응시해야 했던 미국인들은 우리보다 몇 배 어지러움을 느꼈을텐데 그 사람들은 어지러움을 잘 버텼나 궁금하다.

사실 영화 속 인물 또한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 관객들과 별다를 바 없는 일개의 시민이기에 괴물이 나타났을 경우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는 설정이 가장 사실적인 시나리오일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는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괴물과 맞딱드리도록 하기 위해 얼렁뚱땅 사랑을 사용한다. 형을 잃고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부숴진 건물의 꼭대기로 올라간다는 설득력없는 설정은 이 영화의 깊은 약점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1인칭 시점으로 영화를 계속 이끌어가기에 불가피했던 제작자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괴수란 아이템과 1인칭 시점의 절묘한 결합은 이 빈약한 내용 전개를 상쇄시키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성공의 열쇠로 꼽히는 것이 바로 차별화다. 괴수영화도 더이상 이런 차별화의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나보다. 괴수영화에 한강찬가만큼이나 난데없는 휴머니즘을 결합시킨 영화가 큰 호응을 얻었고, 어제 봤던 영화에서는 캠코더인지 영화인지 구분이 안가는 1인칭 시점으로 등장인물과 관객을 혼연일치시켜버렸다.

영화에 대한 생각을 하던 도중, 갑자기 심형래 감독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얼마나 정교하고 실제감있는 컴퓨터 그래픽을 구현해냈느냐는 더이상 괴수영화의 경쟁력이 아니다. 그저 기본 옵션일 뿐이다. 이제 괴수영화 제작자들은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만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평가받으려는 어리석은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나아가 컴퓨터 그래픽에 자신의 영화만의 독특한 어떤 것을 가미시키려 끊임없는 실험을 하고 있다. 과연 심 감독이 영화 <클로버필드>를 보고 어떠한 생각을 할 지 정말 궁금하다.

하루종일 지겹도록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하던 어제, 문과대 체육대회 축구 준결승전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전날 밤잠을 설쳐가며 설레여 하고 기대했을 경기였지만, 몇 번의 허무했던 경기 취소와 찌뿌둥하기만 한 날씨로 사실 축구 대회에 대한 열정 따위는 식을대로 식어있었다. 수중전. 보는 사람들이야 시원하다고 느낄지 모르겠지만 비가 내리고 빗물이 고여있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일이란 평소 축구를 할 때보다 두 세 배는 더 힘이 든다.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는 비는 자꾸 눈에 들어가서 시야를 방해하거나 눈가를 간지럽히고, 흠뻑 젖은 유니폼과 타이즈, 축구화는 물만 먹고 점점 무거워진다. 공도 물을 먹고 무거워지고 땅은 듬성듬성 물로 고여있어 뛰어다니기에도 불편해진다. 이렇게 힘든건 비단 우리 뿐만 아니었다. 상대팀이었던 사회복지학과 팀도 우리처럼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두 팀 모두 패스면 패스, 드리블이면 드리블 하나 같이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한명 두명 상대와의 몸싸움에 넘어지면서 설상가상 감정까지 격해졌다. 이쯤되면 선수들끼리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기 쉽상이다. 어제 역시, 경기 도중 각 팀 선수들끼리 시비가 붙어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었다. 서로 말을 놓고 심지어 욕설까지 내뱉으며 대치하는 양 팀 선수들. 이들을 말리는 같은 편의 팀 동료들. 상대 팀에게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자며 어깨나 등을 토닥이는 선수들. 분을 못삭히며 팀 동료에게 붙잡혀 있는 선수들. 이들 사이에서는 정말 만감이 교차한다. 승부라는 것이 정말 냉철하다. 마음의 여유 따위는 절대 없다. 평소 같으면 넘어진 상대팀 선수에게 괜찮냐고 다친 곳이 없냐고 물으며 서로 웃음으로 넘겨버릴테지만 냉혹한 승부에서는 상대팀 선수에 대한 배려 따위는 발 붙일 곳이 없다. 그저 힐끗 쳐다보고는 쏜살같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수 밖에. 물론 이에 대한 재책감을 갖을 이유도 없다. 단지 내가 넘어졌을 때 상대팀 선수도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할거라는 이유로. 우리 팀이 골을 넣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우리는 모두 열광하고 서로 얼싸안는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이 하늘로 치켜 올려지고 뱃 속 깊은 곳에서부터의 함성이 내뱉어진다. 불과 몇 초 전의 찌뿌리고 힘겨운 표정은 어디로 간채 모두들 서로서로 웃는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바쁘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선수들이 하나 둘 고개를 떨군다. 때로는 좀 전 자신의 움직임에 대한 죄책감으로, 때로는 서로에 대한 말 못할 원망감으로, 정말이지 '절망'이란 단어가 이 때 만큼 뼈저리게 와닿는 때가 없을 정도로 온몸이 푹 꺼진다.

경기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서로 줄을 서서 마주보고 악수를 나눌 때, 방금 전까지의 치열했던 순간은 사라지고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서로를 격려한다. 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웃음을 지어주며 악수를 해주던 사회복지학과 선수들이 고맙게 까지 느껴졌다. 물론 이 고마움 또한 승자의 여유겠지만. 어느 한 쪽은 승리라는 기쁨에 도취되어 웃음과 환호가 만발하는 반면, 그 한 쪽 만큼 다른 한 쪽은 패배라는 절망에 분을 삭이고 마음 속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낸다. 승자와 패자. 어찌보면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것처럼 슬프고 침울한 일이 또 있을까 싶지만, 모두들 이 침울함을 되내이기보다는 어떻게든지 승자가 되려 치열하게 뛰고 죽을듯이 달린다. 하긴, 어떻게 보면 치열하게 달리는 길만이 이 침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겠지만 말이다. 또 한 고비를 힘겹게 넘어섰다. 지금까지 두 번의 경기를 어찌되었건 이기게 되었지만, 승자와 패자로 정확히 양분되는 50%의 게임에서, 다음 번에도 반드시 승자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고비'라는 표현이 어제의 승자가 된 기분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 같다.

며칠 전, 월드컵 경기장 공원에 갔다가 재밌는 구경을 했다. 경기장 남문 큰 계단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워낙 이 곳이 평소 행사를 많이 하는 곳이겠거니 하고 지나가려는데, 그들은 바로 홈에버 직원들. 얼마 전까지 뉴스에서 연달아 떠들어대던 홈에버 노조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아닌 홈에버 정직원들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한 마디로 파업 등으로 불법 영업 방해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맹렬히 소수의 극렬 노조원들과 민노총 등 외부 세력을 규탄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정당한 요구이지만 이렇게 서로의 이익, 생존만을 위해 집단 시위를 벌여 서로가 서로를 밀쳐내는 모습이 영 보기 좋지만은 않다.

물론 비정규직이란 시스템이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모순들을 담고 있는 사회적 문제이다. 따라서 민노총과 민노당이 공권력게 매우 격렬하게 대치하면서까지 이 이랜드 사태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점도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최근 민노총을 비롯한 노조가 방법론적인 면에서 너무 극단주의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목소리가 사회에 팽배해질 정도로 지금까지 보여준 이랜드 사태에서의 폭력 시위는 그 도가 과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상생. 공존. 어쩌면 현 참여정부의 핵심 키워드. 앞서 말한 듯 심각한 이랜드 사태로 가장 많이 득을 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격렬한 시위로 자신들의 진가를 다시 한번 드러낸 노조들? 이들은 선교봉사단을 납치테러해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고 자부하는 탈레반들과 다를바 없다. 그럼 이랜드 기업의 사측? 그들이야말로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한 장본인들이다. 외주용역화 등의 비정규직화를 통해 얻는 작은 이익을 위해 기업 이미지를 실추시켜버렸고 사내에서 파업과 시위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속태우며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마트. 유통업계의 라이벌인 이마트가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상암에서 가장 가까운 이마트 서부점은 전국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이마트였지만, 월드컵 경기장에 홈에버가 들어서면서 이 곳 상권을 양분해갔다. 하지만 홈에버가 이번 사태로 몸살을 앓으면서 다시 사람들은 이마트로 몰리게 되었고 홈에버는 정상 영업에도 불구하고 고객 수가 적어졌다. 비단 이 동네의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이랜드 사측과 노조, 양측 모두 상생과 공존에 실패하는 바람에 어느 한 쪽의 승자도 없는 패자만의 게임 속으로 빠져들어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잠잠하나 싶더니 역시나 현대차 노조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번 파업을 무기로 봉기했다. 동서남북의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뉴스'이지만 이제 더 이상 현대차 노조의 파업은 말그대로 뉴스가 아니다. 그런데 막 들려오는 뉴스가 새롭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을 유보하고 협상을 재개한다는 것이다. 두둑히 부른 배처럼 될대로 되라는 식의 두둑한 배짱을 부리던 현대차 노조가 한 발 물러선 것이다.

가장 배불른 노조라는 비아냥을 받는 현대차 노조. 이런 비아냥과 더불어 최근 노조에 대한 사람들의 달라진 시각 또한 그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것이 자의든 타의든 무작정 파업에 돌입하지 않고 다시 한번 사측과 협상을 시도하는 현대차 노조의 자세는 참 다행스럽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는 급진적 노조들의 격렬한 시위와 파업으로 유명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물론 아직까지 성숙되지 못한 우리나라 재계 또한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상생이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을 미루고 평화적인 협상 자세를 취하고, 돈성으로 욕을 먹던 이마트 사측이 비정규직 직원 몇 천여 명을 정규직으로 고용시킨 듯이 패자가 없는 양측 모두 승자만이 존재하는 유쾌한 게임을 즐겨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나 말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 영화에서와 같이 '타인'이라 칭한다. 심지어 살을 부비고 지내는 가족도 '나'가 아니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타인'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 '나'들에게 다른 '타인'들을 그냥 말그대로 '타인'일뿐이다. 나의 삶을 사는데도 하루 하루가 벅찬 우리 '나'들에게는 타인의 삶이란 관심이 별로 가지 않는, 관심이 가더라도 그 관심만이 타인의 삶에 대한 최대한의 관심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는 비교적 '나'와는 거리가 먼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 타인의 삶을 직업으로 삼는 한 남자가 있다. 타인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날밤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는 모든 일들을 도청하고 감시한다.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당을 위해 그 당에 해가 될 만한 타인들은 모두 그의 눈과 귀에 의해 발가벗겨진다. 이러한 그에게 씌여져 있는 것은 '냉정'이라는 안경. 그는 그의 밖의 모든 세상들과 오로지 '냉정'이란 단어로만 소통한다.

문제는 그가 그와 너무도 대비되는 삶을 살아가는 한 타인의 삶을 지켜보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가 '냉정'이란 단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의 '타인'은 '열정'이란 단어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극작가로서의 '열정'은 물론 정의를 열망하는 '열정', 또한 한 여자의 애인으로의 '열정'까지. '타인'에게 그 모든 것이 '열정'이었다. 이 영화에서 '냉정'과 '열정'의 대결은 매우 싱겁게 끝이 난다. 자켓의 자크를 마지막까지 올려입고, 허리와 목을 곧게 세우고 경직된 자세로 뚜벅뚜벅 걷는 그의 모습. 그가 영화 처음에서부터 보여준 그의 '냉정' 그 자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쯤, 그에게 '냉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듯 그의 경직된 발걸음에서 뿐이다.

투명무색의 맑은 물에 떨어진 몇 방울의 빨간 잉크가 그 물의 전체를 조용하게 물들여버리듯, 그의 무미건조한 삶 또한 타인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삶에 어느 순간 조용히 물들어버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물들어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희생, 그 자체이다. 그가 타인이 모르게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지켜봐왔듯이,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시킨다. 받는 사람 마저 알지 못하는 슬픈 희생.

의도된 노출. 모순이다. 원래 노출이란 어떠한 것이 당사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밖으로 드러났을 때를 말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의도된 노출이라니. 앞뒤가 안맞는다. 그런데 가끔 연기자들은 이러한 의도된 노출을 해야할 때가 있다. 관객들에게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숨기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관객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한다. 즉, 관객에게 은밀히 자신의 속내를 들켜야한다.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들어나면 의도적 노출이 아니다. 그냥 일반적인 싱거운 표현일 뿐이다. 또한 의도는 했으나 노출이 충분히 되지 않아도 소용없다. 내용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야기다. 비즐리 역을 맡고 있는 울리쉬 뮤흐는 영화 내내 관객에게 의도된 노출을 한다. 겉으로 비밀 경찰이라는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섬세한 안면 연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가 이미 자신의 직분을 잊은채 타인의 삶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듯 떨리는 그의 미간의 주름은 의도된 노출의 정점이었다.

올리쉬 뮤흐. 독일에서는 큰 인정을 받는 국민배우였다고 한다. 사랑, 예술, 통일 등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그가 무표정으로 헤드폰을 끼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단 몇 미리의 눈동자 움직임만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배우. 어쩌면 '타인'이 아니면서도 '타인의 삶'을 가장 잘 흉내낼 줄 아는 사람이 그가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