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월드컵 경기장 공원에 갔다가 재밌는 구경을 했다. 경기장 남문 큰 계단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워낙 이 곳이 평소 행사를 많이 하는 곳이겠거니 하고 지나가려는데, 그들은 바로 홈에버 직원들. 얼마 전까지 뉴스에서 연달아 떠들어대던 홈에버 노조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아닌 홈에버 정직원들이었다. 그들의 요구는 한 마디로 파업 등으로 불법 영업 방해를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맹렬히 소수의 극렬 노조원들과 민노총 등 외부 세력을 규탄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정당한 요구이지만 이렇게 서로의 이익, 생존만을 위해 집단 시위를 벌여 서로가 서로를 밀쳐내는 모습이 영 보기 좋지만은 않다.

물론 비정규직이란 시스템이 분명 바람직하지 않은 모순들을 담고 있는 사회적 문제이다. 따라서 민노총과 민노당이 공권력게 매우 격렬하게 대치하면서까지 이 이랜드 사태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점도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최근 민노총을 비롯한 노조가 방법론적인 면에서 너무 극단주의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목소리가 사회에 팽배해질 정도로 지금까지 보여준 이랜드 사태에서의 폭력 시위는 그 도가 과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상생. 공존. 어쩌면 현 참여정부의 핵심 키워드. 앞서 말한 듯 심각한 이랜드 사태로 가장 많이 득을 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격렬한 시위로 자신들의 진가를 다시 한번 드러낸 노조들? 이들은 선교봉사단을 납치테러해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고 자부하는 탈레반들과 다를바 없다. 그럼 이랜드 기업의 사측? 그들이야말로 작은 것을 얻고 큰 것을 잃는 우를 범한 장본인들이다. 외주용역화 등의 비정규직화를 통해 얻는 작은 이익을 위해 기업 이미지를 실추시켜버렸고 사내에서 파업과 시위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속태우며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마트. 유통업계의 라이벌인 이마트가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상암에서 가장 가까운 이마트 서부점은 전국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이마트였지만, 월드컵 경기장에 홈에버가 들어서면서 이 곳 상권을 양분해갔다. 하지만 홈에버가 이번 사태로 몸살을 앓으면서 다시 사람들은 이마트로 몰리게 되었고 홈에버는 정상 영업에도 불구하고 고객 수가 적어졌다. 비단 이 동네의 현상만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이랜드 사측과 노조, 양측 모두 상생과 공존에 실패하는 바람에 어느 한 쪽의 승자도 없는 패자만의 게임 속으로 빠져들어버리고 말았다.

한동안 잠잠하나 싶더니 역시나 현대차 노조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번 파업을 무기로 봉기했다. 동서남북의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뉴스'이지만 이제 더 이상 현대차 노조의 파업은 말그대로 뉴스가 아니다. 그런데 막 들려오는 뉴스가 새롭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을 유보하고 협상을 재개한다는 것이다. 두둑히 부른 배처럼 될대로 되라는 식의 두둑한 배짱을 부리던 현대차 노조가 한 발 물러선 것이다.

가장 배불른 노조라는 비아냥을 받는 현대차 노조. 이런 비아냥과 더불어 최근 노조에 대한 사람들의 달라진 시각 또한 그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것이 자의든 타의든 무작정 파업에 돌입하지 않고 다시 한번 사측과 협상을 시도하는 현대차 노조의 자세는 참 다행스럽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는 급진적 노조들의 격렬한 시위와 파업으로 유명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물론 아직까지 성숙되지 못한 우리나라 재계 또한 많은 단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상생이다. 현대차 노조가 파업을 미루고 평화적인 협상 자세를 취하고, 돈성으로 욕을 먹던 이마트 사측이 비정규직 직원 몇 천여 명을 정규직으로 고용시킨 듯이 패자가 없는 양측 모두 승자만이 존재하는 유쾌한 게임을 즐겨야 할 것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나 말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이 영화에서와 같이 '타인'이라 칭한다. 심지어 살을 부비고 지내는 가족도 '나'가 아니라는 기준으로 봤을 때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타인'일 뿐이다. 이러한 우리 '나'들에게 다른 '타인'들을 그냥 말그대로 '타인'일뿐이다. 나의 삶을 사는데도 하루 하루가 벅찬 우리 '나'들에게는 타인의 삶이란 관심이 별로 가지 않는, 관심이 가더라도 그 관심만이 타인의 삶에 대한 최대한의 관심이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되는 비교적 '나'와는 거리가 먼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 타인의 삶을 직업으로 삼는 한 남자가 있다. 타인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날밤 다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는 모든 일들을 도청하고 감시한다. 자신이 충성하고 있는 당을 위해 그 당에 해가 될 만한 타인들은 모두 그의 눈과 귀에 의해 발가벗겨진다. 이러한 그에게 씌여져 있는 것은 '냉정'이라는 안경. 그는 그의 밖의 모든 세상들과 오로지 '냉정'이란 단어로만 소통한다.

문제는 그가 그와 너무도 대비되는 삶을 살아가는 한 타인의 삶을 지켜보게 되면서 시작한다. 그가 '냉정'이란 단어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의 '타인'은 '열정'이란 단어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극작가로서의 '열정'은 물론 정의를 열망하는 '열정', 또한 한 여자의 애인으로의 '열정'까지. '타인'에게 그 모든 것이 '열정'이었다. 이 영화에서 '냉정'과 '열정'의 대결은 매우 싱겁게 끝이 난다. 자켓의 자크를 마지막까지 올려입고, 허리와 목을 곧게 세우고 경직된 자세로 뚜벅뚜벅 걷는 그의 모습. 그가 영화 처음에서부터 보여준 그의 '냉정' 그 자체의 모습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쯤, 그에게 '냉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한듯 그의 경직된 발걸음에서 뿐이다.

투명무색의 맑은 물에 떨어진 몇 방울의 빨간 잉크가 그 물의 전체를 조용하게 물들여버리듯, 그의 무미건조한 삶 또한 타인의 열정적이고 예술적인 삶에 어느 순간 조용히 물들어버렸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물들어버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희생, 그 자체이다. 그가 타인이 모르게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지켜봐왔듯이, 일방적으로 타인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시킨다. 받는 사람 마저 알지 못하는 슬픈 희생.

의도된 노출. 모순이다. 원래 노출이란 어떠한 것이 당사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밖으로 드러났을 때를 말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의도된 노출이라니. 앞뒤가 안맞는다. 그런데 가끔 연기자들은 이러한 의도된 노출을 해야할 때가 있다. 관객들에게 어떤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숨기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관객들이 눈치챌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한다. 즉, 관객에게 은밀히 자신의 속내를 들켜야한다. 의도가 너무 노골적으로 들어나면 의도적 노출이 아니다. 그냥 일반적인 싱거운 표현일 뿐이다. 또한 의도는 했으나 노출이 충분히 되지 않아도 소용없다. 내용이 관객들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야기다. 비즐리 역을 맡고 있는 울리쉬 뮤흐는 영화 내내 관객에게 의도된 노출을 한다. 겉으로 비밀 경찰이라는 자신의 직분에만 충실할 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섬세한 안면 연기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가 이미 자신의 직분을 잊은채 타인의 삶에 동화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눈치챌 수 있게 만들고 있다.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듯 떨리는 그의 미간의 주름은 의도된 노출의 정점이었다.

올리쉬 뮤흐. 독일에서는 큰 인정을 받는 국민배우였다고 한다. 사랑, 예술, 통일 등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그가 무표정으로 헤드폰을 끼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단 몇 미리의 눈동자 움직임만으로 많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배우. 어쩌면 '타인'이 아니면서도 '타인의 삶'을 가장 잘 흉내낼 줄 아는 사람이 그가 아닐까 생각된다.

네이버 블로그는 그만두고, 제대로 블로그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