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노트북. 그렇다면 나는 이 요상하게 생긴 물건이 어떻게 노트북인지를 알게 되는 것일까? 굉장히 쓸데없고 할 일 없어 보이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철학, 아니 현재의 모든 학문의 시작은 이 같은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먼 옛날 플라톤 같은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 거창한 '이데아'를 이야기하기도 했고, 신학자들은 그들이 믿는 '신'을 논증의 장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또 흄 같은 짖궂은 회의주의자들은 앞의 노트북 그 자체는 노트북을 보고 있는 시각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는 것(노트북의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다)이라고 이야기 했고, 데카르트나 칸트는 노트북이 나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노트북을 구성하고 있다고 발상을 뒤집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갖고 있을까? 지금의 학자들은 대부분 '대상'이나 '나' 자체보다는 그 둘을 특정한 형식으로 관계짓는 '구조'에 주목한다. 그동안 '나'와 대상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구조나 체계로, 즉 판 전체로 확대시킨 것이다. 이 같은 사조를 뭉뚱그려 '구조주의'라고 한다. '나'는 '대상'의 참된 속성보다는 '나'와 그 '대상'이 이루고 있는 총체적인 체계와 위치, 규칙 속에서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은 OK 사인이 영미권과 우리나라에서는 'ok'와 같은 긍정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일본에서는 돈을 의미하고 브라질에서는 모욕을 주는 욕설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는 이야기처럼 같은 모양의 제스쳐라도 각 사회의 약속 체계마다 완전히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사실 앞서 말한 구조주의는 바로 이 언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구조주의 학자들 중에서 언어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몸이 영혼의 집인 것처럼 우리의 존재 또한 언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언어 덕분이다. 내가 지금 눈 앞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노트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노트북'이란 말 때문이고, 그 노트북이란 사물을 블로그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또한 '노트북'이란 말 때문이다. 물론 앞에 놓여져 있는 네모난 사물을 꼭 '노트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휴대용 컴퓨터'라고 부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언어적 약속에 의해서는 '사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사물과 언어의 관계는 임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때때로 '언어' 자체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언어가 우리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 의식을 규정하는 거대한 체계, 규칙임을 의미한다. 내가 타이핑 하고 있는 이 네모난 물건을 '노트북'이라 부르는 것과 '휴대용 컴퓨터'라 부르는 것은 큰 차이를 가진다. '휴대용 컴퓨터'란 명칭은 다소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노트북'이란 명칭은 우리에게 공책이란 이미지를 그리게 만듦으로써 공책처럼 마음껏 가방에 넣고 휴대할 수 있는 컴팩트하고 편리한 느낌을 준다. 같은 사물이라도 그 명칭에 따라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천지 차이가 된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면 매순간 기업들이 새로운 상품에 대한 참신한 이름을 고안하기 위해 그토록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참신한 상품명이 상품의 매출액을 좌지우지 하는 사실은 단어 하나가 본래의 지시 대상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주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동사 중심의 언어 구조를 갖고 있다. 의식적으로 행위, 관계에 중점을 둔다. 반면 서양에서는 명사가 중요시된다. 같은 동사라 할 지라도 명사의 속성에 따라 그 형식이 바뀐다. 따라서 동양과 달리 사물, 독립적인 개체에 중점을 둔다. 동양에는 be동사(독어로는 sein동사, 불어로는 etre동사)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명사, 주어 중심의 서양 언어체계에서 be동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풍부한 서술어 표현을 갖고 있는 동양적인 언어 구조에 be동사는 굳이 필요가 없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일찍이 동양에서는 행위와 관계에 대한 도덕론이 발달한 반면, 서양에서는 사물에 대한 관찰을 중시하는 인식론, 형이상학 등이 발달했다. 또한 동양에서는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소속에서 자신을 보는 반면 서양에서는 비교적 독립적인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동서양이 갖고 있는 언어 구조의 차이는 수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양쪽의 상이한 문화, 관습, 의식을 만들어냈다. 언어는 더 이상 우리 외부에 있는 개별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 더 깊숙하게 우리 안에 자리잡고 우리의 행위, 의식과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다.

그런데 초등학교의 원어민 영어 수업도 아니고, 대학생과 교수를 상대로 영어로 강의하라는 것은 한 마디로 '무식한' 자태다. 더욱이 역사나 국문학 등 과목을 가리지 않고 영어 강의를 독려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때문에 지금 강의실에는 국문 시를 영어로 배우는 참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얇은 사 고이 접어 나빌레라" 같은 표현에 대해 어떻게 영어로 설명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언어는 단순히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지식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지식의 한 부분을 이룬다. 같은 내용이라 할 지라도 우리말로 강의하는 것과 영어로 강의하는 것은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우리말이 갖고 있는 언어 구조와 의미화에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무작정 우리말과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 영어로 강의를 듣고 이해하게 하는 것은 빵에 된장을 발라먹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대학의 영어 강의는 지식 전달이라는 목적은 물론 그 과정까지도 비효율적으로 만든다.

영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세계화라 불리는 요즘 같은 세상에 영어를 잘한다는 것, 분명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영어에만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실무적인 차원에서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대학 강의까지 영어로 수업하게 만들 까닭은 없다. 대학은 기업에 양질의 인력을 제공하는 단순한 인력 양성소가 아니다. 대학은 그 사회의 학문과 지성의 보고이다. 한국 사회라는 지형 아래 오랜 세월 축적된 학문, 지식, 교양이 이어져오고 덧붙여지고 새롭게 변용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언어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 곳에서 굳이 '영어교육'에 몰입할 필요가 있을까. '영어몰입'은 영어 수업이나 기업, 외무 등 실무적인 차원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 그렇게 해도 충분히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의 '모든 것'이다.

  • 조비 2011.04.23 22:01 신고 # modify/delete reply

    철학 이야기가 나와서 멈칫했었는데 . . .

    언어의 기원에 의거해 현대의 영어중시사상 풍토를
    잘 꼬집어 주신 것 같네요

    한수 배우고 갑니다 ^^

  • 어멍 2011.04.23 23:57 # modify/delete reply

    왠만한 철학입문서를 읽은 느낌이네요.
    굳이 덧붙일 것이 없는 군더더기 없는 글입니다.

    기술적으론 네이밍이 중요하고 도덕적으론 정명이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기표와 기의의 간극이 심하게 멀어진 현실, 언어가 심하게 일그러진 지금은 분명 위기의 사회겠지요.
    정치권 뿐 아니라 대학, 학계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겝니다.

  • 커피믹스 2011.04.24 10:43 # modify/delete reply

    미국이 강대국이 아니엇다면 세계통용어는 바뀌었겠죠 ㅎㅎ

  • mark 2011.04.30 16:13 # modify/delete reply

    재미난 내용이네요. ^^ 비가 많이 오는데 내일은 또 최악의 황사라고 하네요. 건강 주의하세요.

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쟁 영화는 관객들의 로망이다. 실제 현실세계에서 전쟁은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인간 행위로 일컬여지지만 영화의 스크린 안에서 전쟁은 최고의 오락물이 되기도 한다. 전쟁은 인간의 가장 말초적인 본능을 긁어주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지고, 기관총에서 연발된 총알들은 파편을 튀기고. 인간 안에 깊숙히 내재되어있는 파괴적 욕구와 폭력성, 인간에게 있어 전쟁 영화야말로 이 본능적 욕구를 분출시킬 수 있는 시원한 돌파구가 되어준다.

기존의 전쟁 영화들이 그랬다. 근육으로 다져진 상반신을 내보이며 일당백의 기개로 수백의 베트콩들을 상대하는 '람보'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전형적인 전쟁 영화다. 적과 아의 명확한 구분 속에서 이런 영화들은 아군의 피는 적군의 피로 갚아주는 원초적인 스토리 라인을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확실한 볼거리와 액션신으로 승부를 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이나 진주만(2001), 블랙호크다운(2001) 같이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컴퓨터 그래픽이란 영화계의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전쟁영화에 입혀졌을 뿐, 재현되는 전투의 스케일이나 사실감을 제외한 전반적인 전쟁의 스토리 라인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사실적인 컴퓨터 그래픽이 동원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이 큰 스케일의 전투신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진주만은 그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늘로 향했다. 그동안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는 재현해내기 어려웠던 공중전을 거의 완벽하게 그려냈다. 블랙호크다운은 사실감 있는 컴퓨터 그래픽에 감각적인 스타일을 더했다. 리드미컬한 음악과 함께 재현되는 현대의 시가전은 기존의 전쟁영화에 '세련됨'를 입혀주었다.

하지만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기점으로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전쟁 영화는 그 내용과 성격이 180% 달라졌다. 2001년 본토 심장에 행해진 9.11 테러로 인해 미국인들은 큰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테러라는 실체 없는 적과의 전쟁은 미국인들로서는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2차대전 때는 독일과 일본이, 냉전시대 때는 소련이 그 역할을 착실하게 맡아주던 '적'이라는 존재가 모호하고 애매해진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이라크 전쟁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전쟁은 하고 있지만 대체 왜 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지금까지 미국(혹은 서구 국가들)은 전쟁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응당 해야 할 것이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인들은 전쟁 자체에 대해 고민을 갖기 시작했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끔찍한 전쟁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자문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경험으로 황폐해져가고 있는 청년 병사들의 상태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공격을 받고 있는 현지인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겪어야 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의 전쟁 영화는 달라졌다. 전쟁이란 것에 대한 심오한 고민을 시작한 미국인들의 혼란은 영화의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졌다. 전처럼 단순한 흥미 위주의 볼거리 영화는 관객과 전문가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대신 전쟁이라는 한정된 시공간 내에서 점차 한계에 부딪혀가는 인간의 나약함, 전쟁의 공포와 잔인함에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젊은 군인들, 끊임없이 전쟁을 필요로 하는 미국 군수산업계의 압력에 대한 자각 등이 전쟁 영화의 내용으로 새롭게 채워지고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의 후속편으로 제작된 드라마 더 퍼시픽(2010)에서는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정서가 황폐해지다못해 서서히 미쳐가는 주인공들이 여과없이 등장한다. 자신의 처지와 별다를 것이 없는 일본군을 죽이려면 먼저 그 자신이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전쟁광이 되어야 하는 현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전역자들. 전편과 비교해볼 때 전투신의 분량이나 세밀한 고증을 통한 사실적인 묘사는 다소 부족했으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군인들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깊이 있고 심층적으로 묘사되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승리해 수리바치산 정상이 성조기를 꼽는 유명한 사진을 다루고 있는 아버지의 깃발(2006) 또한 전쟁으로 만들어진 영웅주의에 대한 허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전쟁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영웅은 개인이 국가가 강요하는 대의 안에서 희생당하고 소모되는 현실을 아름답게 미화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영웅이 되었던 이들은 자신의 영웅담이 결코 아름답거나 용맹스럽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없이 죽어간 동료들을 남겨두고 자신이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함께 전쟁 영웅이 된 현실에 힘겨워 한다.

아바타를 제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허트로커(2008)는 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극도의 공포와 중독성을 다루고 있다. 폭탄물 처리반인 영화의 주인공은 정상적인 인물이 아니다. 제멋대로 영웅 행세를 하며 긴장과 공포를 즐기고 이를 통해 느끼는 희열 같은 것에 중독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쟁은 그의 삶 자체가 되었고, 결국 그는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그를 통해 일그러진 영웅 자신과 이들을 만들어내는 현대인들에게 섬뜩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린존(2010)은 보다 직설적으로 전쟁에 대한 명분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내의 대량살상무기로부터 자국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라크 전쟁을 개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과연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 상부의 명령에 의해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해매는(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군인들의 '똥개훈련'은 전쟁의 명분을 넘어 과연 어떤 이들이 전쟁을 원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만든다.

더 이상 영화에서 '나'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은 광기 어린 일본, 독일 군인이 아니다. 바로 전쟁 그 자체가 고통의 대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쟁이란 경험이 인간에게 주는 무게감이 전쟁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개봉되고 방영된 전쟁 영화나 전쟁 드라마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아직 분단을 벗어나지 못한 현 상황의 한계였을까. 전쟁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이의제기를 시작한 해외의 전쟁물들과는 달리 국내의 영화나 드라마는 여전히 전투신의 화려함에 목숨을 걸고 단순한 서사 구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 센텔 2010.09.21 00:03 신고 # modify/delete reply

    전쟁.. 결국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중 하나겠지요.
    과연 언젠가는 전쟁이 끝날까요? 누구나 참혹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전쟁. 어린아이같은 생각이지만, 서둘러 싸움이 멎기를 소망해 봅니다.

  • 블랙체링 2010.09.22 14:04 # modify/delete reply

    최근 한국에 개봉한 전쟁영화 혹은 전쟁 소재 영화에 대해 조금 빼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면 다분히 현 정부 친화적인 반공목적의 영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코, 전쟁의 참상을 그려내며 인간적 관점에서 전쟁의 모습을 그린 영화는 아마 나오긴 힘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잡아죽여야 할 북한 빨갱이들을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상당한 알러지 반응으로 보일테니깐요...

    조금 흥분했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어멍 2010.09.23 23:02 # modify/delete reply

    본 영화도 있고 아닌 영화도 있고...
    개인적으론 플라툰, 에너미 엣 더 게이트를 추가하고 싶군요.

    예전보단 미국전쟁영화가 고민의 흔적이 있지만 자국을 미화하고 세계경찰, 자유의 수호자라는 포지션에선 한계가 여전한 듯 합니다.

  • 안녕하세요!!ㅎ
    재미있는게 위에 언급하신 모든 영화에 미국이 등장하네요~ㅎㅎ
    역시 미국은 트러블메이커인가요~ㅋ
    혹은 역시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영화 생산성을 보여주는 데 대한 결과인 건가요?ㅎ

    저는 개인적으로 에너미앳더게이트를 정말 재미있게 봤던 것 같습니다.

    오랫만에 찾아뵈었네요~ 링크 등록하고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ㅎ

혐오감 嫌惡感 [명사] 병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

국어사전에 나오는 '혐오감'의 의미이다. 말뜻처럼 혐오감이란 어떤 것에 대한 불쾌한 느낌이 극대화된 감정.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대상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가식적인 정치인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정리 안 된 겨드랑이 털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은 징그럽게 생긴 바퀴벌레를 혐오한다. 혐오감이 참 불편한 감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혐오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혐오감을 느끼는 대상들을 없애려 하는 것은 과도한 발상이다. 물론 이런 발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반 세기 전, 아돌프 히틀러란 인물에 의해.

개고기를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애완견을 길러온 사람들, 혹은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혐오하고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혐오하고 개고기 식문화를 혐오한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복날마다 거리로 나와 개고기 반대 시위를 벌인다. '개는 인간의 반려동물입니다', '개를 먹는 것은 야만적입니다', '개에게도 감정이 있습니다' 등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말이다. 이들을 거리에 나서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역시 혐오감일테다. 자신이 사랑하는 개가 끔찍하게 잡혀먹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는 혐오감, 불에 그을린 채 모란시장에 늘어져 있는 식용 개들을 바라볼 때 드는 혐오감 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안방극장 가족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동성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느 연인들처럼 사랑을 속삭이고 스퀸십을 하는 게이 커플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드라마의 동성애 코드에 왜 불편해 했을까?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천륜이 무너진 것에 대한 인류애적인 죄의식 때문에? 아니다. 단지 동성애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남남 커플의 다정다감한 모습이 보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했던 어느 날, 야동을 보려다가 실수로 남성끼리의 성행위가 찍힌 야동을 본 적이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보기에 너무 불편했다. 혐오스러웠다.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게이 커플의 모습을 볼 때도 어떤 때는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성애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동성애자들의 동성애가 적어도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마음 속의 약간의 불편함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동성애 자체를 반대할 수 있을까?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마다 천성과 환경이 다른데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이 바라는 건 자신들에 대한 혐오감을 거두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이 불편한 것을 인내할 수 없어서 그 혐오감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뿐이다.

  • Heinrich 2010.07.30 02:53 # modify/delete reply

    그러고보니 오늘 복날이라고 애완동물 단체에서 개고기를 먹지 말자면서 프리허그행사를 했던데, 그것이 많이 겹쳐지네요.

    • 그런 사람들이 저에게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광신도로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이들은 타인들에게 무엇을 강요하지요.

  • G_Gatsby 2010.07.31 13:03 # modify/delete reply

    저도 개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물론 동성애도 하지 않습니다.;;
    몇해전에 히스 레저의 영화를 보면서 동성애에 대한 얕은 충격을 받은적이 있었네요. 지금은 많이 완화가 되었지만요.

    • 저 역시도 전에는 동성애에 대한 문화충격이 컸죠.
      하지만 이제는 그다지 충격적인 무엇이 되지 못합니다.

      단지 주변 것들이 낯설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놀라고 혐오하는 것은 아닌지,
      오래 전부터 동성애나 개고기가 일반적인 것들이었다면
      우리가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일 일도 없었을 테죠.

  • 블랙체링 2010.07.31 13:41 # modify/delete reply

    오랜만의 포스팅이네요 반갑습니다. ^^*

    주사 맞는 걸 무서워하는 무사공포증 환자가 전체 인구의 약30% 정도 차지합니다. 그리고 어떤이들은 그들을 보며 그 나이에 주사도 맞지 못하느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하죠. 동성애자들 역시 전체인구의 약 20% 정도는 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것이죠

    문제는 이런 나와 다른 사람들은 본인의 기준으로 혐오하고 그것을 대중적 논의로 확대해서 같이 혐오합시다라고 말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 '혐오합시다', 좋은 표현이네요.
      굳이 '합시다'로까지 나아갈 필요가 없을텐데 말이죠.

  • 어멍 2010.07.31 13:54 # modify/delete reply

    인간인 이상 불편함도 혐오감도 자연스런 일이겠지요.
    굳이 억지로, 위선적으로 받아들이는 제스춰를 취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남에게 강요하여서는 안되겠지요. 이왕이면 정면으로 바라보고 이해를 시도하는 자세면 더욱 좋겠지요.

    (불편함을) 참는다는 관용도 그렇고 '생각하라'는 명제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기 힘든 것도 참고 생각하기 싫은 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그 참뜻이 있겠지요.
    맹자왈 공자왈 하였지만 저부터 실천하기 힘든 일입니다.

    • 그렇게 실천하기 힘든건 비단 어멍님만이 아니겠지요.

      역시 늘 제 생각을 간결하게 정리해주시는 듯 합니다.

  • 2010.08.01 11:08 #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Reignman 2010.08.04 13:05 # modify/delete reply

    개고기도 먹지 않고 동성애자도 아니지만
    그들에 대한 혐오감은 가지고 있질 않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영화를 많이 봐서 그런가봐요.
    동성애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ㅎㅎ

  • 개고기도 먹어본 적 없고, 동성애는 커녕 연애도 [.....훌쩍] 해 본 적 없습니다만...
    딱히 혐오한달까 그런 건 없는 것 같네요..
    (단정지을 수 없는게, 아직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을거야 라고 믿다가도 보면 또 혐오할지도.....사람 일이 단정지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근데 저는, 사실 이런 논쟁 자체가 왠지 모르게 이상해보인다는 생각이 드네요...

    먹든지 말든지, 좋아하든지 말든지 개인 취향일 뿐이지 굳이 논쟁할 거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음, '태양이 지구를 돌든, 지구가 달을 돌든 나랑은 관계 없으니까 신경끌래.'라는, 무한이기주의의 표어를 남기신 셜록홈즈가 생각나는건 왜일까요 =_=;;;;;;

  • 용팔 2010.08.23 06:36 # modify/delete reply

    아주 논리 정연하게 포인트를 지적하여 주시었네요.
    개인마다 또는 문화와 환경에 따라 생각이 틀리고 또는 같기도 한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편향적인 시선 보다는 이해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본인이 싫어 하는것 또는 본인이 좋아하는것을 남에게 강요하는것 만큼은 피해야 할것 같습니다.
    정답이나 해결책을 바라기 보다는 수용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Slimer 2010.08.30 22:33 # modify/delete reply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옆 사람도 좋아하게 하고 싶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옆 사람도 싫어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성적인 인내가 필요한 가 봅니다. 최소한 더불어 살려면요..

  • 음.. 2010.10.10 17:04 # modify/delete reply

    잘봤습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른이상 똑같이 똑같은행동을하며 똑같은것을 보고 똑같은것을 먹을수없며 똑같은 계속 한 사람만좋아할수없는것처럼 생각이똑같지않은이상 이해가될거라고는 생각치못하겠네요

  • 마루통 2010.10.22 20:00 # modify/delete reply

    글세요,,저같은경우는 그드라마가 나올때마다 딴곳으로 돌린것 같은데여..
    제가볼때 문제는 아직 사고가 확고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관점입니다.
    내 자식이 볼 경우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것두 오버가 아닐까요.?.^^

배가 몹시 고픈 늦은 오후, 지하철 역에서 나와 집으로 가던 중 삼겹살을 사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육점에서 삼겹살을 사고 입속으로는 군침을 삼키며 신나게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맛있는 삼겹살을 기대하며 들떴던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길을 가던 중 마주치게 된 한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골목을 다니며 손수 모으셨을 폐박스가 실려 있는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계셨다. 헌데, 그 할아버지와 리어카가 내 바로 옆을 지나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저렇게 폐휴지를 모아서 과연 얼마를 버실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삼겹살, 저 할아버지는 이 삼겹살을 드셔본 지 얼마나 오래 되셨을까?"

어머니는 운전을 하고 계셨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횡단보도를 지나가려는 도중 무거운 행상을 한껏 짊어진 아주머니 한 분이 무단횡단을 하시고 계셨다. 어머니는 급제동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고, 그 아주머니는 무단횡단이 미안했던지 우리 차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짐을 양 손에 한가득 든 채 힘겹운 걸음을. 어머니는 뭐 저런 사람이 있냐며 투덜거리며 넘어갔지만, 내 뇌리에는 아직도 그 아주머니의 멋쩍은 웃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분명 어머니와 같은 또래의 한 아주머니. 양 손에 무거운 짐을 든 채 분명 중앙차로에 있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었던 그 아주머니의 표정에는 힘겨운 주름이 가득했다. 같은 또래의 두 아주머니였지만 어머니는 음악을 들으며 자가용을 몰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무거운 짐을 든 채 버스를 타려고 힘겹게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니체가 대표적인 안티크리스트로 뽑히는 까닭은 단순히 그가 기독교의 도그마틱한 신의 진리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니체가 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이런 말을 직접 했던 적은 없었으며 단지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등장했던 대사의 한 마디였을 뿐이었다(물론 '신은 죽었다'는 말은 니체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지만 단순히 안티크리스트 차원에서 보자면). 이처럼 그가 그리스도교를 혐오했던 까닭은 단순히 신이 있고 없고, 기독교적 진리가 맞고 안 맞고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싫어했던 것은 우리나라 말로 '공감'으로도 번역되는 sympathy, 다른 말로는 연민의 감정이었다. 그는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보편적인 연민의 감정을 혐오했다. 연민의 감정이야말로 열등하고 무능하고 뒤쳐지는 대중들이 갖는 패배의식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리스도교(불교를 비롯한 대개의 종교들이)의 윤리가 이러한 보편적 감정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남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마음이 아파진다는 의미의 공감은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감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말하는 윤리에는 이 보편적 공감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대신 그는 영웅을 찬양한다. 그가 찬양하는 영웅적 인간 '위버멘쉬'는 대개의 사람들이 갖는 보편적 감정에서 벗어나, 아니 보편적 감정을 극복하고 열정적이고 진취적은 삶을 쟁취하는 초인이다. 시시한 사람들은 시시하게 고통스러워하지만, 영웅과 같은 위대한 사람들은 위대하게 고통을 감내하며 위대한 수난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나 보편적 감정이 바라는 고통의 부재는 순전히 부정적인 이상이며, 오로지 니체가 예를 들고 있는 알키비아데스, 프리드리히 2세,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만이 그 위대한 수난을 감내하는 고귀한 존재들인 셈이다.

어쩌면 니체는 맞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삶에 있어서 고통의 부재를 바라는 건 허무한 일일 뿐이다. 고통과 슬픔 없는 삶은 없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지 이런 고통과 슬픔에 대한 동정심에 불과하다. 니체에게 있어 사랑의 원천은 동정심, 연민의 감정인 셈이다.

개인적 고통에 접근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그런데 동정은 고통으로부터 개인적 특성을 제거하기 때문에 동정하는 자는 원수 못지 않게 우리의 의지와 가치를 박탈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정을 과시하는 사람은 고통의 필요성 즉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빈곤과 박탈, 위험과 모험, 실수 등의 불운이 그 반대의 사항만큼이나 '개인적인 필요'를 가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동정하는 자들은 불운이 한 존재를 구성하는 경제에 필수적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동기와 이유를 얻고, 오래된 상처를 치유하며, 과거 전체를 벗어던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개의치 않는 것이다.

-how to read 니체 중-

이처럼 니체는 고통과 불운이 인간의 '개인적인 필요'를 가진다고 말했다. 즉 고통은 그 인간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과제이자 필요인 셈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극복의 과정을 통해 고귀한 열정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과 불운 속에 살았던 한 인간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인간에게 고통은 단순히 필요였을까? 필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가 그 고통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열등한 존재로 끝이 났던 것이었을까? 그 인간에게 고통이란 걷어냈어야 할 어떤 것이었다면?

니체는 인류의 보편적 사랑을 경멸하고, 이 사랑이야말로 동정심으로부터 연유된 나약한 심성이라고 여겼다. 물론 사랑의 원천이 고통에서 비롯된 동정심이라는 니체식의 인식 그 자체도 많은 논란이 불거질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동정심 혹은 연민의 감정을 니체의 표현 그대로 시시한 사람들의 훌쩍거림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니체의 반대편에 서려면 동정심, 다르게 말하면 인간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들 또한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니체는 나폴레옹 같은 정열적인 영웅들을 노래하지만, 사실 우리 주위에는 사랑의 영웅들도 많다. 인류의 죄를 짊어진 예수부터 최근 우리 곁을 떠난 고 김수환 추기경이나 고 법정스님, 혹은 지진의 참사에서 한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구조대원들, 스스로 아프리카 오지를 찾는 열혈 의사들 등. 사람들은 나폴레옹 같은 강렬한 영웅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김수환 추기경 같은 사랑의 영웅에게는 머리를 조아린다.

니체가 추구하는 정열의 삶이 인간사를 수직으로 뻗쳐 가른다면, 예수와 같은 사랑과 동정심의 삶은 모든 인간들을 횡으로 아우른다. 고통의 극복, 이를 통해 쟁취할 수 있는 진취적인 삶도 물론 고귀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이야말로 지금의 인류의 모습을 가능케 했던 인간사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아니었을까. 또 사랑이야말로 니체의 궁극적 목적인 '니힐리즘의 극복'을 이룰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함께 살아가는 삶에 더 가치를 두는 것,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건 이런 자세가 아닌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나'만의 성공이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저 '나'가 밟고 이겨야할 상대들일 뿐, '경쟁'이라는 번지르르한 말 뒤에 숨겨진 치졸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철저하게 파편화된 개인들로 이루어진 지금의 사회는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삶이 가장 현실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위버멘쉬, 초인들로만 이루어진 사회.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능과 열등감에서 오는 고통을 그대로 감내할 줄 알며 오로지 자신만의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그런 사회. 어쩌면 니체의 긍정적 이상은 바로 오늘날 바로 이 자리에서 실현되었다. 영웅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역설적으로 영웅은 찾아볼 수 없는 이 사회에서 말이다.

  • G_gatsby 2010.05.27 01:30 # modify/delete reply

    과학이 인간을 지배하고.
    이성이 감성을 조롱하고.
    쥐는 인간을 잡아 먹는게 요즘인것 같습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느끼는게 많네요.

    • 그러게요 요즘 세상이 참...ㅎㅎ
      그나마 이번 선거 결과가 제 마음을 달래주는 듯 하네요.

  • 복돌이^^ 2010.05.27 14:06 # modify/delete reply

    역설적으로 영웅이 없는 사회라~~~~~!!!
    좋은글 잘보고 가요...한참 생각해 봅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 너돌양 2010.05.27 23:52 # modify/delete reply

    아무튼 지후님 참 대단하십니다 전 그냥 수박겉핧기식인데 말이죠. 전 철학이 진짜 약해요 ㅠㅠㅠㅠㅠㅠ

  • 난도광마 2010.05.30 17:47 # modify/delete reply

    U 지후님 역시 박학하시네요 ^^
    S 참고로 대패삼겹살도 맛있답니다 ㅋㅋ
    B 글 잘 읽고 갑니다 ~

  • 밍씨세상 2010.05.30 22:36 # modify/delete reply

    "사람들은 나폴레옹 같은 강렬한 영웅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김수환 추기경 같은 사랑의 영웅에게는 머리를 조아린다."
    공감되는 말입니다!!
    그래도 저는 즐겁게 살겁니다^^

  • 어멍 2010.05.31 00:12 # modify/delete reply

    다재다능하고 하면 된다는 정신력을 요구하는, 슈퍼맨과 슈퍼우먼을 요구하는 현대자본주의 사회지요. 다정도 병이고 연민도 사치인 시대입니다.

    김형오 국회의장이 김대중 대통령 서거때 그랬지요. 이제 영웅의 시대는 갔다고.
    그가 보기엔 이명박 대통령이 그저 고만고만한 행운아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려^^

    인류역사를 보아도 신의 시대에서 영웅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왔지요.
    하지만 그 인간은 아직 성숙하고 깨어있는 각성한 시민은 아닌 듯 합니다.

    인간의 긍정적인 감성과 이성을 넘어선 그 이상의, 그것의 결합인 각성, 깨달음이 필요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입니다.

    저도 폐지줍는 어르신들을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적어도 그런 나라는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 번은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커를 끄시는 할아버지가 입은 낚시조끼에 벤츠 로고가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더군요. 물론 짝퉁이겠지만 참 아이러니한 풍경입니다.

    생각도, 고민도 저와 유사하신 게 동련상련입니다.

    & 공교롭게도 최근 제 포스팅에 올린 이미지와도 일치하네요.(나폴레옹) 물론 쓰임은 틀리지만^^

    • "적어도 그런 나라는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뭔가 짠하게 다가옵니다.
      적어도, 적어도..

  • 꽁보리밥 2010.06.05 17:59 # modify/delete reply

    니체의 사상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부분 동감은 합니다
    열심히 준비한만큼 얻는 것이고 연약한 자는 그러한 준비성이
    없으니 어쩜 당연한 대우를 받을수도 있겠죠.
    하지만 본의 아니게 그런 입장이 되신 분들도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야긴 아닐거라 여깁니다.
    대한민국을 잘 살게 만들어주신 부모님들 여전히 자식들에게
    다 퍼주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를 뒤로 하신분들을 보고서 니체가
    어떤 말을 할까요?

    • 아 전적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
      역시 또 배우게 되었네요!
      감상에 젖다보니 아무래도 한 쪽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 하얀잉크 2010.06.07 02:23 # modify/delete reply

    사색하시는 지후아타네호 님이 느껴지네요 ^^ 그나저나 요즘 포스팅이 뜸하시네요

    • 그러게요, 포스팅 꾸준해야 하는데....
      또다시 시험기간이 와버렸네요.
      아마 방학이 되야 다시 포스팅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COCOA 2010.07.29 12:30 # modify/delete reply

    글 잘 읽고 갑니다.
    오늘 아침에 이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깔끔하게 정리된 글 보고 제 생각도 조금은 정리가 되었네요.
    ㅋㅋㅋ


영화 "동승"에는 큰 스님과 동자승이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나온다.

큰 스님: 도념아, 저 소나무 밑의 바위가 네 마음 속에 있느냐 마음 밖에 있느냐?
동자 스님: 예, 마음 밖에 있습니다.
큰 스님: 이 녀석 봐라, 거짓말을 하네.

다음 날,
큰 스님: 도념아, 저 소나무 밑의 바위가 네 마음 속에 있느냐 마음 밖에 있느냐?
동자 스님: 예, 마음 속에 있습니다.
큰 스님: 이 녀석 봐라, 거짓말을 하네.

데이비드 흄은 말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없다. 오로지 안다고 믿을 뿐이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객관적인 지식인지 아니면 흄이 말한 것처럼 믿음일 뿐이지는 철학사에서도 오랜 세월 계속된 논쟁이었다. 우리가 평소 진실이라고 혹은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과연 진짜로 진실인지, 위의 동자승처럼 바위가 정말 마음 속에 있는지 마음 바깥에 있는지 가려내는 일은 참 어려운 문제다. 인간 이성을 통해 무엇이든 알 수 있다던 대륙의 합리주의도 무너진지 오래이고, 서구의 가톨릭이나 동양의 유교처럼 절대적이었던 신념이나 가치도 해체된지 오래다. 대신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 믿음이 정말 옳은 것인지는 여전히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들 제가 갖고 있는 생각과 신념이 옳다는 전제 아래 삶을 살아가며, 혹은 이를 기준으로 삼아 서로 남을 비방한다. 정답이란 건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감독인 쿠엔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을 통해 이러한 우리의 단면을 희화화한다. 아니, 조롱한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일 테다. 은행털이 조직에 가담했던 '오렌지'는 본래 경찰이었다. 소탕 작전을 위해 은행털이범으로 위장 잠입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무렵이 다가오면서 조직에 가담했던 나머지 인물들은 그를 경찰로 의심한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가 스파이 노릇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직원 중 '화이트'는 끝까지 '오렌지'가 스파이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 확신에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오렌지'에 대한 연민 혹은 '오렌지'가 총에 맞고 자신에게 의지하던 모습 때문이었다. 결국 조직원들끼리 '오렌지'를 죽일 것이냐 살려둘 것이냐를 두고 싸우다가 서로 총을 발사하고, 즉사를 면한 '오렌지'와 그를 지켜줬던 '화이트'는 함께 손을 잡고 죽어간다. 그런데 그 때, '오렌지'의 한 마디. "I am a cop" 그리고 이어지는 '화이트'의 절규.

관객들은 영화의 처음부터 '오렌지'가 경찰이란 사실을 알았다. 영화는 처음부터 '오렌지'가 경찰이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 몰랐던 것은 오로지 '화이트'뿐이었다. '오렌지'의 진실된 말들, 괜찮은 인간성에 의해 바보가 된 것도 오로지 '화이트'뿐이었다. '화이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절망스러운 결말이었을 것이다. '오렌지'는 절대 경찰이 아니라는 자신의 확신에 목숨까지 걸었건만 결국 그 확실했던 믿음이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어리석은 '화이트'를 비웃었겠지만, 동시에 관객 자신들 또한 이런 '화이트'의 절망으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감독 타란티노의 메시지다. 절대적인 대상은 없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도 사실 믿는 것일 뿐일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하는 대상도 사실은 그와 다를 수 있다. 그저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기준으로 세상 모든 것을 재단하는 우리도 언제 '화이트'처럼 큰 허망함을 겪어야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이 영화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뷔작이다. 지금은 명장의 반열에 오른 그이지만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타란티노는 평범한 비디오 가게 종업원이었다. 그는 '관객'의 눈으로 수많은 영화를 섭렵하면서 틈틈이 자신만의 첫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타란티노는 이 시나리오를 토대로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던 중 시나리오가 당시 유명 연기파 배우였던 하비 케이틀('화이트'역)에게 우연히 읽혀졌고, 하비 케이틀이 이 시나리오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아낌없는 지원을 하게 되었고, 본인이 직접 출연도 하게 되었다. 하비 케이틀이 제작 지원을 하자 동료 연기파 배우들도 삼삼오오 타란티노의 시나리오에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저예산 영화로 만들어질 뻔했던 타란티노의 첫 작품 '저수지의 개들'은 공식 개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탄탄한 시나리오와 개성 넘치는 연출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다. 물론 천재적인 데뷔작으로 인해 타란티노가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이야 시간을 거스르고 시간의 순서를 뒤바꾸는 시나리오 전개는 TV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기법이 되어버렸지만, '저수지의 개들'이 개봉할 90년대만 하더라도 상당히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저수지의 개들'은 은행털이범들의 영화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은행을 터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메인 시점은 은행을 털고 난 후의 시간이며 은행털이 갱이 조직되는 과거의 이야기가 산별적으로 전개된다. 영화의 시간은 하루 전으로, 한 시간 전으로, 한 달 전으로 제 마음대로 바뀌어버린다. 그제 어제 오늘로 이어지는 일원화된 나란한 시간 전개는 없다. 마치 이 영화를 다 본 관객이 기억의 단편들을 모아 영화를 되새이는 것 같다. 영화의 진행은 자동차 수동 기어의 움직임처럼 이쪽으로 들어갔다 저쪽으로 들어갔다를 반복한다. 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타란티노의 천재적인 기어 변속 덕분에 극의 흐름은 산만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건 물론이다. 덕분에 다른 갱스터 영화처럼 시끄러운 총격전이 펼쳐지거나 긴박한 추격전이 시작되지 않아도 영화는 내내 관객을 빨아들인다. 

다른 타란티노의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잔인하다. 은행털이범 중 한 명인 '블론드'가 사로잡은 경찰을 고문하는 장면은 잔인함의 극치를 달린다. 생으로 귀를 자르고, 산 채로 불태워 죽이려는 '블론드'는 오히려 만신창이가 된 경찰 앞에서 환호성을 지른다. 관객들은 마치 자신의 귀가 잘려나가는 것마냥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다. 신기하게도 고문 장면에서 관객들은 하나 같이 고문을 당하는 자의 편에 선다. 이런 관객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아는 이 영화는 '블론드'란 인물이 되어 관객을 계속 괴롭힌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킬빌'이나 '바스터스:거친 녀석들'에서는 주인공이 '나쁜 놈'에게 갚아주는 잔인한 행각에 어떤 관객들은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타란티노의 작품들처럼 '유혈이 낭자하다'란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도 없다. 영화에 따라 그 순도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피가 튀고 살이 뜯겨져 나간다. 잔인하다. 하지만 잔인함을 보여줌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잔인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되묻는 것 같다. 어떤 때는 고통으로, 어떤 때는 쾌감으로, 어떤 때는 아름다움의 극치로, 우리에게 제각각 다르게 다가오는 그 잔인함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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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는 화이트와 비슷할 것 같네요. 한번 믿으면 쭉~옳다고 믿는 단순함...ㅎ

  • 저 영화감독, 킬빌 만드신 분 맞나요?
    제가 영화를 잘 안봐서요 ㅋㅋㅋ
    다음에 이 영화 찾아보고, 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처음들어보는 작품이지만
    왠지 줄거리만 읽었는데도 재밌을것같아요>ㅁ<!!!


    부제는 <화이트 바보만들기 대작전>인가요?ㅋㅋㅋ

  • 불탄 2010.01.23 10:58 신고 # modify/delete reply

    이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어느 정도 느낌은 갖게 되었네요.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 저도 이 영화에 대해서 한 면만 적어본거라..
      뭐니뭐니해도 직접 보시고 느끼시는게 최고죠!

  • 렉시벨 2010.01.23 11:22 신고 # modify/delete reply

    영화찾아돌아다니다보면 많이보게되는영화~~ 저수지의개들~
    전아직도못봤어요 ㅋㅋㅋㅋ 시간날때한번봐야겠네요~~^^

  • 티런 2010.01.23 12:06 신고 # modify/delete reply

    타란티노의 저수지의개들.
    참 재밌게 본기억이나네요^^
    기회가된다면 다시 보고싶습니다.ㅎㅎ

    • 저도 가끔 본 영화 다시 보는 게 취미인데
      다시 보더라도 꽤 재밌더라구요ㅎㅎ

  • 쥬늬 2010.01.23 13:22 신고 # modify/delete reply

    맨 마지막에 잔인하다는 글이 영화를 볼까말까 갈등을 생기게 하는군요.
    잔인한영화는 왠지 보기가 싫습니다. 하루종일 찝찝함이 밀려온다는.
    저는 그냥 지후님의 글로 만족할렵니다.

  • 제목이 낯은 익은데 처음 보는 사진이군요.. 잔인한 영화인가보군요..
    저주지가 주는 의미가 더럽고,, 뭐 그렇잖아요.
    영화 역시 그런 분위기...
    주말 잘 보내세요

    • '저수지의 개들'이란 제목은 영화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어요ㅎㅎ
      잘 기억은 안나지만 타란티노 감독이 데뷔하기 전,
      어떤 것에 영감을 받아 뭐든 첫 영화에 저 제목을 쓰기로 해서
      영화의 제목이 '저수지의 개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 G_Gatsby 2010.01.23 17:59 신고 # modify/delete reply

    제목에 끌려서 한번..
    보고 난뒤의 충격에 끌려서 또 한번..
    지나간 영화가 보고 싶어서 또 한번...
    쉽지 않지만, 뇌리에서 잘 잊혀지지 않는 영화이기도 하지요.
    또 오랜만에 좋은 영화에 대한 기억을 더듬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 부스카 2010.01.23 18:05 신고 # modify/delete reply

    오래 전 글이지만 트랙백 하나 남겼습니다.
    편안한 저녁 시간 되세요~

  • pennpenn 2010.01.23 18:24 신고 # modify/delete reply

    위 스님과 동자의 선문답이 인상적입니다.
    한번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 센텔 2010.01.24 09:48 신고 # modify/delete reply

    오옷. 재미있겠군요 ㅇ_ㅇ!
    전에 포스트하셨던 아마존의 눈물도 구해놨답니다 <
    이것도 어디서 구해서 봐야겠어요 ㅋㄱ

    • 센텔님이시라면 아마 재밌어하실 듯 합니다.
      한 번 봐보시길, 추천해드립니다!

  • 탐진강 2010.01.24 12:44 신고 # modify/delete reply

    제겐 좀 어려운 영화군요.
    좋은 한주되세요

  • 탄란티노 감독의 명성과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정작 본 영화가 없네요.
    <펄프픽션>을 보았지만 참 이해하기 어렵고 정신이 어지럽던 기억이 납니다^^;;

  • 우리가 아는것은 없다....안다고 믿는것 뿐이다.....=> 요거 메모 했습니다..^^
    너무 좋네요...^^

    행복한 한주 보내세요^^

  • Slimer 2010.01.25 20:58 신고 # modify/delete reply

    어렸을 적에 많이 들어보았던 영화지만 아직 본적은 없네요.
    영화 매니아였던 형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작품 같은데..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 Reignman 2010.01.26 18:10 신고 # modify/delete reply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은 모두 보긴 했지만 저수지의 개들은 워낙 본지가 오래돼서 좀 가물가물해졌네요.
    귀 자르는 장면밖에 생각이 안나요. ㅎㅎ
    하지만 영화가 주는 강렬한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 타란티노 갠적으로 좋아하는 감독입니다..
    워낙 하드하고 괴짜스러워서 ㅎㅎ
    저는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작품이 오래되었지만 기억에 남네요..

  • 디킨스 2010.02.15 02:10 # modify/delete reply

    어제 이 영화를 보게되었습니다.
    바스터즈보고 이사람의 데뷔작은 어떨까 해서 말이죠.
    지금이야 시나리오 전개가 그냥 그렇다만.. 저 시대때에
    저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참 놀라만 햇을듯합니다.ㅋ
    지금봐도 긴박감 넘치는 영화.ㅎ
    리뷰 잘 읽고갑니다.

    • 지금봐도 바스터즈 같은 건 워낙 독특하죠ㅎㅎ
      펄프픽션도 한 번 보시길,
      타란티노 작품세계가 잘 드러나있는 영화랍니다.

  • 어멍 2010.03.16 20:14 # modify/delete reply

    재밌게 잘 봣습니다.
    거칠은 세계엔 어울리지 않는 화이트의 믿음, 블론드의 잔인함(이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듯), 오렌지의 긴장과 압박감(그런 경찰, 그 압박과 임무를 초지일관 수행하려는 경찰이 있을지는 개인적으로 의문입니다. 거의 이중간첩 비슷하게 타락하지 않을까 싶네요)

    예산은 정말 적게 든 듯, 출연료 빼고는 한국의 19금 비급영화보다 좀 더 든 듯 하네요.

    • 아마 출연료도 얼마 안 들었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배우들이 순전히 작품만 보고 출연에 응했다고 들었거든요. 당시 초짜였던 타란티노에게 많은 제작비가 떨어졌을 리도 없고..

다음달부터 군대의 고기 반찬이 줄어든다고 한다. 돼지갈비는 1년에 13번에서 9번, 오리고기는 12번에서 9번, 닭고기 순살은 하루 20g에서 15g으로 각각 횟수와 양이 줄어든다. 국방부에 따르면, 지난해 육류 가격은 15%나 상승한 반면 올해 군대 급식 예산은 고작 4% 정도만 늘어났다고 한다. 때문에 군 장병들의 식탁에 고기 반찬을 줄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고기 대신 오징어나 굴, 버섯, 파프리카 등을 배식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맛있는 고기 반찬에 환호하던 장병들이 지을 실망스러운 표정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고기 가격이 올라서 사병들에게 고기 반찬을 줄 수가 없다니, 처음에는 무슨 북한 관련 뉴스인 줄 알았다. 북한 같이 못 사는 나라가 아니고서야 돈이 없어서 사병들 급식을 줄인다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상황인가? 겉으로는 '강한 군대'를 표방하면서, 한편으로는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병들의 먹거리를 줄이려는 현 정권이다.

우리나라의 국방비 지출은 국내총생산의 약 3% 정도로 일본, 중국, 영국보다도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또 정부지출 분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국방예산이기도 하다. 해마다 막대한 돈을 국방비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돈이 대체 어디에 쓰이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사병들에 대한 지원은 열악하기만 하다. 올해 예산이 깎이자 당장 사병들의 고기 반찬부터 거두어들였고, 작년에는 금융위기가 닥치자 얼마 되지도 않는 사병 월급부터 동결시켰다(참고로 장교들의 월급은 동결되지 않았다). 또 이전 정권이 선진 병영문화 수립을 위해 늘린 사병들에 대한 군 복지 예산 또한 대폭 삭감시켜버렸다. 덕분에 사병들은 보일러 한 번 마음 편히 못 틀어보고 올 겨울을 버티게 되었다. 불행이도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이렇게 사병들이 추위에 벌벌 떨 동안 군 수뇌부와 장교들은 두둑한 월급은 물론 퇴임 후 연금까지 받아가면서 호위호식하고 있다. 참고로 국내 복지단체 중 군인공제회 만큼 큰 손을 가진 단체는 찾아볼 수 없다.

정부나 군은 사병들에 대한 지원을 굉장히 아깝게 여긴다. 아무리 군 복무가 의무라고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월급이나 열악한 복무 환경은 그 의무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마저 지급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라에 돈이 없어서도 아니다. 요즘 지어지는 정부나 지자체 건물들을 보라. 마치 첨단 IT기업의 연구소에 와있는 것처럼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들 일색이다. 나라가 돈이 없다는 것은 순전히 옛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병들에 대한 지원은 전무하다. 의무라는 명분으로 젊은이들을 징병하고 긴 시간 복무하도록 강제하면서 국가나 군이 이들에게 해주는 것은 거의 없다. 말이 좋아 국방 의무이지, 국가가 20대 청년들을 상대로 하는 '착취'나 다름 없는 수준이다. 그러는 와중에 정부와 군 수뇌부가 군필자들을 상대로 마치 군 복무를 보상해주는 것 같이 생색을 내는 제도가 하나 있다. 바로 '군 가산점 제도'이다.

군가산점제란 제도에서 국가가 군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상해주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 '가산점'이란 어감을 이용해서 마치 국가가 군필자들에게 일종의 보너스(+α)를 제공해주는 듯이 눈속임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보상'은 반드시 주는 이와 받는 이를 필요로 한다. 보상을 받는 사람은 그만큼 (+)를 얻지만 반대급부로 보상을 해주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 된다. 군가산점제라는 보상제도는 마치 국가가 (-)를 감수하고 군필자들에게 (+)를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군필자들이 보상 받을 (+)를 만들어주는 것은 군필자를 제외한 여성, 군면제자, 미필자들의 (-)이다. 군가산점제로 정부가 군이 감안해야 할 비용은 제로다. 단지 공무원 채용 시험에서 군필자들에게 가산점만을 부여해 채점을 매기는 것 뿐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공무원 채용의 기회를 잃는 것은 여성들이나 면제자들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아챙기는 것처럼 국가의 군가산점제 시행으로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국가가 군가산점제의 비용을 치르는 것이 절대 아니란 이야기다. 군가산점제에서 국가나 군이 군필자들에게 해주는 보상은 없다. 생색 뿐이다.

이를 남녀 성별 대결로, 혹은 군필자와 면제자 간의 형평성 문제로 호도하여 군대 보상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이 많다. 여성들과 면제자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먼저 국가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줬나부터 돌아보길 바란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당장 사병들의 고기 반찬부터 줄이는 게 이 나라 군 수뇌부이다. 2년이란 긴 복무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푼돈 몇 푼 쥐어주는 게 그들이고, 그 몇 푼 안 되는월급마저 경기가 안 좋다는 이유로 제일 먼저 깎아버리는 게 바로 그들이다. 이런 군 수뇌부, 국가의 잘못을 왜 여성들과 미필자, 면제자들이 부담해야 하냐는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고민해봐야 한다. 단지 의무란 명목만으로 언제까지 아무런 보상도 대가도 없이 이 나라 젊은이들을 부려먹어도 된단 말인가. 당연한 것을 단순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정정당당하게 따지고 되물을 줄 알아야 한다. 군가산점제로 군필자들과 여성단체들이 아옹다옹 싸우는 모습, 어쩌면 군 수뇌부가 바라던 그림일 수도 있다.


  • ^^

    어젠가 저도 이 뉴스를 접했는데요.
    그렇지 않아도 고맙고 미안하기만한 군인들한테, 고기 배식까지 줄이겠다는 발상은 도대체 어느 머리에서 나온건지...
    정말 너무한다 싶더라구요.;;

    도대체가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기준도 없고, 일관성도 없고...
    참 답이 없다 싶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 pennpenn 2010.01.14 17:14 신고 # modify/delete reply

    남성들의 군 복무기간은 어떤 형태로든
    보상이 이루어 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머 걍 2010.01.14 20:32 신고 # modify/delete reply

    위 간부들 반찬은 안줄이겠죠?

  • 가슴이 아픈 정도네요.
    슬데없이 예산 낭비 펑펑하면서 정작 건강해야할 국인들에게 고기 반찬을 줄인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드네요. 도대체 국가를 의하는 것인지 개인저긴 배를 채우겠다는 것인지...정말 양심에 털이 난 것 같습니다.

    • 그러게나 말입니다. 맛있는 거 더 얹어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고기 반찬을 빼앗다니요.

  • Deborah 2010.01.14 21:37 신고 # modify/delete reply

    저도 이야기는 들었는데요. 미국에서는 그런 혜택이 있어요. 국가의 부름을 받아서 현역으로 갈 경우에는 다니는 직장에선 강제로 해고 할 수도 없고, 군대를 나온 사람에게는 공무원직의 혜댁이 따라갑니다. 한국은 미국의 그런 실정을 따라하려고 하는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이런식으로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군요. 문제가 다분히 있군요. ㅡ.ㅡ

    • 미국을 보면 참 선진국답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전쟁 때 찾지 못한 유해를 발굴하겠다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애쓰는 모습을 볼 때면,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나 싶죠. 우리가 우리 장병들 먹을거리 하나 챙겨주지 못하면서 감히 선진국이다 강대국들 반열에 올랐다 뭐다 떠드는 게 참 우스워집니다.

  • ageratum 2010.01.15 08:26 신고 # modify/delete reply

    고기반찬을 늘려줘도 모자를 마당에 줄이다니.. 참..
    사기라는게 정말 사소한것에서 영향을 받는건데 말이죠..
    암튼 군가산점 제도는 계속 말이 많을거 같네요..
    남자이긴 하나 이게 되는게 맞는건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공무원 준비를 안해서 그런거 같기도 하고..;;

    • 제가 쓴 내용도 제 의견에 불과하니까요,
      군가산점제 문제는 계속 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 부스카 2010.01.15 09:42 신고 # modify/delete reply

    고기 반찬을 줄이는 것에 대해서 이슈화가 되자 국방부에서 해명글이라고 내놨는데
    뭐 채소와의 비율을 맞추기 위해서라는는 둥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해명이라고 했던데
    고기 반찬 속의 고기가 웃을 일이네요.

  • Slimer 2010.01.15 10:03 신고 # modify/delete reply

    명바기가 군대에서 빤쓰를 도둑맞아 봤겠어요, 그렇다고 김치볶음에 고기만 찾아먹다 식판으로 대가리를 찍혀 봤겠어요...

  • 트레브 2010.01.15 10:06 신고 # modify/delete reply

    모든 예산이 줄어든건가요? 생활보호 대상자에게 배정도 줄어 들었다고 하는 것 같은데... 모든 예산은 4대강은 가나요?

    • 4대강 예산을 확보하다보니 복지 쪽 예산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기초수급자나 등록금 지원, 장애인 지원 등 대부분 복지 예산이 깎여버렸죠.

  • ㅋㅋ..제목보고..확장된 실제반영도가 화악~ 느껴지네요~
    완전 제로섬 게임인거군요~ 으으

  • 완전히 불쌍한군인들...ㅜㅜ
    맛있는고기반찬도못먹고....
    월급으로 PX가서 냉동식품이라도 사먹어야겟지요

  • leedam 2010.01.15 12:01 신고 # modify/delete reply

    뜨거운 맛을 봐야 고기가 나오겠군요

  • 감성PD 2010.01.15 18:33 신고 # modify/delete reply

    허허....먹어도 먹어도 배 고픈 시기에;;;
    고기반찬이 줄다니.....

  • 간부잘들어라 2010.01.17 22:58 # modify/delete reply

    간부월급은 안줄이고 일반병사 고기줄이냐 아 드른나라네 일은 밑에놈이하고 전쟁하면 밑에놈이 더죽을텐데 사병들 안불쌍하냐?

  • 종이술사 2010.01.18 22:01 # modify/delete reply

    생색내기 정책ㅋㅋ
    우리나라가 젤로 잘하는거죠

  • 어멍 2010.01.23 01:11 신고 # modify/delete reply

    60~70년대 우리 아버지 세대에는 군 간부들이 양식도 빼돌려 사병들이 배를 곯았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곡괭이 자루로 맞기까지...가끔 보면 군대에서 크게 맞아서 지금도 허리가 안좋다느니 하는 어르신들이 몇몇 있습니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다고 인간의 탐욕, 자본의 생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상병 만기제대한 노무현 대통령은 군에서 썩는다는 표현으로 설화를 격기도 하였지만 사병 처우개선에 관심을 두셨지요. 반면에 군 미필인 이명박 대통령은 병역이 신성하고 자랑스런 의무라면서도 야박하기 그지없지요. 웃긴 일입니다.

    군가산점제에 대한 +,- 이론은 참고할 만하네요. 쉽지는 않겠지만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겠네요. 개인적으론 아직 뭐가 옳은지 정리가 안 되고 판단이 안섭니다.

    여성, 군미필자들이 상대적 불이익을 받지는 말아야겠죠. 그러면서도 뭔가 군필자에게 실질적인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대안이 무엇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게 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구체적 대안은 무엇인지 궁굼하군요.

    • 군필자에 대한 인센티브...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긴 합니다만, 일단 사병들 월급부터 상식 수준으로 올려주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나라 육군은 너무 비대화되어있습니다. 기형적인 육해공 비율이라고 들었고요. 하지만 절대 바뀌지 않죠. 군 수뇌부는 전부 육사출신장교들인데, 그들이 쉽게 자기네들 밥그릇 내놓을리가 없으니까요. 육군 규모 줄이고 그만큼 줄어든 장교들에 대한 봉급 사병들에게 지급해도 사병들의 월급 엄청 오를겁니다 아마.

  • 말장난 2010.02.02 21:35 # modify/delete reply

    군대 가는사람들은 좋아서 2년간 노동 제공해주는거 아닌데 말입니다.
    얼마 하지도 않는 고기반찬(말이 고기지 저기서 주는 고기가 제대로된 고기나 나온답니까)도 못먹는건가요.
    최소한 월급은 주어져야한다고 보는데.. 이건 정말 아닌것 같습니다.
    이건 국가의 이름을 댄 노동 착취일 뿐이지. 나라에 대한 의무라고 보지 않습니다.

  • 세렌디퍼 2010.03.25 00:16 # modify/delete reply

    군 간부봉급 5년째 동결이고, 올해역시 봉급 동결입니다. 그리고 군 간부 식당의 경우는 간부들이 따로 식대를 내고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이와 관련한 국고보조 예산 없습니다) 간부식당 반찬과 사병 반찬얘기하는 것은 전혀 맞지가 않는다고 생각되네요. 고기반찬이 줄은 것은 밝혀진 것이지만, 이 외에 부가적인 복지(병영생활관, 기타 문화시설 등)등은 전반적인 차원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뭔가 쓰기전에 제대로 알아보고 쓰셨으면 좋겠네요.

    • 제가 언제 간부식당 반찬과 사병 반찬을 비교한 적 있나요?
      간부들은 직업 군인들인데 식대를 내고 식당을 이용하는 건 당연한거 아닌가요?
      또 군대의 전반적인 복지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고도 이야기한 적도 없고요.
      단지 예산이 줄었다고 장병들 고기 반찬부터 줄이는 군 수뇌부의 치졸한 마인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뿐인데, 대체 무엇이 그리 불만이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