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스템 신봉자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악설을 지지하는 건 아니다. 모든 이들이 악하다는 관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하다. 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을 뿐이다. 물론 절대적인 숫자를 가지고 비교하자면 선한 이들이 훨씬 대다수일 거고 악한 이들은 일부에 불과할 거다. 하지만 세월호 선장이 수백의 생사를 좌지우지 했던 것처럼 그 일부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거다. 사람을 믿는다는 건 다분히 낭만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믿을 수 있는 건 시스템뿐이다. 그래서 항상 '그것이 알고싶다'는 상중 형님의 강조된 멘트로 끝을 맺는다. "명확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합니다."

복잡한 시스템이라고 해서 반드시 개인의 자유를 갉아먹는 건 아니다. 구조주의라는 건 언어학에서 시작되었던 것처럼 구조란 것에 가장 대표적인 예인 언어만 봐도, 언어가 복잡하다고 해서 그 언어를 쓰는 이의 표현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표현이 풍부해질 수 있다. 이처럼 구조와 주체를 반비례적인 이분법으로 보는 건 수십 년 전에 폐기된 관점에 불과하다. 오히려 요즘의 이론가들에 의하면 주체성이 발현되는 과정은 그 시스템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부터 비로소 시작된다. 어쨌든 중요한 건 시스템이라는 것.

거듭 고민해봤지만, 나에게는 애국심이 없는 것 같다. 사실 애국심이란 의미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알지도 못하는 걸 가졌을 리는 만무. '나라'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나라라고 말한다면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고 그렇다고 단순히 한국 국적자들의 집합체라 하기에도 부족하다. 심지어는 나라라는 실체가 존재하는지 어떤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나라를 사랑한다 운운할 수 있는 것일까.

대신 이건 확실하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 주위의 사람들,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있는 곳,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을 사랑한다. 물론 그들이 내 가족들이나 친구들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국내에서는 생전 모르던 사람이라도 해외에서 그를 만난다면 가족을 보는 것 만큼이나 반갑기 마련인 것처럼. 어쨌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늘 자유롭고 행복하길 바란다. 또 내가 자란 곳이 지금의 모습처럼 언제나 아름답고 정겹고 평온하길 바란다. 노인들이 혀를 차는 것처럼 국경일에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나밖에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애국심과 대한민국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위태로워진다면 나는 그들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나는 드물게도 군대를 가지 못했고 그 흔한 기초군사훈련도 받지 못했지만 전쟁이 나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업햄처럼 탄띠를 둘러매고 총알이라도 나를 거다. 누구보다 잘 뛰어다닐 자신도 있고, 그래야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갖는 생각일 거다. 연평도 포격사건 직후 오히려 해병대 지원자수가 급증했다던 뉴스처럼.

'대한민국:미국'이란 스코어보드는 좀 어색하다. '한국:미국'이라고 하든지 '대한민국:미합중국'이라고 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2002년(이전까지는 그냥 '한국'이란 명칭이 더 일반적으로 쓰였다)을 계기로 대한민국이란 풀네임이 남발되고 있는 것 같다. 스포츠(그중에서도 축구나 월드컵은 더더욱)란 우월의식이나 집단주의가 용인되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다. 그곳에서부터 시작된 대한민국이란 명칭이 그 외의 영역에서도 거리낌없이 쓰이고 있는 게 요즘의 세태인 셈. 대한민국이나 한국이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되묻는 이들도 있지만, 국호에서 '대'라는 의미(서양에서는 great)가 제국주의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긴 시간 겪었던 역사적인 설움 때문이었는지, 보다 크고 웅장한 느낌이 드는 대한민국이란 명칭이 그에 대한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되었던 건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과도한 자기애는 필연적으로 자기에게 해가 되듯이 대한민국이란 명칭에 대한 무감각함은 자민족 우월주의나 쇼비즘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

성이라는 건 욕구다. 수많은 욕구 중 하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유독 성욕에만 관대한 것 같다. 다른 욕구들은 참을 수 있지만 성욕은 참기 힘들다는 위험하면서도 일반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성범죄를 인과의 논리로 보려 한다. 예를 들면 미니스커트 같은 여성의 수위 높은 노출이 성추행을 일으킨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절도 같은 범죄에선 그 누구도 피해자에게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값비싼 물건을 소지하는 행위가 절도를 유발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절도범을 탓할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성욕에 대해서는 관대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성욕보다는 물욕, 소유욕 같은 욕구들이 훨씬 위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TV에서 흡연씬 방영을 금지시킨 건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청소년은 간접 경험으로부터 영향 받기 쉬운, 아직 성인보다 불완전한 인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동 성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아동 포르노를 금지시킨다는 건 결국 성인 남성들을 청소년과 동급으로 보는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거기엔 성욕을 지닌 남성(역시 성욕의 경우에만 유효하다. 살인을 줄이기 위해 영화, 소설, TV 등 각종 드라마 속 살인을 제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듯이)을 청소년과 같이 보호해야 할 존재로 보고자 하는 인식이 근저에 깔려있다.

아청법은 이런 논리에 기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법이다. 성욕은 자제하기 힘든 욕구이며 성범죄에는 필연히 그것을 유발하는 원인이 존재한다는 인식. 여성부가 성범죄에 대해 이렇게 관대한(?) 태도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물론 그것이 정치쇼에 목맨 여성 관료들의 탓이지 국내 페미니즘의 한계라고까지는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런 고민 없이) 아청법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여성들이 여전히 많고 이를 둘러싼 논의도 대부분 표현의 경계를 설정하는 부분에서 그치고 있는 건 아쉬울 따름.

"텔레비전 보니까 프랑스 백수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때려부수고 개지랄 떨던데 우리나라 애들은 제 탓인 줄 알아요. 지가 못나서 그런 건 줄 알고. 착한 건지 멍청한 건지."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주인공 동철(박중훈)이 하는 말이다. 그의 대사처럼 이 사회는 모든 걸 개인의 문제로 환원한다. 개인을 탓하는 건 쉽다. 이것저것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런 접근방법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근본적인 논의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세월호 참사와 교통사고는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교통사고도 여러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건 교통사고도 국가가 배상책임을 지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가령 눈이 내려 빙판길이 된 도로를 주행하다가 교통사고가 발생한 경우 결빙된 도로를 방치한 행정당국에 배상책임을 물린다. 주의·관리를 소홀히 한 탓이다. 설령 운전자의 과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반드시 행정주체에게 책임을 물린다. 하물며 해운 특허업체에 대한 관리감독이나 화물 선적에 대한 감시 소홀, 사후 늦장 구조 등 총체적인 난국으로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참사에 있어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해경이 이유 없이 해체된 것은 아니지 않나. 세월호 참사의 국가배상을 인정하면 일반적인 교통사고 희생자들도 배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현행 법률이 이미 그렇게 시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일까.

피해자들에게 지급되는 배상금이 아깝다니. 그보다 본인들이 납부하는 세금부터 아까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꼬박꼬박 세금을 납부하는 건 우리가 안심하고 운전을 하고 배를 타고 다닐 수 있도록 국가로 하여금 철저히 관리감독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국가는 유병언이나 청해진해운을 때려잡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애초에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위험을 예방·억제하고 참사가 발생하였다면 책임을 물고 제도를 정비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