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세의 열렬한 팬이자 애청자였다. 별밤을 청취하던 세대는 아니지만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를 꼭 챙겨 듣곤 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는데, 그는 문자 사연을 보내는 청취자들에게 문자의 끄트머리에 꼭 본인의 이름을 적어줄 것을 부탁했다. 사연을 소개할 때 '1234님' 같이 전화번호 뒷자리 호칭보다 보내준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 위함이었다. 숫자로 청취자를 호명하는 게 관행처럼 굳어진 지 오래지만 숫자에 '님'을 붙여 사람처럼 부르는 건 언제 들어도 늘 어색하다.

군도. 믿고 보는 윤종빈과 하정우의 조합. 하지만 그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린 작품. 하정우에게는 거의 최악의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번처럼 그가 캐릭터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물론 하정우만의 문제는 아니다. 민망했던 내레이션이 시작되면서 들었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영화 자체가 전반적으로 잘 짜여진 느낌은 아니었다. 웨스턴사극을 지향하면서 산골짜기를 배경으로 하는 화적을 소재로 하는 것부터가 무리가 아니었을까. 차라리 마적단이었으면 어땠을지. 또 스타일리쉬함을 추구하는 웨스턴사극에 조선시대 민초의 애환 같은 다소 장엄한 주제까지 담으려다보니 영화가 이도저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비교하자면 '놈놈놈' 같은 영화에 만주 독립군의 애국심 따위를 억지로 삽입하려는 느낌이랄까. 특히 웨스턴과 민초의 어정쩡한 조합은 배경음악에서 두드러졌다. 배경음악은 컨츄리 느낌의 웨스턴 음악이 깔리는데 뜬금없이 화면엔 성난 백성들의 봉기 장면이 나오고 거꾸로는 장엄한 음악에 게임 캐릭터 같이 생긴 화적단의 모습이 등장한다. 본디 웨스턴 장르라 함은 배경음악이 생명인데.

명량. 기대가 너무 컸던 건지 생각보다는 아쉬운 점이 많았던 영화다. 한 시간 가량 계속되는 전투씬은 놀라울 정도였지만 딱 그 뿐이었다. 그 전투씬에 거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던 탓인지 전체적인 편집이나 극의 전개는 다부작을 염두해둔 영화라 하더라도 영 어색했다. 역대 관객 순위에 올라있는 여타 작품들에 비해서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편. 영화 자체의 작품성이나 완성도보다는 영화보다 더 극적인 역사를 만들었던 이순신이란 개인에 대한 관심이 관객을 영화관으로 이끄는 것 같다.

월드컵을 2년여 앞둔 2000년, 대한축구협회는 대표팀 감독으로 히딩크를 모셔오는데 성공한다. '우리 대표팀도 이제 유럽처럼 수준 높은 축구를 해보자'는 취지였다. 우리는 유수의 명문 클럽을 거친 그에게 선진 축구 전술을 전수받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히딩크의 이야기는 달랐다. 한국팀은 기술적인 면보다는 체력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 모두 의아했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팀이 다른 강팀에 비해 기술이 부족한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히딩크를 모셔와 기술적인 부분을 보완하려 했거늘 정작 그가 하고 싶어하는 건 체력 훈련이라니. 체력을 우선시하는 그의 훈련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축구인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시 말해 입만 아플 뿐.

바르셀로나가 한때 무적의 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체력 덕분이었다. 대부분 바르셀로나를 기술이 좋은 팀으로만 알고 있지만 바르셀로나는 그 어느 클럽보다 많이 뛰는 팀이다. 멀뚱히 제자리에서 패스를 주고 받는다고 티키타카가 되진 않는다. 선수들이 계속해서 공을 받기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티키타카를 할 수 있는 것이고, 공을 뺏기면 바로 압박을 위해 달려들고 공간을 주지 않기 때문에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바르셀로나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선수들의 활동량 저하와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 작품을 크리스토퍼 놀란이 연출한 건 아니지만 감독인 윌리 피스터도 그렇고 전반적인 제작진이 놀란 사단인만큼 기존의 놀란 작품들처럼 등장인물의 이름에서 영화의 힌트나 키워드를 유추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조니 뎁)의 이름은 윌인데 영어로 표기하면 Will, 사전적인 의미로는 '의지'를 뜻한다. 의지라는 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의식적 행동을 하게 하는 내적인 욕구를 의미한다. 기계가 생물이 될 수 없는 건 바로 이 의지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생물은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라 할지라도 종족 번식이라는 의지를 갖고 자가 번식을 한다. 반면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고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기계라도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외부에서 입력한 명령어대로 연산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핀'이란 인공지능 컴퓨터가 의지를 갖게 된다. 주인공인 윌 캐스터의 기억·생각 등이 프로세서에 업로드 되면서 기계가 인간처럼 의지를 갖게 되는 초월체(영화 제목처럼)가 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중요한 맹점이 있다. 의지라는 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내적 욕구이고 그 욕구에 의해 감정이 발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의지와 감정이라는 건 불가분의 관계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트랜센던스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로서의 신보다는 인간과 비슷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갖고 있는 그리스의 신들을 닮아있기도 하다. 영화에서도 에블린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감정은 트랜센던스 스스로를 멈추게 하였다. 바이러스에 대한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블린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전지전능한 트랜센던스도 불합리한 선택을 하고 만다. 인공지능을 무결점적인 존재로 바라보던 기존의 시각을 깨는 순간. 지금까지 자각 능력을 갖춘 미래의 기계 문명이나 인공지능이라 하면 '터미네이터'나 'A.I.', '매트릭스'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고 냉철하고 빈틈이란 찾아볼 수 없는 기계의 이미지를 떠올렸지만 실제로는 스스로를 작동시킬 수 있는 기계, 다시 말해 의지를 가진 인공지능이란 결코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에블린은 죽기 직전 깨닫는다. "윌, 정말 당신이었구나."

좋은 작품은 언제나 물음과 여운을 남긴다. 그런 점에서 괜찮은 영화였다. 고민을 많이 하게 하니까. 과연 무엇을 주인공인 '윌'이라 할 수 있는지. 프로세서와 온라인을 떠다니는 전기 신호인지, 애초에 강에 뿌려진 한줌의 재인지, 아니면 과학기술에 의해 복원된 그의 신체인지. 더 나아가면 '나'란 무엇인지. 정신이 '나'인건지 아니면 육체가 '나'인건지. 두 가지 다 있어야 하는 건지, 하나만 있어도 되는 건지. 여기서 또 재밌는 건 윌의 스승이었던 요셉 태거(모건 프리먼이 분했던)란 이름에서 '요셉'은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의 남편으로 예수의 신체적인 아버지를 뜻한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는 정신적인 아버지인 하나님과 육체적인 아버지인 요셉, 두 아버지를 가진 셈. 물론 섣부른 유추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하는 영화인 건 분명하다.

"대통령께서는 당부하셨습니다." "잠시 후 장관님께서 브리핑하시겠습니다." 브리핑이나 기자회견에서 들을 수 있었던 어투들.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에 대해 극존칭을 쓰거나 다른 관료들이 직속 상관에 대해 높임말을 사용하는 건 이미 관행처럼 굳어진 듯 하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높임법을 쓰든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만 브리핑·기자회견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것이고 그런 공적인 자리에서는 구어체라도 객체높임법을 함부로 쓰지 않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지금이 양반과 상민을 구분하는 시대도 아니고 이런 높임말이 나올 때마다 거북함을 느낀다. 더 문제인 건 이를 문제삼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 이미 체내화되고 익숙해진 걸까. 아마 공식적인 방송에서도 극존칭을 남발하는 곳은 북한과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