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박진감 넘치는 전쟁 영화는 관객들의 로망이다. 실제 현실세계에서 전쟁은 가장 끔찍하고 비참한 인간 행위로 일컬여지지만 영화의 스크린 안에서 전쟁은 최고의 오락물이 되기도 한다. 전쟁은 인간의 가장 말초적인 본능을 긁어주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지고, 기관총에서 연발된 총알들은 파편을 튀기고. 인간 안에 깊숙히 내재되어있는 파괴적 욕구와 폭력성, 인간에게 있어 전쟁 영화야말로 이 본능적 욕구를 분출시킬 수 있는 시원한 돌파구가 되어준다.

기존의 전쟁 영화들이 그랬다. 근육으로 다져진 상반신을 내보이며 일당백의 기개로 수백의 베트콩들을 상대하는 '람보'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전통적이고 가장 전형적인 전쟁 영화다. 적과 아의 명확한 구분 속에서 이런 영화들은 아군의 피는 적군의 피로 갚아주는 원초적인 스토리 라인을 바탕으로 관객들에게 확실한 볼거리와 액션신으로 승부를 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이나 진주만(2001), 블랙호크다운(2001) 같이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컴퓨터 그래픽이란 영화계의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전쟁영화에 입혀졌을 뿐, 재현되는 전투의 스케일이나 사실감을 제외한 전반적인 전쟁의 스토리 라인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사실적인 컴퓨터 그래픽이 동원되어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이 큰 스케일의 전투신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진주만은 그 컴퓨터 그래픽으로 하늘로 향했다. 그동안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 없이는 재현해내기 어려웠던 공중전을 거의 완벽하게 그려냈다. 블랙호크다운은 사실감 있는 컴퓨터 그래픽에 감각적인 스타일을 더했다. 리드미컬한 음악과 함께 재현되는 현대의 시가전은 기존의 전쟁영화에 '세련됨'를 입혀주었다.

하지만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을 기점으로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전쟁 영화는 그 내용과 성격이 180% 달라졌다. 2001년 본토 심장에 행해진 9.11 테러로 인해 미국인들은 큰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테러라는 실체 없는 적과의 전쟁은 미국인들로서는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2차대전 때는 독일과 일본이, 냉전시대 때는 소련이 그 역할을 착실하게 맡아주던 '적'이라는 존재가 모호하고 애매해진 것이다. 이러한 혼란은 이라크 전쟁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전쟁은 하고 있지만 대체 왜 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대체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지금까지 미국(혹은 서구 국가들)은 전쟁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었다. 응당 해야 할 것이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인들은 전쟁 자체에 대해 고민을 갖기 시작했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끔찍한 전쟁을 수행하는지에 대해 자문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경험으로 황폐해져가고 있는 청년 병사들의 상태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미국의 공격을 받고 있는 현지인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겪어야 했던 이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의 전쟁 영화는 달라졌다. 전쟁이란 것에 대한 심오한 고민을 시작한 미국인들의 혼란은 영화의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졌다. 전처럼 단순한 흥미 위주의 볼거리 영화는 관객과 전문가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대신 전쟁이라는 한정된 시공간 내에서 점차 한계에 부딪혀가는 인간의 나약함, 전쟁의 공포와 잔인함에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젊은 군인들, 끊임없이 전쟁을 필요로 하는 미국 군수산업계의 압력에 대한 자각 등이 전쟁 영화의 내용으로 새롭게 채워지고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의 후속편으로 제작된 드라마 더 퍼시픽(2010)에서는 전쟁의 경험을 통해 정서가 황폐해지다못해 서서히 미쳐가는 주인공들이 여과없이 등장한다. 자신의 처지와 별다를 것이 없는 일본군을 죽이려면 먼저 그 자신이 손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전쟁광이 되어야 하는 현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한 전역자들. 전편과 비교해볼 때 전투신의 분량이나 세밀한 고증을 통한 사실적인 묘사는 다소 부족했으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군인들 개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깊이 있고 심층적으로 묘사되었다.

이오지마 전투에서 승리해 수리바치산 정상이 성조기를 꼽는 유명한 사진을 다루고 있는 아버지의 깃발(2006) 또한 전쟁으로 만들어진 영웅주의에 대한 허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전쟁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영웅은 개인이 국가가 강요하는 대의 안에서 희생당하고 소모되는 현실을 아름답게 미화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영웅이 되었던 이들은 자신의 영웅담이 결코 아름답거나 용맹스럽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수없이 죽어간 동료들을 남겨두고 자신이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과 함께 전쟁 영웅이 된 현실에 힘겨워 한다.

아바타를 제치고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허트로커(2008)는 전쟁이 인간에게 주는 극도의 공포와 중독성을 다루고 있다. 폭탄물 처리반인 영화의 주인공은 정상적인 인물이 아니다. 제멋대로 영웅 행세를 하며 긴장과 공포를 즐기고 이를 통해 느끼는 희열 같은 것에 중독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쟁은 그의 삶 자체가 되었고, 결국 그는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그를 통해 일그러진 영웅 자신과 이들을 만들어내는 현대인들에게 섬뜩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린존(2010)은 보다 직설적으로 전쟁에 대한 명분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내의 대량살상무기로부터 자국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라크 전쟁을 개시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과연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 상부의 명령에 의해 있지도 않은 대량살상무기를 찾아 해매는(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군인들의 '똥개훈련'은 전쟁의 명분을 넘어 과연 어떤 이들이 전쟁을 원하는 지에 대한 의문을 갖도록 만든다.

더 이상 영화에서 '나'에게 고통을 주는 대상은 광기 어린 일본, 독일 군인이 아니다. 바로 전쟁 그 자체가 고통의 대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쟁이란 경험이 인간에게 주는 무게감이 전쟁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국내에서 개봉되고 방영된 전쟁 영화나 전쟁 드라마는 다소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아직 분단을 벗어나지 못한 현 상황의 한계였을까. 전쟁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이의제기를 시작한 해외의 전쟁물들과는 달리 국내의 영화나 드라마는 여전히 전투신의 화려함에 목숨을 걸고 단순한 서사 구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혐오감 嫌惡感 [명사] 병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감정

국어사전에 나오는 '혐오감'의 의미이다. 말뜻처럼 혐오감이란 어떤 것에 대한 불쾌한 느낌이 극대화된 감정.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대상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가식적인 정치인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정리 안 된 겨드랑이 털을 혐오하고, 어떤 사람은 징그럽게 생긴 바퀴벌레를 혐오한다. 혐오감이 참 불편한 감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혐오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혐오감을 느끼는 대상들을 없애려 하는 것은 과도한 발상이다. 물론 이런 발상이 실제로 이루어진 적이 있었다. 반 세기 전, 아돌프 히틀러란 인물에 의해.

개고기를 혐오하는 사람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애완견을 길러온 사람들, 혹은 개고기를 먹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혐오하고 개고기를 먹는 사람을 혐오하고 개고기 식문화를 혐오한다. 이들 중 어떤 이들은 복날마다 거리로 나와 개고기 반대 시위를 벌인다. '개는 인간의 반려동물입니다', '개를 먹는 것은 야만적입니다', '개에게도 감정이 있습니다' 등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말이다. 이들을 거리에 나서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역시 혐오감일테다. 자신이 사랑하는 개가 끔찍하게 잡혀먹는 것을 차마 지켜볼 수 없는 혐오감, 불에 그을린 채 모란시장에 늘어져 있는 식용 개들을 바라볼 때 드는 혐오감 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화제가 되고 있다. 안방극장 가족드라마로서는 처음으로 동성애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느 연인들처럼 사랑을 속삭이고 스퀸십을 하는 게이 커플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드라마의 동성애 코드에 왜 불편해 했을까?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천륜이 무너진 것에 대한 인류애적인 죄의식 때문에? 아니다. 단지 동성애를 혐오하기 때문이다. 남남 커플의 다정다감한 모습이 보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했던 어느 날, 야동을 보려다가 실수로 남성끼리의 성행위가 찍힌 야동을 본 적이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보기에 너무 불편했다. 혐오스러웠다. '인생은 아름다워'에 나오는 게이 커플의 모습을 볼 때도 어떤 때는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한다. 하지만 동성애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동성애자들의 동성애가 적어도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마음 속의 약간의 불편함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동성애 자체를 반대할 수 있을까?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마다 천성과 환경이 다른데 사람마다 저마다 다른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동성애자들이 바라는 건 자신들에 대한 혐오감을 거두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마음이 불편한 것을 인내할 수 없어서 그 혐오감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지 말아달라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 뿐이다.

배가 몹시 고픈 늦은 오후, 지하철 역에서 나와 집으로 가던 중 삼겹살을 사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정육점에서 삼겹살을 사고 입속으로는 군침을 삼키며 신나게 길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맛있는 삼겹살을 기대하며 들떴던 기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길을 가던 중 마주치게 된 한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그 할아버지는 골목을 다니며 손수 모으셨을 폐박스가 실려 있는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계셨다. 헌데, 그 할아버지와 리어카가 내 바로 옆을 지나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저렇게 폐휴지를 모아서 과연 얼마를 버실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삼겹살, 저 할아버지는 이 삼겹살을 드셔본 지 얼마나 오래 되셨을까?"

어머니는 운전을 하고 계셨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횡단보도를 지나가려는 도중 무거운 행상을 한껏 짊어진 아주머니 한 분이 무단횡단을 하시고 계셨다. 어머니는 급제동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렸고, 그 아주머니는 무단횡단이 미안했던지 우리 차를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짐을 양 손에 한가득 든 채 힘겹운 걸음을. 어머니는 뭐 저런 사람이 있냐며 투덜거리며 넘어갔지만, 내 뇌리에는 아직도 그 아주머니의 멋쩍은 웃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분명 어머니와 같은 또래의 한 아주머니. 양 손에 무거운 짐을 든 채 분명 중앙차로에 있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가고 있었던 그 아주머니의 표정에는 힘겨운 주름이 가득했다. 같은 또래의 두 아주머니였지만 어머니는 음악을 들으며 자가용을 몰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무거운 짐을 든 채 버스를 타려고 힘겹게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니체가 대표적인 안티크리스트로 뽑히는 까닭은 단순히 그가 기독교의 도그마틱한 신의 진리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니체가 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가 이런 말을 직접 했던 적은 없었으며 단지 그의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등장했던 대사의 한 마디였을 뿐이었다(물론 '신은 죽었다'는 말은 니체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지만 단순히 안티크리스트 차원에서 보자면). 이처럼 그가 그리스도교를 혐오했던 까닭은 단순히 신이 있고 없고, 기독교적 진리가 맞고 안 맞고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싫어했던 것은 우리나라 말로 '공감'으로도 번역되는 sympathy, 다른 말로는 연민의 감정이었다. 그는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보편적인 연민의 감정을 혐오했다. 연민의 감정이야말로 열등하고 무능하고 뒤쳐지는 대중들이 갖는 패배의식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그리스도교(불교를 비롯한 대개의 종교들이)의 윤리가 이러한 보편적 감정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남이 당하는 고통을 보고 마음이 아파진다는 의미의 공감은 어느 정도까지는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감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말하는 윤리에는 이 보편적 공감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다.

대신 그는 영웅을 찬양한다. 그가 찬양하는 영웅적 인간 '위버멘쉬'는 대개의 사람들이 갖는 보편적 감정에서 벗어나, 아니 보편적 감정을 극복하고 열정적이고 진취적은 삶을 쟁취하는 초인이다. 시시한 사람들은 시시하게 고통스러워하지만, 영웅과 같은 위대한 사람들은 위대하게 고통을 감내하며 위대한 수난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나 보편적 감정이 바라는 고통의 부재는 순전히 부정적인 이상이며, 오로지 니체가 예를 들고 있는 알키비아데스, 프리드리히 2세,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만이 그 위대한 수난을 감내하는 고귀한 존재들인 셈이다.

어쩌면 니체는 맞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삶에 있어서 고통의 부재를 바라는 건 허무한 일일 뿐이다. 고통과 슬픔 없는 삶은 없다.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단지 이런 고통과 슬픔에 대한 동정심에 불과하다. 니체에게 있어 사랑의 원천은 동정심, 연민의 감정인 셈이다.

개인적 고통에 접근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가능하다. 그런데 동정은 고통으로부터 개인적 특성을 제거하기 때문에 동정하는 자는 원수 못지 않게 우리의 의지와 가치를 박탈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동정을 과시하는 사람은 고통의 필요성 즉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빈곤과 박탈, 위험과 모험, 실수 등의 불운이 그 반대의 사항만큼이나 '개인적인 필요'를 가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동정하는 자들은 불운이 한 존재를 구성하는 경제에 필수적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가 새로운 동기와 이유를 얻고, 오래된 상처를 치유하며, 과거 전체를 벗어던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개의치 않는 것이다.

-how to read 니체 중-

이처럼 니체는 고통과 불운이 인간의 '개인적인 필요'를 가진다고 말했다. 즉 고통은 그 인간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과제이자 필요인 셈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극복의 과정을 통해 고귀한 열정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고통과 불운 속에 살았던 한 인간이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인간에게 고통은 단순히 필요였을까? 필요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가 그 고통을 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열등한 존재로 끝이 났던 것이었을까? 그 인간에게 고통이란 걷어냈어야 할 어떤 것이었다면?

니체는 인류의 보편적 사랑을 경멸하고, 이 사랑이야말로 동정심으로부터 연유된 나약한 심성이라고 여겼다. 물론 사랑의 원천이 고통에서 비롯된 동정심이라는 니체식의 인식 그 자체도 많은 논란이 불거질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동정심 혹은 연민의 감정을 니체의 표현 그대로 시시한 사람들의 훌쩍거림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니체의 반대편에 서려면 동정심, 다르게 말하면 인간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들 또한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니체는 나폴레옹 같은 정열적인 영웅들을 노래하지만, 사실 우리 주위에는 사랑의 영웅들도 많다. 인류의 죄를 짊어진 예수부터 최근 우리 곁을 떠난 고 김수환 추기경이나 고 법정스님, 혹은 지진의 참사에서 한 생명이라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구조대원들, 스스로 아프리카 오지를 찾는 열혈 의사들 등. 사람들은 나폴레옹 같은 강렬한 영웅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김수환 추기경 같은 사랑의 영웅에게는 머리를 조아린다.

니체가 추구하는 정열의 삶이 인간사를 수직으로 뻗쳐 가른다면, 예수와 같은 사랑과 동정심의 삶은 모든 인간들을 횡으로 아우른다. 고통의 극복, 이를 통해 쟁취할 수 있는 진취적인 삶도 물론 고귀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이야말로 지금의 인류의 모습을 가능케 했던 인간사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아니었을까. 또 사랑이야말로 니체의 궁극적 목적인 '니힐리즘의 극복'을 이룰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한 힘이 아닐까.

함께 살아가는 삶에 더 가치를 두는 것,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필요한 건 이런 자세가 아닌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중요한 건 오로지 '나'만의 성공이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저 '나'가 밟고 이겨야할 상대들일 뿐, '경쟁'이라는 번지르르한 말 뒤에 숨겨진 치졸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철저하게 파편화된 개인들로 이루어진 지금의 사회는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삶이 가장 현실화된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위버멘쉬, 초인들로만 이루어진 사회.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능과 열등감에서 오는 고통을 그대로 감내할 줄 알며 오로지 자신만의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그런 사회. 어쩌면 니체의 긍정적 이상은 바로 오늘날 바로 이 자리에서 실현되었다. 영웅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역설적으로 영웅은 찾아볼 수 없는 이 사회에서 말이다.


영화 "동승"에는 큰 스님과 동자승이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나온다.

큰 스님: 도념아, 저 소나무 밑의 바위가 네 마음 속에 있느냐 마음 밖에 있느냐?
동자 스님: 예, 마음 밖에 있습니다.
큰 스님: 이 녀석 봐라, 거짓말을 하네.

다음 날,
큰 스님: 도념아, 저 소나무 밑의 바위가 네 마음 속에 있느냐 마음 밖에 있느냐?
동자 스님: 예, 마음 속에 있습니다.
큰 스님: 이 녀석 봐라, 거짓말을 하네.

데이비드 흄은 말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없다. 오로지 안다고 믿을 뿐이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과연 객관적인 지식인지 아니면 흄이 말한 것처럼 믿음일 뿐이지는 철학사에서도 오랜 세월 계속된 논쟁이었다. 우리가 평소 진실이라고 혹은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 과연 진짜로 진실인지, 위의 동자승처럼 바위가 정말 마음 속에 있는지 마음 바깥에 있는지 가려내는 일은 참 어려운 문제다. 인간 이성을 통해 무엇이든 알 수 있다던 대륙의 합리주의도 무너진지 오래이고, 서구의 가톨릭이나 동양의 유교처럼 절대적이었던 신념이나 가치도 해체된지 오래다. 대신 사람들은 제각각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 믿음이 정말 옳은 것인지는 여전히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들 제가 갖고 있는 생각과 신념이 옳다는 전제 아래 삶을 살아가며, 혹은 이를 기준으로 삼아 서로 남을 비방한다. 정답이란 건 애초부터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감독인 쿠엔틴 타란티노는 '저수지의 개들'을 통해 이러한 우리의 단면을 희화화한다. 아니, 조롱한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일 테다. 은행털이 조직에 가담했던 '오렌지'는 본래 경찰이었다. 소탕 작전을 위해 은행털이범으로 위장 잠입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무렵이 다가오면서 조직에 가담했던 나머지 인물들은 그를 경찰로 의심한다. 여러 가지 정황상 그가 스파이 노릇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직원 중 '화이트'는 끝까지 '오렌지'가 스파이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 확신에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오렌지'에 대한 연민 혹은 '오렌지'가 총에 맞고 자신에게 의지하던 모습 때문이었다. 결국 조직원들끼리 '오렌지'를 죽일 것이냐 살려둘 것이냐를 두고 싸우다가 서로 총을 발사하고, 즉사를 면한 '오렌지'와 그를 지켜줬던 '화이트'는 함께 손을 잡고 죽어간다. 그런데 그 때, '오렌지'의 한 마디. "I am a cop" 그리고 이어지는 '화이트'의 절규.

관객들은 영화의 처음부터 '오렌지'가 경찰이란 사실을 알았다. 영화는 처음부터 '오렌지'가 경찰이란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를 몰랐던 것은 오로지 '화이트'뿐이었다. '오렌지'의 진실된 말들, 괜찮은 인간성에 의해 바보가 된 것도 오로지 '화이트'뿐이었다. '화이트'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절망스러운 결말이었을 것이다. '오렌지'는 절대 경찰이 아니라는 자신의 확신에 목숨까지 걸었건만 결국 그 확실했던 믿음이 자기 자신을 속인 것이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관객들이 어리석은 '화이트'를 비웃었겠지만, 동시에 관객 자신들 또한 이런 '화이트'의 절망으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감독 타란티노의 메시지다. 절대적인 대상은 없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도 사실 믿는 것일 뿐일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하는 대상도 사실은 그와 다를 수 있다. 그저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기준으로 세상 모든 것을 재단하는 우리도 언제 '화이트'처럼 큰 허망함을 겪어야 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이 영화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뷔작이다. 지금은 명장의 반열에 오른 그이지만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타란티노는 평범한 비디오 가게 종업원이었다. 그는 '관객'의 눈으로 수많은 영화를 섭렵하면서 틈틈이 자신만의 첫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타란티노는 이 시나리오를 토대로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던 중 시나리오가 당시 유명 연기파 배우였던 하비 케이틀('화이트'역)에게 우연히 읽혀졌고, 하비 케이틀이 이 시나리오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아낌없는 지원을 하게 되었고, 본인이 직접 출연도 하게 되었다. 하비 케이틀이 제작 지원을 하자 동료 연기파 배우들도 삼삼오오 타란티노의 시나리오에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저예산 영화로 만들어질 뻔했던 타란티노의 첫 작품 '저수지의 개들'은 공식 개봉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탄탄한 시나리오와 개성 넘치는 연출로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게 되었다. 물론 천재적인 데뷔작으로 인해 타란티노가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이야 시간을 거스르고 시간의 순서를 뒤바꾸는 시나리오 전개는 TV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기법이 되어버렸지만, '저수지의 개들'이 개봉할 90년대만 하더라도 상당히 파격적인 실험이었다. '저수지의 개들'은 은행털이범들의 영화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은행을 터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영화의 메인 시점은 은행을 털고 난 후의 시간이며 은행털이 갱이 조직되는 과거의 이야기가 산별적으로 전개된다. 영화의 시간은 하루 전으로, 한 시간 전으로, 한 달 전으로 제 마음대로 바뀌어버린다. 그제 어제 오늘로 이어지는 일원화된 나란한 시간 전개는 없다. 마치 이 영화를 다 본 관객이 기억의 단편들을 모아 영화를 되새이는 것 같다. 영화의 진행은 자동차 수동 기어의 움직임처럼 이쪽으로 들어갔다 저쪽으로 들어갔다를 반복한다. 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타란티노의 천재적인 기어 변속 덕분에 극의 흐름은 산만해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건 물론이다. 덕분에 다른 갱스터 영화처럼 시끄러운 총격전이 펼쳐지거나 긴박한 추격전이 시작되지 않아도 영화는 내내 관객을 빨아들인다. 

다른 타란티노의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 역시 잔인하다. 은행털이범 중 한 명인 '블론드'가 사로잡은 경찰을 고문하는 장면은 잔인함의 극치를 달린다. 생으로 귀를 자르고, 산 채로 불태워 죽이려는 '블론드'는 오히려 만신창이가 된 경찰 앞에서 환호성을 지른다. 관객들은 마치 자신의 귀가 잘려나가는 것마냥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다. 신기하게도 고문 장면에서 관객들은 하나 같이 고문을 당하는 자의 편에 선다. 이런 관객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아는 이 영화는 '블론드'란 인물이 되어 관객을 계속 괴롭힌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킬빌'이나 '바스터스:거친 녀석들'에서는 주인공이 '나쁜 놈'에게 갚아주는 잔인한 행각에 어떤 관객들은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타란티노의 작품들처럼 '유혈이 낭자하다'란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도 없다. 영화에 따라 그 순도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피가 튀고 살이 뜯겨져 나간다. 잔인하다. 하지만 잔인함을 보여줌으로써 동시에 우리가 잔인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되묻는 것 같다. 어떤 때는 고통으로, 어떤 때는 쾌감으로, 어떤 때는 아름다움의 극치로, 우리에게 제각각 다르게 다가오는 그 잔인함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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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부터 군대의 고기 반찬이 줄어든다고 한다. 돼지갈비는 1년에 13번에서 9번, 오리고기는 12번에서 9번, 닭고기 순살은 하루 20g에서 15g으로 각각 횟수와 양이 줄어든다. 국방부에 따르면, 지난해 육류 가격은 15%나 상승한 반면 올해 군대 급식 예산은 고작 4% 정도만 늘어났다고 한다. 때문에 군 장병들의 식탁에 고기 반찬을 줄이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고기 대신 오징어나 굴, 버섯, 파프리카 등을 배식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맛있는 고기 반찬에 환호하던 장병들이 지을 실망스러운 표정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고기 가격이 올라서 사병들에게 고기 반찬을 줄 수가 없다니, 처음에는 무슨 북한 관련 뉴스인 줄 알았다. 북한 같이 못 사는 나라가 아니고서야 돈이 없어서 사병들 급식을 줄인다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상황인가? 겉으로는 '강한 군대'를 표방하면서, 한편으로는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병들의 먹거리를 줄이려는 현 정권이다.

우리나라의 국방비 지출은 국내총생산의 약 3% 정도로 일본, 중국, 영국보다도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또 정부지출 분야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국방예산이기도 하다. 해마다 막대한 돈을 국방비에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돈이 대체 어디에 쓰이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사병들에 대한 지원은 열악하기만 하다. 올해 예산이 깎이자 당장 사병들의 고기 반찬부터 거두어들였고, 작년에는 금융위기가 닥치자 얼마 되지도 않는 사병 월급부터 동결시켰다(참고로 장교들의 월급은 동결되지 않았다). 또 이전 정권이 선진 병영문화 수립을 위해 늘린 사병들에 대한 군 복지 예산 또한 대폭 삭감시켜버렸다. 덕분에 사병들은 보일러 한 번 마음 편히 못 틀어보고 올 겨울을 버티게 되었다. 불행이도 올 겨울은 유난히 춥다. 이렇게 사병들이 추위에 벌벌 떨 동안 군 수뇌부와 장교들은 두둑한 월급은 물론 퇴임 후 연금까지 받아가면서 호위호식하고 있다. 참고로 국내 복지단체 중 군인공제회 만큼 큰 손을 가진 단체는 찾아볼 수 없다.

정부나 군은 사병들에 대한 지원을 굉장히 아깝게 여긴다. 아무리 군 복무가 의무라고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월급이나 열악한 복무 환경은 그 의무에 대한 최소한의 대가마저 지급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라에 돈이 없어서도 아니다. 요즘 지어지는 정부나 지자체 건물들을 보라. 마치 첨단 IT기업의 연구소에 와있는 것처럼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들 일색이다. 나라가 돈이 없다는 것은 순전히 옛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병들에 대한 지원은 전무하다. 의무라는 명분으로 젊은이들을 징병하고 긴 시간 복무하도록 강제하면서 국가나 군이 이들에게 해주는 것은 거의 없다. 말이 좋아 국방 의무이지, 국가가 20대 청년들을 상대로 하는 '착취'나 다름 없는 수준이다. 그러는 와중에 정부와 군 수뇌부가 군필자들을 상대로 마치 군 복무를 보상해주는 것 같이 생색을 내는 제도가 하나 있다. 바로 '군 가산점 제도'이다.

군가산점제란 제도에서 국가가 군필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상해주는 부분은 아무것도 없다. '가산점'이란 어감을 이용해서 마치 국가가 군필자들에게 일종의 보너스(+α)를 제공해주는 듯이 눈속임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보상'은 반드시 주는 이와 받는 이를 필요로 한다. 보상을 받는 사람은 그만큼 (+)를 얻지만 반대급부로 보상을 해주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 된다. 군가산점제라는 보상제도는 마치 국가가 (-)를 감수하고 군필자들에게 (+)를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 군필자들이 보상 받을 (+)를 만들어주는 것은 군필자를 제외한 여성, 군면제자, 미필자들의 (-)이다. 군가산점제로 정부가 군이 감안해야 할 비용은 제로다. 단지 공무원 채용 시험에서 군필자들에게 가산점만을 부여해 채점을 매기는 것 뿐이다. 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공무원 채용의 기회를 잃는 것은 여성들이나 면제자들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아챙기는 것처럼 국가의 군가산점제 시행으로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국가가 군가산점제의 비용을 치르는 것이 절대 아니란 이야기다. 군가산점제에서 국가나 군이 군필자들에게 해주는 보상은 없다. 생색 뿐이다.

이를 남녀 성별 대결로, 혹은 군필자와 면제자 간의 형평성 문제로 호도하여 군대 보상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사람들이 많다. 여성들과 면제자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먼저 국가가 자신에게 무엇을 해줬나부터 돌아보길 바란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당장 사병들의 고기 반찬부터 줄이는 게 이 나라 군 수뇌부이다. 2년이란 긴 복무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푼돈 몇 푼 쥐어주는 게 그들이고, 그 몇 푼 안 되는월급마저 경기가 안 좋다는 이유로 제일 먼저 깎아버리는 게 바로 그들이다. 이런 군 수뇌부, 국가의 잘못을 왜 여성들과 미필자, 면제자들이 부담해야 하냐는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고민해봐야 한다. 단지 의무란 명목만으로 언제까지 아무런 보상도 대가도 없이 이 나라 젊은이들을 부려먹어도 된단 말인가. 당연한 것을 단순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정정당당하게 따지고 되물을 줄 알아야 한다. 군가산점제로 군필자들과 여성단체들이 아옹다옹 싸우는 모습, 어쩌면 군 수뇌부가 바라던 그림일 수도 있다.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 전 세계 배낭 여행자들에게 가장 있기 있는 가이드북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17개 언어로 발행되며, 여행 분야에서 손꼽히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런 론리 플래닛이 새해들어 가장 가고 싶지 않은 도시를 조사하고 평가한 결과, 공교롭게도 서울이 최악의 도시 톱3에 선정되었다. 그 자세한 선정 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이에 대한 외신들의 보도가 이어지면서 소식은 서울시에게도 전해졌고, 서울시는 평가가 잘못되었다며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울시는 지난 수 년간 시의 브랜드 가치 높이기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투자한 터였다. 최근 어딜 가나 볼 수 있던 문구가 'Hi, Seoul'이었지 않았는가.(그나마 'Hi, Seoul'이란 표현도 잘못된 영어 표현으로 국제적 망신을 당했었다. 원래 제대로된 영어식 표현은 'Seoul, Hi'이어야 한단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 살고 있는 한 시민으로서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서울이 왜 최악의 도시로 선정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론리 플래닛의 짧은 설명은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형편없이 반복적으로 뻗은 도로들과 소련식의 콘크리트 아파트 건물들, 그곳은 심각한 환경오염 속에 마음도 없고 영혼도 없다. 숨막힐 정도로 특징이 없는 이곳이 사람들을 알코올 중독자로 몰아가고 있다."

아쉽게도 대부분 맞는 말이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삭막한 아파트들, 더러운 공기와 물, 이외에는 어떠한 특색도 찾아볼 수 없는 무색무취의 도시 서울이다. 서울시가 서울이란 브랜드를 알리는데 아무리 많은 투자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정작 그 브랜드 안의 내용은 별로 볼 게 없는데 말이다.


600년 도읍지를 자랑하는 서울, 그 중심을 흐르던 청계천에는 조선시대 만들어진 많은 교량과 수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역사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상당한 가치를 갖고 있던 유적들이었다. 실제로 청계천 공사가 시작될 무렵, 학계나 언론들을 중심으로 청계천의 옛 교량, 수로, 수문 등의 문화재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증폭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 시장의 임기 시절, 하루 빨리 복개 공사를 완공해 시민들에게 청계천을 보여주고 싶었던 서울시는 이런 유적들에 대한 조사와 보존 작업을 제대로 진행시키지 않았다. 때문에 광통교나 오간수문의 석재 유적들이 아무렇게나 잘려나가고 버려졌다. 또 이 때 발굴되었던 많은 석재 유물들이 옮기기 좋게 잘려서 지금 서울의 한 하수종말처리장에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건 더 아는 사람이 없는 사실이겠지만,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문화재 훼손 혐의로 학계와 시민단체들에게 고발당하기도 했다.


청계천은 생태 복원에도 실패했다. 사실 청계천 복개 사업은 애초부터 친환경적이지 못했다. 콘크리트와 도로로 덮여있던 청계천을 말 그대로 '복개'만 했을 뿐이다. 뚜껑만 열어재낀 것이다.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여러 가지 장식물들을 설치한 덕분에 외관상으로는 단정해 보일지 몰라도 정작 청계천을 흐르는 물은 지금 이 시간에도 썩어가고 있다. 청계천 수질 비용 관리에만 매년 100억에 가까운 비용이 들고 있다. 청계'천'으로 불릴 것이 아니라 청계'수로'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지금의 청계천은 땅과 숨 쉬는 자연 하천이라기보다는 콘크리트로 쳐발라 만든 인공수로에 가깝다. 하천변도 흙과 수풀보다는 꽉 막혀있는 돌벽과 콘크리트 계단으로 되어있다. 대외적으로는 친환경 복원이라 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도 흙이나 자연생물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인위적인 광경은 삭막하기까지 하다. 대체 어디가 친환경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마디로 청계천은 문화재 복원에도 생태 복원에도 실패했다. 도심 속 소중한 공간이 썩은 물로 오염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여행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도시, 체코 프라하. 뭐니뭐니해도 프라하의 명물은 '카를교'이다. 카를교에는 하루에도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몰려든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카를교를 찾을까? 물론 오랜 역사나 오래된 건축물로서의 아름다움도 매력이겠지만, 사실 실제로 카를교에 가보면 별거 없다. 너무 오래된 탓에 거뭇거뭇하고 생긴 것도 다른 다리들에 비해 별로 다를 바가 없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세체니 다리'도 유명한 다리다. 역시 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다. 하지만 크게 아름답거나 하진 않다. 철근으로 만들어진 아치 모양은 서울의 한강대교와 다르지 않다. 아니, 진짜 똑같이 생겼다. 실제로는 그 자체로 큰 감흥을 주지 못하는 카를교와 세체니 다리. 근데 왜 그곳에 사람이 몰리는 걸까? 답은 하나다.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유명하게 만든 걸까? 바로 프라하 사람들과 부다페스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거다. 자신들의 역사적인 건축물에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애정을 가진 덕분이다.


그런데 왜, 서울시는 카를교나 세체니 다리 같은 명소를 만들지 못하고 있을까? 청계천의 광교나 광통교, 수표교 등등 유서 깊은 문화재들은 마음대로 깨부수고 내다버리면서 말이다. 어디 청계천만 망쳐놓았나, 인사동도 피맛골도 곧 불도저로 깔아뭉갤 판이다. 서울시가 그토록 자랑스러워 하는 콘크리트 고층 빌딩을 지으려고 말이다. 서울시는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것 같다. 서울이란 브랜드도 중요하지만 정작 그 브랜드를 이루어가고 있는 속 내용은 텅 비어 있는 셈이다. 그야말로 속 빈 강정이 따로 없다. 파리에는 상젤리제 거리, 뉴욕의 브로드웨이, 부다페스트의 세체니 다리,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도시들은 저마다의 확실한 상징물을 갖고 있지만 서울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게 막대한 비용 들여서 해외 방송에 광고 내고 브랜드 가치 높인 덕분에 결국 듣는 소리가 '특징도 영혼도 없는 도시'다. 더 이상 '론리 플래닛'의 조사가 잘못되었다느니 별로 영향력 없는 곳이었느니 하는 핑계만 늘어놓아선 안 된다. 왜 그런 망신을 당해야 했는지 진지하게 되새여봐야 한다.


앞선 포스트에서도 계속 했던 말이지만 서울시에게는 어떠한 철학도 고민도 없는 것 같다. 그저 일회적으로 벌어지는, 상업주의에 찌든 이벤트들 뿐이다. 역사도 없다. 우리가 자부심을 가질만 한 소중한 자산들은 뒷전으로 한 채 매번 요상한 일에만 힘을 쏟고 있다. 일관성도 없다. 언제는 녹색 도시였다가 또 갑자기 디자인 도시란다. 모토고 뭐고 뒤죽박죽 제멋대로 섞여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무런 특색도 없는 회색의 도시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고, 해외로부터 최악의 도시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서울이란 도시, 얼마나 재밌고 이야기가 많은 곳인가. 이렇게 오래된 역사와 유적을 갖고 있는 도시가, 이렇게 아름다운 야경을 가진 도시가, 이렇게 다양한 먹거리가 있는 도시가, 이렇게 늦은 밤까지 술과 유흥을 즐길 줄 아는 도시가, 이렇게 네온사인이 화려한 도시가, 이렇게 멋있고 예쁜 젊은이들이 돌아다니는 도시가, 이렇게 치안과 질서가 좋은 도시가, 이렇게 역동적인 도시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서울만이 갖고 있는 특유의 멋과 맛을 따지자면 정말 끝이 없다. 이런 서울을 알리고 가꿔나가는 건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바로 우리다. 우리가 진정으로 서울만의 멋과 역사를 즐기고 아낄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