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는 조선의 정치를 당쟁의 역사로 규정했다. 반도라는 지리적 환경에서 파쟁적인 민족성이 형성되었고, 이 선천적인 파쟁성 때문에 정치적 능력이 결여되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등장한 사회적 모순들은 당파싸움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격이라 할 수 있는 소수의 권력 독점에서 연유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거다. 열강이 침략하기 전 19세기의 조선은 소수 가문의 세도정치로 극심한 부패와 부조리를 겪고 있었고, 그 세도정치를 유발시킨 건 당쟁이 아니라 강력한 중앙권력의 변질이었으니까. 정조가 대왕이란 칭송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세도정치의 원흉이라는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무런 견제책이 없었던 중앙권력이 소수의 위정자에게 넘어갔을 때 이미 조선의 운명은 다한 셈이었다.

[2] 최근 들어 남남갈등이 걱정이란 말을 많이 한다. 남북갈등에 대비되는 남한의 내부적 갈등·분열을 가리키는 말인데, 외부의 적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내부의 이견, 대립을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병폐로 여기는 듯한 늬앙스 때문에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사실 갈등이 존재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주변과 중심, 진보와 보수, 남녀, 세대 간의 갈등은 어느 사회나 존재한다. 한국이라고 해서 유난히 갈등의 골이 깊은 것도 아니다(적어도 인종, 민족, 종교적인 갈등은 없다). 혹자는 국회의원들을 보고 싸움질이나 하는 족속들이라며 조소하지만 원래 의회란 싸우고 투쟁하는 곳이 맞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을 원내로 수렴해서 조정하는 게 의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의회가 대립과 견제 없이 사이좋게 한 목소리를 낸다면, 바로 그건 공산당 대의원 대회와 다를 바 없을 거다. 그래서 양당제 혹은 다당제가 운용되는 것이고 대립, 갈등, 견제가 현대 정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남갈등이란 희한한 수사로 내부의 갈등을 병리적 현상으로 치부하는 건 그만큼 취약한 자기 정당성을 은폐하기 위해 외부의 위협을 부각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남파 간첩들이 남남갈등을 조장한다는 어이없는 소리를 입밖에 낼 수 있는 거다. 반대로 생각해서, 사회 내에 남남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다같이 한 목소리만 낸다고 하면 북한이나 남한이나, 김정은이나 박근혜나 다를 게 뭐가 있을까.

한 십여 년 전만해도 공격수는 말 그대로 공격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공격수는 골 넣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더 이상 공격만 잘하는 공격수는 좋은 공격수로 평가받지 못한다. 공격 못지 않게 수비도 잘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 더 많이 더 악착스럽게 뛰어야 한다. 축구 선수들의 능력이 전반적으로 상향평준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한 가지만 잘해서는 훌륭한 축구 선수라고 평가받지 못한다(물론 늘 그렇듯 메시나 호날두 같은 돌연변이는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이는 공격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수비수도 공격을 잘해야 한다. 공격의 시작이 되는 위치에서 능수능란하게 패스를 주고 받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골키퍼도 마찬가지. 골키퍼가 슛만 잘 막으면 되는 시대는 지났다. 요즘의 골키퍼는 공을 손으로 잡는 것보다 공을 발로 다루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문제는 이 상향평준화라는 게 축구장 안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사회라는 것도 점차 상향평준화되어 가고 있다. 한때는 글만 읽을 줄 알아도 식자 소리를 듣던 시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학위에 어학시험인증에 자격증을 들이밀어도 일자리 하나 얻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능력의 여하를 떠나 외모 경쟁력을 위해 성형까지 권하고 있으니 말은 다한 셈. 경쟁이란 영역이 대체 어디까지 뻗쳐있는지 그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덕분에 현 시대의 인간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더 서글픈 건 돋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낙오되지 않기 위해 더욱 고단한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 공이 없을 때도 쉬지 못하고 수비수의 공을 뺏기 위해 부단히 달리고 또 달리는 공격수의 가뿐 숨이 요즘따라 왜 그리 고달프게 보이는지.

광고라는 건 본래 가치중립적이다. 상품을 광고하여 소비를 촉진시키는 것, 넓게 보면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특정한 가치를 내포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상업적 광고든 그 대상은 소비자의 소비욕구에 한정되어 있기에 광고는 관심이나 기호의 문제로 여겨질 뿐 가치 판단이 개입될 여지도 없을 뿐더러 심적인 거부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서경덕 교수의 광고는 상품을 광고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일반적인 상업광고에서 벗어난 이상 그 내용이 식문화에 관한 것이든 정치적인 이슈에 관한 것이든 특정한 가치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가치는 단순히 소비욕구만을 건드리는 수준이 아니라 수용자의 가치관, 관념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것이다. 제작자의 바람대로라면 한식 광고에는 아마 이런 의도가 보일 것이다. '불고기나 비빕밥은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 음식이다. (그러니 먹어보라.)' 이는 한식 상품이 아니라 문화 자체를 권하고 있다. 더구나 제작자의 이면에는 자국 음식의 우수함을 인정받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보니 수용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광고를 접한 현지 언론이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영국 신문에 햄버거 자체를 선전하는 것과 같다'라고 혹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뉴욕 거리의 광고판이나 일간지의 광고섹션은 상업광고가 있어야 할 자리다. 예외적으로 환경이나 건강 등 보편성을 가진 공익광고가 아닌 이상 서경덕 교수의 한식(나머지 과거사, 독도 광고들도 마찬가지지만) 광고들이 들어가야 할 자리가 아니다. 한식에 대한 내용은 광고면이 아니라 오히려 기사에 실렸어야 했다. 물론 본인 돈(혹은 본인이 후원받은 돈)으로 마음대로 하는 게 뭐가 문제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이 창의적이지 못해서 그 많은 돈으로 자신의 가치관이나 생각을 광고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광고가 상업성에서 벗어나 특정한 목적을 가지는 순간 그 광고는 수용자에게 오히려 거부감을 일으키고 지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공익광고나 아예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는 정치포스터가 아닌 이상).

어떻게 보면 광고로 한식을 알린다는 건 가장 천박한 방법이다. 돈만 있으면 되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한식을 알려야겠다면 굳이 반대할 것까진 없겠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현지인들의 거부감, 부작용 등을 간과할 수는 없다. 또 광고가 아니더라도 한식이란 콘텐츠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매번 느끼지만 서경덕 교수의 광고는 정작 광고가 게재되는 현지보다 국내에서 더 큰 이슈가 되는 것 같다. 광고의 효과보다는 한식 광고를 해외 한복판에 게재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을 받는 것이다. 일반적인 여론 역시 서경덕 교수를 애국자로 치켜세우고 있다. 하지만 광고라는 건 그 특성상 만든 이의 취지나 목적 만큼이나 광고를 수용하는 이들의 반응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취지가 대견하다는 이유만으로 외신들의 부정적인 피드백에까지 너그러워지는 세태에는 좀 아쉬운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규제를 암덩어리에 비유하는 건 위험한 레토릭이다. 규제라는 용어 자체는 부정적인 어감을 갖고 있지만, 사실 규제라는 건 법률, 명령, 규칙, 조례 등 각종 법규를 총칭하는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규제는 법이다. 법은 쓸데없이 제정되지 않는다. 특히나 경제관련 법규는 독점 방지, 공정한 경쟁 질서, 환경보전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다. 이런 목적을 재고하지 않은 채 단순하게 규제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울러 규제를 줄이겠다는 건 법 제정이 과잉되어 있다는 건데 TV에 나오는 각종 고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 걸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것이 알고싶다' 같은 시사프로들의 결론은 항상 약자나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 제도적 장치의 미비로 귀결되니까. 또 규제를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도 편향적인 시각이다. 규제라는 건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 제정된다. 법적인 장치가 미비할 경우 발생하는 외부불경제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적 비용은 늘어날 수 있지만 사회적 비용은 줄일 수 있다. 더구나 국가라는 건 사적 비용이 아닌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공무원이나 행정기관의 권한과 재량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규제가 늘어나야 한다. 공무원의 자의적인 판단에 달린 사항이 많다는 건 규제가 과도하게 제정되어서가 아니라 규제의 내용이 부족해서 그런 거다. 비슷한 예로 양형규정의 제정에 따라 법관의 재량이 줄어드는 것처럼 공무원의 재량을 축소시키려면 규제 요건을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설정해야 한다. 어떤 조건에서 허가를 하고 어떤 조건에서 반려할 것인지 요건 규정을 세분화시킨다면 행정 절차에 있어 공무원의 자의적 판단도 줄어들고 권한도 약화시킬 수 있다. 중요한 건 규제의 갯수가 아니라 규제의 질적 개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의 권한을 줄이기 위해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다소 선동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고결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민주주의라는 건 형식일 뿐이다. 그 틀 안에 어떤 내용을 채워넣느냐에 따라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다. 형식이 그 안의 내용까지 담보해준다고 생각하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플라톤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민주정을 걱정스럽게 봤던 건 단지 스승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레짐이었지만 그에게 자유라는 건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에 불과했다. 좋은 것에 대한 자유가 될 수도 있고 나쁜 것에 대한 자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유의 무분별한 추구는 불필요한 욕구를 만들어 정체를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여기서 중우정치가 등장하는데, 인민의 다수를 이루는 빈자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대중선동가가 출현하여 그들의 욕구 충족을 실현시켜주는 듯 행동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중선동가는 인민의 주지자를 자처하며 초기에는 전체의 이익을 실현시켜주지만 권력맛(플라톤의 표현으로는 '피맛')을 본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참주(tyrannos, 독재자)로 변해갈 수밖에 없다는 게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무려 2천 년이 지난 시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어김없이 이슈의 중심에 서는 '무상'시리즈들. 심지어는 우파를 표방하는 집권정당마저도 포퓰리즘(이 용어선택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논쟁이 많지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무상급식을 페로니즘이라 비난했지만 정작 선거가 다가오자 그 자신부터 무상보육, 무상돌봄교실, 노인연금, 반값등록금 같은 선심성 공약을 마구 내던졌다. 물론 구체적인 재원 조달 방안은 뒷전이었다. 그 결과 지자체에서는 유례없는 예산 부족 사태를 겪고 있고, 연금 공약은 채 한 해도 채우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자타칭 우파 정당이 이러할진데 나머지 정치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다하다 이제는 무상버스까지 등장했다. 증세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외면한 채 선심성 복지 공약만 내세우는 건 여당이나 야당이나 다를 게 없다. 

포퓰리즘을 남발하는 보수 양당 체제를 만든 건 애석하게도 우리 자신이다. 복지 지출이 늘어나면 세입 또한 늘어나야 하며, 줄푸세와 무상시리즈는 동시에 취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자명한 사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간단한 상식을 외면하고 있다. 정치라는 것엔 관심을 끈 채 눈 앞의 이익만 좇고 있는 것이다. 인민people들이 이런 세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플라톤의 우려처럼 중우정치로 빠지게 되고 특정한 지배층을 고착화시킨다. 인민의 우매한 선택이 부메랑이 되어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어떤 이들은 정치에 올바른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투표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굉장히 극단적이고 위험한 발상이지만, 왜 이런 주장이 나오는지 한번쯤 생각해보는 건 나쁠 것 없다고 본다. 그만큼 민주주의라는 건 불완전하고 언제 타락할지 모르는 정체다. 중요한 건 이를 유념하고 경각심과 책임감을 가지는 거다.

[3] 덧붙이자면, 함익병의 발언에 대해서는 크게 열을 낼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원래 의사들의 인문학적 식견은 딱 교양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니까. 플라톤이 철인왕 개념을 만들었던 건 (민주정이 아닌) 참주정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독재의 정당성 획득에 철인정치를 결부시키고자 했던 시도는 이미 반 세기 전에 폐기되었을 뿐더러 <국가>의 일부분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그런 언급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뭐라 할 건 없다. 앎의 깊이가 얕은 게 죄가 되는 건 아니니까. 다만 태도가 문제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일까. 간혹 의사들 중에는 본인 전공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분과에까지 아는 척을 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문제는 대부분이 그저 아는 척의 수준에서 머무르고 만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