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시간 이내라는 짧은 시간에 거의 모든 젠더 문제를 망라해야 했던 탓인지, 서사의 완성도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주제의 당위성을 위해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가해자 또는 방조자 일색이 되어야만 했고, 이야기는 연결된 내러티브가 아니라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열거된 것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너무 전형적이라 서사의 힘을 더 떨어트렸다.

이런 방법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양극화를 다루고자 한다면 ‘88만원 세대 김지영’이란 작품을 만들어서 상대적 빈곤에 처해있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에피소드를 때려 넣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작품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학적인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문제를 다룬다는 그 사실보다는 깊은 성찰을 통해 그것을 얼마나 독창적인 메타포로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한 거다. ‘기생충’이 찬사를 받았던 건 단순하게 양극화라는 주제를 다뤄서가 아닌 것처럼.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예술(혹은 문학)을 소비하는 건 계몽주의 시대의 방식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불거져 있는 상황에서 이런 어설픈 작업은 역효과만 야기할 뿐이다. 페미니즘이란 건 피해의식에 절어있는 일부 여성들이 내부 결속을 위해 동원하는 안티 담론에 불과한 무엇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안티 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봤을 때, 페미니즘으로나 작품성으로나 모두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생각.

이 작품은 조커의 행위를 미화하지도 않았고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이 작품의 서사를 그대로 따른다면, 조커는 약자(또는 프롤레타리아)를 대변하는 자가 아니다. 단지 우연한 계기로 군중적 분노의 상징이 됐을 뿐이다. 중요한 건 우연성이다. 토드 필립스는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오마쥬했다고 밝혔는데, '모던 타임즈'에서도 이 우연성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길가에서 한 트럭이 깃발을 흘리고 갔고 채플린은 그 깃발을 돌려주기 위해 깃발을 흔들며 트럭의 뒤를 따라가는 순간, 공교롭게도 채플린의 뒤로 대규모 집회 참석자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얼핏 보기엔 채플린이 집회의 주동자처럼 보이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경찰은 채플린을 주동자로 오인하고 그를 체포하는 장면이 나온다.(https://www.youtube.com/watch?v=idB8FqlYMqw)

마찬가지로 조커가 머레이를 죽인 건 약자의 분노를 대신 발산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조롱하고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기 때문이었다. 개인적 감정에 의해 우발적으로 총을 쏜 것뿐이다. 조커가 군중의 환호를 받을 때 희열을 느끼는 것도 그가 대리자로서의 어떤 힘을 가져서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열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커는 본래 '관종', 그러니까 관심종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서의 꿈은 코미디언이지만 정작 아서의 상상 속 머레이쇼에서 아서는 청중을 웃기지 않는다. 단지 청중의 박수와 격려를 받을 뿐이다.)

그리고 조커가 관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를 관종으로 만든 건 아니다. 부모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학대 같은 가정폭력은 안타깝지만 사회적 안전망의 경계에 (혹은 그 밖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선진 사회라 하더라도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학대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뿐이다. (작품을 보고 유추해보자면) 나중에는 격리 조치가 취해지긴 했지만 아서도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고 그로 인해 정신쇠약과 틱 장애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아서가 조커로 변하게 된 것을 순전히 세상 탓으로 돌리기에는 그 과정이 너무 병적이고 자폐적인 계기들로 채워져있다.

물론 사회적인 장치가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던 부분도 분명 간과할 수는 없다. 치료시설에 대한 세제 지원이 줄면서 아서가 상담치료와 약 처방을 받지 못하게 됐고, 피고용자에 대한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직장에서 손쉽게 해고가 됐던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아서에서 조커로의 변화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부분이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아서가 총을 갖게 된 것도, 총으로 쏴죽인 이들이 금융가의 직원이었던 것도, 토마스 웨인이 자신의 생부라고 착각했던 것도 모두 구조적 문제와는 상관없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봉준호의 '기생충'이나 '설국열차'와도 비교를 하지만, 애초에 이 작품은 계급론으로 읽힐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계급론을 주제로 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이 작품을 본 후의 불편함은 '기생충'을 본 후의 불편함과는 좀 다르다. '기생충'을 보고 불편함이 드는 건 작품이 꼬집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 곧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커'에서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건 양극화나 계급 갈등이 아니다. 조커라는 캐릭터, 그러니까 '광기' 때문이다. 아서가 점점 극단으로 내몰리게 되는 상황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이 머레이를 총으로 쏴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호아킨 피닉스가 표현한 광기로 그 부족한 인과관계를 메우려 하고 있고, 관객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일종의 불편함(혹은 카타르시스)을 느끼는 것이다.

아서가 서서히 조커로 변하는 모습은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머릿속에 많은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해준다. 광기, 사회, 폭력, 약자 등등. 그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개운함보다는 찝찝함이, 명료함보다는 복잡한 심경이 드는 것이다. 이런 작품을 단순하게 계급론으로 환원시키는 건 아쉬움이 든다. 좋은 작품이란 궁극적으로 반드시 어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가치관을 품고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조커'를 계급적 저항의 아이콘으로 추켜세울 필요도 없고 살인과 범죄를 미화하는 선정적 캐릭터로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 사실 이 영화는 이런 논쟁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그러니까 연기, 미장센, 음악 등 작품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영화다. 외연적 확장도 좋지만 때로는 그것이 영화를 보는 눈을 보다 편협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

‘골목식당’을 보면 백종원이 식당 메뉴를 줄이라고 조언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장사가 안 되는 식당일수록 불필요한 메뉴가 많기 때문이다. 선택과 집중을 못했던 것이다. 손님을 한 명이라도 더 잡고 싶은 마음에 메뉴를 하나둘 추가하다보니 결국 재료 관리도 안 되고 전문성도 떨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장사가 잘 되는 식당일수록 간소한 메뉴를 갖고 있고, 특화된 음식 몇 가지만으로 많은 손님을 끄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을 잘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선택과 집중이다.

그런 점에서 ‘엑시트’는 본연의 색깔을 확실하게 한 영화다. 재난영화라는 기존의 장르를 코미디로 리듬감 있게 재해석했다. 그리고 그 외의 요소들, 그러니까 영웅담, 멜로, 신파는 과감히 배제했다. 선택과 집중을 했고 그 결과물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연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뷔페까지 와서 굳이 김밥을 찾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취향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보통 뷔페에 가는 건 육회처럼 평소 먹을 일이 없는 잔치음식을 맛보러 가는 게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우리가 ‘엑시트’ 같은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는 건, 개연성으로 잘 짜여진 서사를 감상하러 가는 게 아니다. 그저 생각 없이 웃고 짜릿한 스릴을 느끼기 위해서 가는 것뿐이다. 그걸 모르는 이들에게는 영화 속 대사를 빌어 말해주고 싶다. “너 여기 왜 왔냐? 김밥천국이나 가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건 관음증과 깊은 관련이 있다. 관음증은 보이지 않는 곳(어두운 객석)에서 보이는 곳(환한 스크린)을 지켜보는 행위다. 관객이 어두운 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보는 건 돈을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관음증적인 시선을 즐기는 것이다. 관객은 이 시선을 통해서 지금 보고 있는 게 스크린이 아니라 마치 실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어떤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몰입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공포영화를 보며 갑자기 튀어나오는 귀신에 놀라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귀신이라는 건 스크린 속 화상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쫓기고 있는 주인공의 시선에 몰입하다보니 실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보는 것처럼 관객 또한 주인공 못지않게 놀라게 되는 것이다.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시점은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잘 만들고 재밌는 영화일수록 관객은 더 몰입하고 빠져들기 마련이다.

관음증이라는 건 몰래 보는 것이다. 관찰자의 시선이 감춰졌기 때문에 대상자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여야 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배우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냥 현실에서처럼 행동할 뿐이다. 물론 실제 촬영장에는 카메라가 있지만 이 카메라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배제할 뿐이다. 반면 무대에서는 관객들을 바라보고 노래를 부르고 연기를 한다. 일부러 보여지는 것이다. 말 그대로 show와 같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갑자기 뮤지컬 가수처럼 노래를 부르고 스크린이 사건 속의 장면이 아닌 무대로 바뀌는 순간 영화에 대한 몰입은 깨지고 만다. 관음증적인 시선이 해체되고 영화 속 현실은 무대에서 보여지는 쇼로 바뀐다.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하던 주인공이 갑자기 나와 시선을 맞추고 보란 듯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다가는 또 갑자기 음악이 사라지고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모드 전환이 반복되다보면 지금 보는 게 현실의 장면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앞의 무대도 아니고 그냥 이도 저도 아닌 느낌만 가득할 뿐이다. 내가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리 하이브리드, 퓨전, 융합의 시대라고 해도 영화와 뮤지컬의 짬뽕은 내 취향이 아닌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상류층의 흑인과 하류층의 백인이 만났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그린 영화다. 기존의 영화가 주로 상류층의 백인과 하류층 흑인의 이야기들을 다뤄왔던 것과는 좀 다른 설정이다. 엘리트지만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흑인 뮤지션과 맨하튼의 골목세계에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이태리계 비주류 백인이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통해 스스로를 극복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결론적으로 말해 설정은 참신한 편이지만 이야기의 경로는 예상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디테일한 시대 묘사, 아름다운 미장센, 차분한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만으로도 두 시간의 런닝타임이 금방 지나가버리는 영화다. 특히 비고 모텐슨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는 스페인에 사는 덴마크계 미국인인데, 작품 속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태리 출신 이민자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은 어디로 가고 두둑하게 배가 나온 중년의 아재 외양과 이태리 출신 미국인 특유의 어눌한 영어발음까지. 폭력의 역사나 이스턴 프라미스에서의 진지한 역할은 많이 봤지만 뻔뻔하고 익살스러운 역할까지도 이렇게 잘 소화해낼 줄은 몰랐다.

‘백색 구원자 서사’로 논란이 일기도 했고, 토니(비고 모텐슨)의 비중이 너무 큰 나머지 돈(마허샬리 알리)에 대한 내용은 제3자의 시선 속에 머물고 말았다는 아쉬운 평도 있다. 하지만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이니만큼 자칫하면 무거워질 수 있는 분위기를 적당한 톤으로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비고 모텐슨의 연기 덕분이었고, 그런 점에서 토니의 시선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시켰던 패럴리 감독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어쨌든 아카데미 상을 받은 만큼 완성도도 높고 재미도 있고 메시지도 있는 괜찮은 영화였다. 메시지라고 해서 단순하게 인종차별에 대해서만 생각해볼 영화는 아니다. 백인과 흑인이라는 큰 축의 대칭점 말고도 이성과 감정, 개인과 집단, 위엄과 폭력 등의 여러 대칭점들이 등장한다. 그 속에서 어떤 갈등이 일어나고 그것이 어떻게 봉합되는지, 이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나름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의미를 곱씹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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