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거래 의혹을 보면서 제일 궁금했던 건 대법원의 거래 동기였다. 콧대 높은 대법관들이 왜 청와대의 재판 개입을 감수했는지, 무엇을 얻기 위해 자존심과도 같은 독립성마저 접어뒀는지, 그게 궁금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답은 상고법원 때문이었다. 대법원에서 처리해야 상고 건수가 많아 업무량이 과중하기 때문에 이를 나눠서 처리할 수 있는 상고법원을 설치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고법원이라는 건 해외 사례도 전무하고 재판 절차를 4심까지 늘리게 된다는 점에서 애초부터 무리가 있는 계획이었다. 과도한 업무량에 대해서는 대법관 증원이라는 해결책이 이미 오래전부터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양승태와 그 무리들은 왜 상고법원을 고집했을까.

소수정예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대법관의 수를 늘리면 소수로 독점해오던 카르텔이 깨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르텔이 무서운 건 두 가지 차원에서다. 첫 번째로는 전체 차원에서 권력의 집중이 용이하다는 거다. 권력은 소수가 갖고 있을 때 통제하기 쉽다. 반면 다수가 권력을 갖는다면 그것을 일률적으로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힘의 집중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개별 차원에서 개인이 갖고 있는 권력의 힘이 크다는 것이다. 권력은 그것을 몇 명에서 나눠갖느냐에 따라 각 개인이 갖는 권력의 힘이 달라진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구성원 수가 적을수록 개인의 갖는 힘은 크고 반대로 구성원 수가 많을수록 개인이 갖는 힘도 그만큼 작아지기 마련이다.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에 미온한 반응을 보이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전부터 대법관 증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시되고 있었지만 대법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카르텔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데 입법부에서는 정반대의 분위기가 흐른다. 국회의원 정원 증가는 일종의 금기어처럼 되어버렸다. 어떻게든 소수정예를 유지하려는 대법원의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국회의원은 스스로 의회의 정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여론의 몰매를 맞는다. 어떤 의원은 의회 정원을 대폭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 주장에 박수를 보낸다. 국회를 더욱 소수로 구성해서 입법권이 갖고 있는 권력의 파이를 독점하고 싶다는 자백에 환호를 보내는 것이다.

얼마 전에 공항에서 여당 의원이 말도 안 되는 권위의식을 보여줘 문제가 됐던 것처럼 현 국회의 문제는 의원 개인이 갖고 있는 권력이 너무 크다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기득권이라고 할 수 있는 거대 양당이 국회의원 증원에 가장 소극적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권력을 쪼개야 함이 맞다. 독점할 수 없도록 권력을 나누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이 한 1,000명 정도 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만큼 전체적인 차원에서는 유력 정치인 몇 명이 이슈를 좌지우지하는 파벌 정치가 쉽지 않아질 것이고, 개별적인 차원에서도 국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의원 개인이 갖는 권한은 줄어들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국회의원을 믿지 못하겠다면 그들의 자리를 줄여서 그들만의 카르텔을 공고하게 만들어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자리를 늘려서 힘을 분산시키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호텔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그런 유명한 호텔들 말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명맥을 잇고 있는 중저가 호텔들 말이다. 화려하거나 럭셔리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갖고 있는 호텔들. 단지 적당한 가격에 편안하게 묵을 수 있어서 좋다는 건 아니다. 가성비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런 호텔을 보면 마치 우리의 인생을,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반갑고 친숙한 감동이 든다.

성공한 인생만 인생인 건 아니다. 일류의 인생만 인생인 것도 아니다. 이류, 삼류도 저마다의 인생이 있다. 명문대에 못 간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대기업에 못 들어간다고 해도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대학을 가지 못해도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해도 인생은 계속 된다.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들이 더 많다.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렇다고 실패한 사람들 또는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들도 인생을 산다. 저마다의 의미와 태도를 갖고.

일류 호텔만 호텔이 아니다. 유명하지 않아도, 럭셔리하지 않아도, 호텔은 호텔이다. 일류 못지않은 서비스를 보여주는 투철한 호텔리어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주는 편안함과 쾌적함, 그리고 정성껏 만들어지는 맛있는 음식들을 보면 마치 일류 인생만 인생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일류가 아니더라도 저마다 갖고 있는 나름의 의미와 태도에만 충실하다면 일류 부럽지 않은 인생을 가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스스로는 만족할 줄 모르고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인정욕구라는 건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과도한 인정욕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성취를 이루어놓고도 그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 남들이 그것을 알아줄 때에만 비로소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TV에 나온 유명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면서 그 장면을 사진으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흔한 사례다. TV를 보며 기대하던 음식을 직접 먹게 돼서 신기하고 즐거운 만족보다는 남들에게 그 유명한 음식을 직접 먹어봤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피드백에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매슬로우의 5단계 이론에 따르면 이들은 4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최종단계인 진정한 자아실현 혹은 자기만족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로지 타인의 인정을 매개로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단계에 정체되어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개적으로 기부를 할 때보다 남들 모르게 기부했던 사실이 우연찮게 알려졌을 때 우리는 더 큰 박수를 치게 된다. 남들 모르게 기부를 한다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남들 모르게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어떤 의무감에 기부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남들이 그 사실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단지 본인이 일정한 사회적 기여를 했다는 의미만으로도 자부심과 만족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매슬로의 전 단계를 다 섭렵(?)해낼 수 있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이런 사람 주변에 있으면 상당한 피로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들은 관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자기과시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축구를 할 때 이런 사람이 같은 팀에 있으면 있는 대로, 다른 팀에 있으면 있는 대로 피곤해진다. 같은 팀에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 이런 사람은 대게 자신의 실력을 과시할 기회만을 찾기 때문에 혼자 축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 돋보이는 순간만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 팀에 이런 사람이 있어도 골치 아픈 건 매한가지다. 이런 사람은 타인을 매개로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승부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재밌게 공을 차자는 취지로 모인 모임에서 혼자 축구를 하든 과도한 승부욕을 보이든 양쪽 모두 피곤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따로 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건 항상 자신을 지켜보는 타인들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바꿔 말하면 타인들의 시선이 없으면 스스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얘기다. 즉,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는 가치 기준이 오로지 타인들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을 지켜보는 타인이 없다면? 스스로만 남겨진다면? 가치 판단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양심이란 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는 도덕적인 의식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양심이 부재한 것이다. 양심만으로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보여지는 곳에서의 행동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행동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해서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하는 거다.

열등감은 공격성을 낳는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 그 결핍된 부분을 무언가로 채워 넣으려 하는 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문제는 채워 넣기를 위한 재료를 대부분 자신의 외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열등감이 높을수록 무언가를 취하고 빼앗고 싶은 욕망 또한 커진다. 역사적으로도 유럽인의 유대인에 대한 열등감이 나치를 탄생시켰고, 일본이 갖고 있던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열등감은 수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민족을 보고 960여 차례의 외침을 이겨내면서도 단 한 차례도 침략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지만,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주변국들에 비해 침략성을 띠지 않았다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 같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시절 정도를 제외하면 이곳의 선조들은 자기들의 영향력 확장을 위해 한반도 바깥으로 눈을 돌렸던 적이 거의 없는 셈이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은 그동안 별다른 열등감 없이 지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륙과의 사대적인 관계가 존재했지만 어디까지나 군사력의 차이를 감안한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뿐,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자존심은 잃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이곳의 선조들은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옆나라 일본이 틈만 나면 한반도를 침략해온 것과는 정반대였다. 우리는 굳이 다른 곳을 침략할 이유도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대대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높았던 민족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180도 달라졌다. 우리는 대중문화, 경제, 스포츠 등 온갖 방면에서 해외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래서 ‘해외 진출’이란 말에 열광하고 국내에서는 싸이나 BTS에 관심 없던 이들도 그들이 외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 바로 제 일인냥 기뻐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서구에 대한 열등감이 지금껏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대대로 외침만 당하면서 바깥의 영토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선조들을 무능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거대한 인구가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고단함에 대해 아무 탓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이곳이 문명의 한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콧대 높게 살아간 선조들에 비하면, 현재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나아지게 된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 않을까.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 중 하나가 아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시선과 손가락으로 (그리고 약간의 호들갑과 함께) 주변에 다른 대상을 가리키며 그것으로 아이의 관심을 돌려놓기만 하면 아이는 본인이 왜 울고 있었는지도 잊은 채 새로운 대상에 관심을 쏟으며 울음을 그치게 된다. 이런 케케묵은 전략을 제일 잘 써왔던 건 정치인들이었다. 외부의 적을 설정하고 내부의 이목을 외부로 돌리면 집권층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불만을 쉽게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쁜’ 정치인들에게 외부의 적이란 더할 나위 없는 친구였다. 그래서 나쁜 정치인들은 평화를 싫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