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그런 유명한 호텔들 말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명맥을 잇고 있는 중저가 호텔들 말이다. 화려하거나 럭셔리하지는 않지만 나름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갖고 있는 호텔들. 단지 적당한 가격에 편안하게 묵을 수 있어서 좋다는 건 아니다. 가성비도 좋지만, 무엇보다 이런 호텔을 보면 마치 우리의 인생을,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반갑고 친숙한 감동이 든다.
성공한 인생만 인생인 건 아니다. 일류의 인생만 인생인 것도 아니다. 이류, 삼류도 저마다의 인생이 있다. 명문대에 못 간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대기업에 못 들어간다고 해도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대학을 가지 못해도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해도 인생은 계속 된다. 세상에는 성공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들이 더 많다.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렇다고 실패한 사람들 또는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그들도 인생을 산다. 저마다의 의미와 태도를 갖고.
일류 호텔만 호텔이 아니다. 유명하지 않아도, 럭셔리하지 않아도, 호텔은 호텔이다. 일류 못지않은 서비스를 보여주는 투철한 호텔리어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주는 편안함과 쾌적함, 그리고 정성껏 만들어지는 맛있는 음식들을 보면 마치 일류 인생만 인생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일류가 아니더라도 저마다 갖고 있는 나름의 의미와 태도에만 충실하다면 일류 부럽지 않은 인생을 가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스스로는 만족할 줄 모르고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만 만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인정욕구라는 건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과도한 인정욕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성취를 이루어놓고도 그 성취감을 느끼지 못한다. 남들이 그것을 알아줄 때에만 비로소 만족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TV에 나온 유명한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면서 그 장면을 사진으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흔한 사례다. TV를 보며 기대하던 음식을 직접 먹게 돼서 신기하고 즐거운 만족보다는 남들에게 그 유명한 음식을 직접 먹어봤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피드백에 비로소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매슬로우의 5단계 이론에 따르면 이들은 4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최종단계인 진정한 자아실현 혹은 자기만족에는 이르지 못하고 오로지 타인의 인정을 매개로 욕구가 충족될 수 있는 단계에 정체되어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공개적으로 기부를 할 때보다 남들 모르게 기부했던 사실이 우연찮게 알려졌을 때 우리는 더 큰 박수를 치게 된다. 남들 모르게 기부를 한다는 게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남들 모르게 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어떤 의무감에 기부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남들이 그 사실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단지 본인이 일정한 사회적 기여를 했다는 의미만으로도 자부심과 만족감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매슬로의 전 단계를 다 섭렵(?)해낼 수 있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지만.
문제는 이런 사람 주변에 있으면 상당한 피로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이들은 관계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자기과시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축구를 할 때 이런 사람이 같은 팀에 있으면 있는 대로, 다른 팀에 있으면 있는 대로 피곤해진다. 같은 팀에 그런 사람이 있을 경우 이런 사람은 대게 자신의 실력을 과시할 기회만을 찾기 때문에 혼자 축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 돋보이는 순간만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 팀에 이런 사람이 있어도 골치 아픈 건 매한가지다. 이런 사람은 타인을 매개로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승부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재밌게 공을 차자는 취지로 모인 모임에서 혼자 축구를 하든 과도한 승부욕을 보이든 양쪽 모두 피곤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따로 있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건 항상 자신을 지켜보는 타인들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얘기인데, 바꿔 말하면 타인들의 시선이 없으면 스스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얘기다. 즉,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는 가치 기준이 오로지 타인들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자신을 지켜보는 타인이 없다면? 스스로만 남겨진다면? 가치 판단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행동할 가능성이 크다. 양심이란 건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판단하는 도덕적인 의식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양심이 부재한 것이다. 양심만으로는 만족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보여지는 곳에서의 행동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행동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해서 앞과 뒤가 다른 사람이 바로 이런 유형에 속하는 거다.
열등감은 공격성을 낳는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 그 결핍된 부분을 무언가로 채워 넣으려 하는 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문제는 채워 넣기를 위한 재료를 대부분 자신의 외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열등감이 높을수록 무언가를 취하고 빼앗고 싶은 욕망 또한 커진다. 역사적으로도 유럽인의 유대인에 대한 열등감이 나치를 탄생시켰고, 일본이 갖고 있던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열등감은 수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민족을 보고 960여 차례의 외침을 이겨내면서도 단 한 차례도 침략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면이 있지만, 이런 말이 나올 정도로 주변국들에 비해 침략성을 띠지 않았다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 같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시절 정도를 제외하면 이곳의 선조들은 자기들의 영향력 확장을 위해 한반도 바깥으로 눈을 돌렸던 적이 거의 없는 셈이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은 그동안 별다른 열등감 없이 지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대륙과의 사대적인 관계가 존재했지만 어디까지나 군사력의 차이를 감안한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뿐, 스스로에 대한 긍지와 자존심은 잃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이곳의 선조들은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옆나라 일본이 틈만 나면 한반도를 침략해온 것과는 정반대였다. 우리는 굳이 다른 곳을 침략할 이유도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달리 말해서 우리는 대대로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높았던 민족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180도 달라졌다. 우리는 대중문화, 경제, 스포츠 등 온갖 방면에서 해외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래서 ‘해외 진출’이란 말에 열광하고 국내에서는 싸이나 BTS에 관심 없던 이들도 그들이 외국에서 큰 인기를 얻으면 바로 제 일인냥 기뻐하는 촌극이 벌어진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서구에 대한 열등감이 지금껏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대대로 외침만 당하면서 바깥의 영토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선조들을 무능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거대한 인구가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고단함에 대해 아무 탓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이곳이 문명의 한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콧대 높게 살아간 선조들에 비하면, 현재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나아지게 된 건지는 확신할 수 없지 않을까.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 중 하나가 아이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다. 시선과 손가락으로 (그리고 약간의 호들갑과 함께) 주변에 다른 대상을 가리키며 그것으로 아이의 관심을 돌려놓기만 하면 아이는 본인이 왜 울고 있었는지도 잊은 채 새로운 대상에 관심을 쏟으며 울음을 그치게 된다. 이런 케케묵은 전략을 제일 잘 써왔던 건 정치인들이었다. 외부의 적을 설정하고 내부의 이목을 외부로 돌리면 집권층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불만을 쉽게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쁜’ 정치인들에게 외부의 적이란 더할 나위 없는 친구였다. 그래서 나쁜 정치인들은 평화를 싫어한다.
소득주도 성장정책이라는 기조가 등장하기 시작한 건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소득주도 성장은 단기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통화정책이 아니다. 소득주도 성장이 목표로 하는 건 거시적인 선순환 구조이다. 가계의 소득향상에 따른 내수 활성화로 성장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내겠다는 취지다. 본래 어떤 경제정책이든 단기적인 부작용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 부작용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장기적인 기대효과가 있기 때문에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1년 사이의 즉각적인 경제지표를 두고 그것이 마치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정책의 실패를 의미하는 시그널인냥 얘기하는 건 성급한 태도 같다.
내수 침체의 원인은 일자리 부족이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가처분소득의 감소에 있다. 선순환 고리를 만든다는 게 결국 순환 구조 중 어느 지점을 먼저 건드리느냐에 대한 문제인데, 사실 정부가 민간 투자를 아무리 장려해도 내수 경기가 나아지지 않는 한 기업은 절대 먼저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의 투자가 우선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건 내수를 살리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따라서 최저임금을 인상해서라도 가처분소득을 늘리려는 것이 선순환 고리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공장의 해외 이전을 염려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되물어보고도 싶다. 우리가 언제까지 동남아시아나 제3세계 국가들과 임금경쟁력을 두고 싸워야 하는지. 언제까지 그 임금경쟁력에 목매어 자국의 노동자들을 희생시켜야 하는지. 경제가 성장할수록 임금경쟁력이 낮아지는 건 어느 정도의 소득수준을 가진 나라라면 절대 피해갈 수 없었던 수순이었다. 그에 따라 정부와 민간은 여러 노력들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R&D 투자로 고부가가치 산업을 키우기도 했고 노동생산성 향상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최고의 경제대국 미국을 보면 대통령이 협박을 마다하지 않고 기업들을 다그쳐 자국에 공장을 유치하기도 했다. 꼭 임금경쟁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일자리를 보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니, 임금경쟁력으로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나버렸다고 해야 더 맞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