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식당’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예능을 챙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언제부터인지 골목식당은 빠짐없이 보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메시지가 좋아서 그랬던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요식업에 대한 노하우나 골목상권 재생에 관해 다루는 듯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건 직업의식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평생고용이 사라지고 요식업은 핫한 직종이 되었다. 퇴직자들이 저비용으로 쉽게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하는 것처럼 퇴직을 하면 요식업을 시작하는 게 보편적인 생계 루트가 되었다. 요식업에 어떤 뜻을 갖고 뛰어든 게 아니라, 단지 생계를 위해 떠밀리듯 시작한 것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음식에 대한 애착, 위생관념, 적극성 등이 부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골목식당에서도 노하우보다는 직업적인 자세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백종원이 식당 주인들에게 전수하는 건 레시피만이 아니다. 그는 요식업에 대한 직업의식, 음식이나 손님을 대하는 태도를 가르치려 한다. 책임감을 갖고 고민하며 정성껏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맛있게 먹는 손님의 피드백에 보람을 느낄 줄 아는 마음가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백종원도 이런 태도를 갖춘 주인들에게는 어떤 도움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백종원이 힌트를 주지 않아도 언젠가는 일정한 위치에 다다를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건 시행착오의 시간을 줄여주는 것뿐이다.

직업의식이라는 건 사실 요식업이나 자영업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강조되어야 할 가치다. 속물적인 직업관이 팽배한 이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 사회에서 직업에 대한 잣대는 철저하게 타자적 기준으로 평가된다. 판검사나 의사, 교수처럼 명예롭거나 잘나가는 사업가처럼 돈이 많거나, 그게 아니면 남들처럼 건실한 회사를 다니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진로를 설계하는 데 있어 정작 중요한 내면적인 기준들, 예를 들어 적성이나 성취감 같은 문제들은 철저히 외면당하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적성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밥벌이라는 게 기호나 취향을 따질 정도로 만만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업의식이라는 건 단순히 좋고 싫음의 문제 그 너머에 있는 가치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어떤 직업이 주어진 상황에서 그 일에 어느 정도의 애착을 가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삶 자체에 대한 태도와도 비슷하다. 삶이라는 것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특정한 모습으로 내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을 포기한 사람들은 아무런 가능성 없이 무기력한 세월을 보내는 것처럼, 일에 대한 애착이 없는 사람 또한 단지 돈이나 밥벌이에 급급한 속물적인 인간이 되고 마는 것이다.

골목식당을 보며 시청자들이 흐뭇함을 느끼는 것도 식당 주인들의 달라진 태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흐뭇함은 대박을 향한 값싼 대리만족 같은 게 아니다. 그건 속물의 영역이다. 그걸 넘어서 시청자들이 깊은 울림을 느끼는 건 음식장사 자체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와 의지가 달라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 변화로 스스로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언론보도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 관련 뉴스다. 아니, 절반이 아니라 체감상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비중이 코로나에 관한 내용들이다. 코로나 이슈가 사회의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잠식해버린 상황이다. 하루종일 코로나에 대한 이야기만 떠들어대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와 관련된 이슈들이 과연 그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가 그 정도의 사회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그만큼 심각해야 하고 위험성이 높아야 한다. 위험성이 높다는 건 결국 치사율이 높아야 한다는 건데, 공교롭게도 코로나의 치사율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지금까지 코로나로 사망한 이들도 거의 전부가 기저질환을 갖고 있던 이들이다. 세월호와 같은 대형 참사에 대한 기억이 각인된 탓에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 과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코로나 같은 유행성 바이러스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늘 존재해왔다. 단지 이번처럼 주목을 받거나 숫자로 집계되지 않았을 뿐이다.

교통사고 사망자가 나온다고 해서 전국의 차량 통행을 통제하진 않는다. 사망자가 발생한 건 분명 가벼운 일이 아니지만, 전국의 차량 운행을 막는 것은 그것과 별개의 가치를 지닌 일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나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해, 아니 더 정확히는 확진자 발생을 막기 위해 전반적인 사회적 동력을 감속시키는 것은 별개의 가치를 지닌 일이다.

이런 고민의 부재는 참담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마스크 5부제라는 듣도 보지도 못한 정책이 시행되고, 약국마다 무슨 맛집인냥 줄을 서서 마스크를 기다리고, 재난영화처럼 거리를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서로를 경계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기까지는 웃지 못할 촌극, 단순한 해프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기 불황이 더 심각해지는 건 해프닝이라고 할 수 없다. 전자가 가벼운 찰과상이라면 후자는 치명상에 가깝다.

코로나에 대한 과잉 대응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자영업자들만이 아니다. 모두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소비가 줄어드는 건 전반적인 경기 침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경기라는 건 분위기를 타기 마련인데, 사회가 코로나라는 악재에 매몰되어 있을수록 경기는 더욱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이미 위기설이 돌고 있고 코스피 같은 각종 지표들도 경보를 울리고 있다. 이런 흐름이라면 바이러스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보다 경기 침체로 자살을 택하는 이들이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온 건 언론의 탓이 크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마치 시한부 판정이라도 된 것마냥 그 위험성을 과대포장하여 불안감을 높이고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페이지 노출수에 따라 광고 액수가 정해지는 인터넷상에서, 관심의 정도는 결국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이다. (물론 언론의 선정적 행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확대재생산시키는 누리꾼들도 한 몫을 했다.) 대부분이 간과하고 있지만, 이번 사태로 가장 큰 혜택을 얻고 있는 건 언론이다. 그리고 그 언론의 자극적인 돈벌이에 놀아나는 건 파리 날리는 식당의 주인들만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 모두다.

'이단'이란 말의 뜻을 찾아보면, '자기가 믿는 이외의 종교', '전통이나 권위에 반항하는 주장이나 이론'이라고 나온다. 이단이라는 말이 제일 쉽게 쓰였던 시기는 중세였다. 당시는 모든 것이 기독교적 신의 섭리에 의해 정해져 있었다. 가장 교조적인 시대였다. 진리는 한 가지밖에 없었고, 그 외의 것들은 전부 이단이 되었으니까. 이단을 따르는 것으로 여겨지면 그 누구도 마녀사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단이란 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절대적 진리 혹은 주된 진리라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이단이라 규정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주변화하기 위한 절대성, 주류성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그것을 상대적인 차이로 환원시키거나(모더니즘), 그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뿐이다(포스트모더니즘). 어느 쪽이든 이단이란 개념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신천지를 향한 혐오의 감정에는 격하게 공감한다. 다만 그 혐오를 근거로 신천지를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실 모든 종교는 비슷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절대자, 신자, 그리고 둘 사이에서 절대자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신자에게 전달하는 성직자, 교리, 성전. 신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기 위해 가짜 종교 행세를 하는 사이비 종교가 아닌 이상, 모든 종교는 내용만 다를 뿐 전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종교에 있어 정파와 시파라는 게 구분될 수 있다 한들, 사실 그 차이는 종이 한 장만큼의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향해 이단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론이든, 교단이든, 사법부든, 도지사든, 누군들 어떤 대상을 이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다. 아니,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말조차 틀린 의미일 수도 있다. 이단이란 개념이 대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P.S. 이런 논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강조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pc는 사회적 편견을 경계한다. 주류는 편견을 재생산하고 그 편견으로 비주류를 차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편견을 깨고 차별을 없애는 건 pc운동의 핵심이다. 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란 잣대를 특정한 영역에만 겨누고 그 외의 영역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건 결국은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이 아닐지 모르겠다.

기침을 하거나 코를 훌쩍거리면 주변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약은 먹었어?” “병원은 안 가도 돼?” 그리고 감기 증상이 있는데도 약을 먹지 않거나 병원에 가지 않으면 왜 이렇게 미련하냐고 핀잔을 준다. 그만큼 조금이라도 증상이 있으면 약부터 찾는다. (심지어는 주사를 권하기도 한다.) 그것이 감기든 소화불량이든 뭐든 간에.

EBS 다큐프라임에서 본 것 같은데, 국내와 해외의 약 처방 실태에 대해 비교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가벼운 감기 같은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게 국내 병원에서는 십수 종의 약을 처방해준 반면, 해외에서는 약 처방을 거의 받지 못했다. 대부분 환자를 그냥 집으로 돌려보냈다. 약 대신 내린 처방은 이런 거였다. 잘 자고 잘 먹고 푹 쉬고 따뜻하게 있어라 같은 당연한 말들.

원래 인간은 병균을 달고 산다. 인간이 평소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건 병균에 접촉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면역체계 덕에 병균을 이겨내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라 하더라도 약간의 증상만 보일 뿐 몸은 자연회복되기 마련이다. 우리가 감기 증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기침, 발열, 콧물 같은 것도 사실 회복을 위한 일종의 신체 반응일 뿐이다. 물론 천연두나 흑사병처럼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보여준 예도 있었지만, 그런 사례는 긴 인류 역사 중 기껏해야 몇 번 일어나지도 않았으며, 지금의 의료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큰 의미를 둘 필요도 없다.

신종 바이러스에 백신이 없는 건 당연하다. 말 그대로 신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신이라는 건 (의외로 간과되는 부분이지만) 본래 치료약이 아니라 예방약에 불과하다. 예방 접종이 없었다고 해서 그 질병을 치료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사스든 메르스든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든 모두 치료는 가능하다. 심지어 병원 치료를 받지 않아도 자연 회복되는 경우가 더 많다. 간혹 사망자가 발생하는 건 면역력이 낮은 노약자가 바이러스에 노출된다거나 다른 질환 환자들이 합병증에 걸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평소에도 감기나 폐렴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나온다. 단지 이번 사태처럼 주목을 받지 못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늑장대응보다는 과잉대응이 낫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정부나 기관의 몫이다. 일반인들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무슨 좀비 영화에 나오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공공장소에 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외출마저 자제하면서 상점가가 텅텅 비게 만들 필요도 없고, 바이러스라는 것에는 생전 노출된 적 없는 것처럼 온갖 군데에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학교를 휴교해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떼를 쓸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중국인들에 대한 제노포비아가 가장 심각한 것 같다. 물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중국 당국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것이 중국인들 혹은 그 문화마저 싸잡아 혐오해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중국에서 발생했다고 중국인을 책망해야 한다면, 아시아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로 우리마저 책망받는 것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심지어는 중국인을 입국금지시켜야 한다는 놀라운 주장도 들리는데, 더 충격적인 건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사실 한국만큼 인종이나 민족차별에 무감각한 곳도 찾아보기 힘들다.)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 그리고 지금의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인터넷 시대 이후 이슈화되었다는 점이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도 변종 바이러스는 항상 존재했다. 단지 지금처럼 관심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지금은 과거와 달리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대량의 커뮤니케이션이 사회적 이슈를 괴담 수준으로 키우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실제로 사스, 신종플루, 메르스가 어떻게 잠재워졌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마치 대재앙이라도 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지루해질 때쯤이면 다른 이슈거리를 찾는 게 인터넷이란 매체의 특성이니까. 일종의 루틴처럼. 과연 이번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