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주도 성장정책이라는 기조가 등장하기 시작한 건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소득주도 성장은 단기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통화정책이 아니다. 소득주도 성장이 목표로 하는 건 거시적인 선순환 구조이다. 가계의 소득향상에 따른 내수 활성화로 성장의 선순환 고리를 만들어내겠다는 취지다. 본래 어떤 경제정책이든 단기적인 부작용은 발생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 부작용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장기적인 기대효과가 있기 때문에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1년 사이의 즉각적인 경제지표를 두고 그것이 마치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은) 정책의 실패를 의미하는 시그널인냥 얘기하는 건 성급한 태도 같다.

내수 침체의 원인은 일자리 부족이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가처분소득의 감소에 있다. 선순환 고리를 만든다는 게 결국 순환 구조 중 어느 지점을 먼저 건드리느냐에 대한 문제인데, 사실 정부가 민간 투자를 아무리 장려해도 내수 경기가 나아지지 않는 한 기업은 절대 먼저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의 투자가 우선되지 않는다면 그 다음으로 할 수 있는 건 내수를 살리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따라서 최저임금을 인상해서라도 가처분소득을 늘리려는 것이 선순환 고리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공장의 해외 이전을 염려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되물어보고도 싶다. 우리가 언제까지 동남아시아나 제3세계 국가들과 임금경쟁력을 두고 싸워야 하는지. 언제까지 그 임금경쟁력에 목매어 자국의 노동자들을 희생시켜야 하는지. 경제가 성장할수록 임금경쟁력이 낮아지는 건 어느 정도의 소득수준을 가진 나라라면 절대 피해갈 수 없었던 수순이었다. 그에 따라 정부와 민간은 여러 노력들을 통해 돌파구를 찾았다. R&D 투자로 고부가가치 산업을 키우기도 했고 노동생산성 향상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최고의 경제대국 미국을 보면 대통령이 협박을 마다하지 않고 기업들을 다그쳐 자국에 공장을 유치하기도 했다. 꼭 임금경쟁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일자리를 보호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니, 임금경쟁력으로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나버렸다고 해야 더 맞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인맥 축구’라는 워딩으로 조롱을 즐기는 이들이 있지만, 축구는 원래 인맥으로 하는 거다. 감독의 스타일마다 잘 맞는 유형의 선수는 따로 있다. 본인의 스타일에 맞는 선수를 고르는 건 전적으로 감독의 재량이다. 선수 선발을 두고 감독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수가 인정하지 않는 선수를 선발한다고 해서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다. 감독의 선수 선발 권한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과거 히딩크가 김남일이나 이을용 같은 무명의 선수를 발탁하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결과로 평가하면 된다. 다만 그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최대한 자유롭게 보장해주어야 한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 할지라도 어떤 감독 밑에서는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감독과 선수의 궁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독이 본인 입맛에 맞는 특정 선수만 기용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는 다른 팀에 있는 선수를 본인의 팀으로 데려오기도 한다. 사리가 조르지뉴를, 무리뉴가 마티치를 각각 데려왔던 것처럼.

사실 축구에서만 이런 경향이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이 마찬가지다. 누구든지 본인과 잘 맞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리인 것 같다. 만약 어떤 상사가 자기 밑에 둘 부하직원을 뽑는다고 해보자. 물론 어떤 실측화된 데이터(실적, 평가성적, 경력 등)를 기준으로 선별할 수도 있지만, 이런 데이터들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성향이나 취향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성격이나 태도, 의사소통 방식 등이 잘 맞지 않으면 아무리 실력이 좋은 상사와 부하직원이더라도 삐거덕거리는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본인이 알고 있는 직원 중에서도 가장 본인과 잘 맞았던 직원을 뽑아오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합리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인맥이라고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다가도 한편으로는 인맥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있는 사회생활에서 기회라는 건 대부분 사람이 사람을 끌어주면서 찾아오는 법이기 때문에 인맥이란 것의 중요성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인맥이란 건 객관적으로 실측할 수 없는 경험과 감각의 영역이라는 게 문제다. 애초에 이 주관적인 영역은 ‘관리’와는 거리가 멀다. 관리라는 건 특정한 의도에 따라 결과를 통제하는 것이다. 실적이나 성적은 투자를 할수록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고 심지어는 외모 또한 화장을 하고 운동을 하고 말끔한 옷을 사서 입으면 나름대로 잘 ‘관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인맥은 다르다. SNS로 댓글을 주고받고 이따금 안부 인사를 나눈다고 해서 인맥을 잘 관리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알고 지낸 사이라고 해서 중요한 순간 나를 끌어주고 나를 추천해주고 내 상품을 사주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평소의 모습이다. 평소의 내가 보이는 성품, 태도, 진정성 같은 것들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변은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나’ 또한 항상 주변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순간순간의 지각적인 경험이 축적되어 ‘나’에 대한 주변의 판단을 이루고 그것을 토대로 인맥이 구축된다.

물론 인맥이라는 말이 그렇게 순진한 의미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잘 알고 있다. 실제로 ‘낙하산 인사’처럼 불합리적인 성격도 내포하고 있는 게 이 ‘인맥’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맥이란 의미 자체를 사회적인 병폐 정도로 단순화시키는 건 큰 오류다. 인맥이란 건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되어서도 안 된다. ‘인맥 축구’라는 워딩이 처음 등장한 건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였다. 당시 올림픽 축구대표팀을 이끌던 홍명보 감독은 당시 유럽에서 뛰었으나 소속팀에서 큰 활약이 없던 박주영을 와일드카드로 발탁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같은 대학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홍명보 감독이 박주영을 선발한 것이 아니냐며 ‘인맥 축구’라는 워딩을 만들어냈고 조롱했다. 하지만 박주영은 홍명보 감독이 기대하던 바로 그 포지션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고 대표팀은 올림픽 동메달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남겼다. 그로부터 6년 후, 아시안게임 축구대표팀의 김학범 감독은 성남 감독 시절 본인이 데리고 있었던 황의조를 발탁했고, 일각에서는 또 ‘인맥 축구’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조롱의 대상이 된 황의조는 현재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후보였던 우즈벡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포함 5경기에서 8골을 넣고 있다.

안희정 사건을 두고 논란이 많은 건 안희정과 김지은 사이에 애매한 감정상태(이를테면 ‘존경심’ 혹은 ‘연애감정’일수도 있는)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사법부는 이 애매한 감정상태를 현행법이 개입할 수 없는 사적인 영역으로 판단한 것이고, 판결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권력형 성폭력의 일부로 본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 애매한 감정상태라는 거다. 안희정은 이를 이용해서 일방적인 성적 만족을 취했고, 김지은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것에 이용당하여 성적 착취를 당했다.

때문에 안희정 사건을 전형적인 권력형 성범죄로는 볼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같은 성적 착취라 하더라도 사랑, 존경, 동성 같은 감정상태가 얽힌 성적 착취라는 건 돈으로 성을 사고파는 성매매나 강제적인 위력이 가해지는 성폭행 같은 성적 착취와는 달리 국가나 법이 조심스럽게 개입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간통죄나 혼인빙자간음죄가 폐지되었던 맥락처럼 국가나 법의 개입이 오히려 여성이든 남성이든 개인의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를 크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임이 있다면 도의적으로 감수하면 된다. 무턱대고 법적인 보호를 요구하는 건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하는 굴레에 갇히는 것이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어떤 범죄에 있어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만을 탓하면 아무것도 나아질 게 없다. 개인을 원망하고 개인에게 벌을 지운다고 해서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미래의 범죄자가 줄어드는 건 절대 아니다. 중요한 건 시스템을 바꾸고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물론 사회적 관심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미투운동이 갖는 의의는 크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가해자 개인들을 향해 폭로하고 고발하는 게 전부일 뿐, 왜 상황이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에 대한 자성적인 고민이나 성찰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권력형 성범죄가 아직도 만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리 권력형 성범죄가 나쁜 짓이라고 아우성을 쳐도 그것만으로 성범죄를 줄일 수는 없다. 필요한 건 당장의 가벼운 성희롱부터라도 부당한 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다. 물론 미시적인 해결만을 강요하는 건 아니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변화라는 건 절로 주워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과거에 비하면 전반적인 의식이나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개인을 탓하는 건 제일 쉬운 방법이다. 하지만 시스템과 인식을 바꾸는 건 힘들고 지루한 작업이다. 따라서 집회에 등장하는 여성단체들의 구호는 “누구누구를 규탄한다!”보다는 “용기를 내자! 우리가 바꾸자!”가 되어야 한다. 혐오와 증오보다는 용기와 다짐이 되어야 한다.

예의는 형식이다. 배려를 위한 형식. 서로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않기 위해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프로토콜인 셈이다.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이 사람을 만날 때는 이렇게 대해야 하고 저 사람을 만날 때는 저렇게 대해야 한다면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닐 거다. 특히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을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따라서 이를 표준화시켜 일정한 프로토콜을 만들어 놓은 다음 그것만 이행하면 어떤 자리 누구에게든 기본적인 배려는 갖춘 것으로 여기도록 약속한 게 바로 예의란 것이다.

예의라는 건 최소한의 범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앞서 말했듯 예의는 최소한의 약속된 프로토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프로토콜에 형식적인 허례허식이 자꾸 덧붙여진다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형식이 늘어날 것이고 결국에는 전반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불필요한 절차만 증가될 것이다. 편하자고 만들어 놓은 게 예의란 건데 오히려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셈이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예의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이다. 예의를 프로토콜로 여기는 게 아니고 한 인간의 인격을 표상하는 척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는 어느 정도의 예의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겸손함, 친절함, 자상함의 수준이 정해진다. 그래서 예의를 두고 과잉경쟁이 벌어진다. 최소한만 이행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겉치레들을 가져다붙임으로서 본인이 더 예의가 넘치는 사람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예의와 겸손함, 친절함 등은 거의 상관이 없다. 경험적으로만 봐도 그렇다. 주위를 둘러보면 일부 윗사람에게만 극진히 예의를 차리는 반면 다른 이들에게는 개차반 같이 구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히려 능력도 없고 매력도 없는 이들이 예의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오로지 형식만 갖추면 인정받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평가할 때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만 따지면 된다(사실 그 기본적인 예의마저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이상을 기대하면 서로 피곤해질 뿐이다. 예의는 편해지기 위해 만든 것이다. 서로 편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예의를 갖추고 난 그 다음에 있다.

흔히 말해 산업화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노는 법’을 몰랐다. 여가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돈도 없었고 시간도 없었다. 가장 쉬운 건 술이었다. 비싸지도 않았고, 그럼에도 금세 기분을 좋게 만들어줬다. 또 술친구 몇 명만 있으면 시간 때우기에도 좋았다. 퇴근길에 대포집에 들러 홀짝거리는 술이 하루의 유일한 낙이었고,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으며,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이른바 잠.일.술 세대. 그래서 그 세대는 계속 술을 마셨다. 즐거우니까 마시고 슬프니까 마시고 놀러왔으니까 마시고 친구들끼리 마시고 명절이라서 마시고 친하니까 마시고 서먹하니까 마시고 더우니까 마시고 추우니까 마시고. 모든 게 술이었다. 빌딩숲이든 어둑한 주택가 골목이든 한 잔 할 수 있는 식당, 술집은 구석구석 어디에나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세대는 달랐다. 더 이상 ‘노는 법’을 모르는 세대가 아니었다. 이들은 항상 어떻게 하면 재밌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한다. 퇴근 후에도 쉬는 날에도 늘 할 게 많다. 여행을 가고 운동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쇼핑을 하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요리를 하고 사진을 찍고 게임을 하고. 이들에게 술이 유일한 낙이라는 말은 아버지 입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다. 과거의 세대와 지금의 세대는 삶 속에서 술이란 게 차지하고 있는 비중 자체가 다른 것이다.

이는 직장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나이가 많은 관리자들은 부어라 마시고 2차, 3차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기존의 회식문화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반면 젊은 직원들은 술만 마시는 회식에 금방 염증을 느끼고 피곤해 한다. 왜 회식을 꼭 술을 마시며 해야 하는지도 더 나아가서는 회식 자체가 왜 필요한지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 사회가 유독 술에 대해 관대했던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교적 생활양식 하에서 중시되는 건 예의와 체면이었다. 항상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외부의 눈치를 살피며 자기표현을 절제하는 게 미덕으로 여겨졌다. 때문에 다수가 모이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어렵고 딱딱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래서 그 불편함을 녹이기 위해 술이 필요했던 것이다. 술 덕분에 사람들은 가식의 가면을 내려놓고 조금 더 편하고 솔직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게 된다. 술은 긴장을 이완시키고 경계심을 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수직적 인간관계가 많은 직장에서는 술자리야말로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속사정을 탐색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예의, 체면, 권위 때문에 원래의 ‘나’를 들어낼 수 없었던 이들에게 술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셈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바뀌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절제와 인내가 미덕인 것도 옛말이 되었다. 지금의 세대는 의사표현이 확실하고 자기주장을 거리낌 없이 말한다. 예의와 체면 같은 형식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담백함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이들에게 솔직한 소통을 위해 술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술을 좋아하는 꼰대들이 찾는 핑계꺼리로 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