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솔로몬이자 한심한 글쟁이여,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네! 꼬치꼬치 따지려 들지 말게나! 태어나셨나, 안 태어나셨나? 당연히 태어나셨지, 바보같이 굴지 말라고. 돋보기로 마실 물을 들여다보면 말이지 -이건 어떤 기술자가 말해준 얘긴데- 맨눈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들이 우글우글하다는 거야. 벌레를 보았으니 물을 마실 수가 있나. 물을 못 마시니 목이 타서 죽고 말겠지. 당장 돋보기를 깨부수게, 보스, 그러면 작은 벌레들은 다 사라진다네. 그러면 자네도 목을 축이고 다시 기운이 번쩍 나겠지!"

맥심 화보의 핵심 코드는 비아냥이다. 성범죄를 미화하려는 게 아니다. '나쁜 남자'란 말의 사전적 의미만을 부각시키기 위해 '악인 전문 배우' 김병옥을 모델로 삼고, 여성들이 좋아한다는 '나쁜 남자'에 대한 의미를 반어적으로 비유하고자 했다. 흔히 말하는 '나쁜 남자'에서 '나쁜'이란 부분이 갖고 있는 이중적이고 모호한 의미들을 꼬집는 것이다. 특히 "진짜 나쁜 남자는 이런 거다, 좋아 죽겠지?"란 텍스트까지 덧붙이면서 그 비아냥의 의도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영화에서 하정우가 조폭을 연기하면(사실 어떤 범죄자를 연기해도) 사람들은 멋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김병옥이 같은 조폭을 연기할 땐 그렇지 않다. 실제 조폭들이 풍길 것 같은 무서움, 삭막함 같은 걸 느낀다. 그의 인상부터가 실제 조폭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출자들은 김병옥 같은 배우들을 악역으로 쓴다. 그 배역을 미화하기보다는 극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맥심측이 화보 장면을 미화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하정우 같은 배우를 화보의 모델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정말 악인 같이 악인을 연기했던 김병옥이 모델이었고 친절하게도 그의 영화 이력까지 나열하며 그가 왜 사전적 의미의 나쁜 남자에 걸맞는지까지도 설명해주었다. 이 화보에 필요한 건 멋있는 배우가 아니라 악인이 어울리는 섬뜩한 배우였기 때문이다.

단지 어떤 장면을 멋스럽게 다룬다고 해서 그것을 미화하는 건 아니다. '베테랑'의 유아인도 깔끔한 수트핏과 유려한 액션을 선보였다고 해서 개념 없는 재벌을 미화시켰던 건 아니다. 이 화보도 마찬가지다. 잡지 커버에 맞는 화보로서의 미적 퀄리티만을 갖췄을 뿐 김병옥이 연기하는 '나쁜 남자'를 미화시키려는 의도는 찾아볼 수 없다. 왜냐면 최대한 멋있지 않아야만 여성들이 싫어할 수 있기 때문이다('베테랑'에서도 유아인이 밉상이 될수록 결말이 사는 것처럼). 또 그래야만 여성들이 말하는 '나쁜 남자'의 의미에 대해 비아냥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사람을 잘 찾는다. 탐사보도에서 중요한 건 인물이다. 그런데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의 사람 찾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심지어는 경찰도 못찾는 사람까지 찾아낸다. 안 나올 것 같은 목격자부터 시작해서 도망다니거나 잠적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찾아내어 카메라에 담고 인터뷰를 딴다. 매번 수소문 끝에 찾아냈다고 하는데 그 수소문이라는 게 어떤 과정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을 때까지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끝내 결과물을 얻어내는 거다. 그만큼 탐사보도의 완성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고 시청자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다.

둘째, 스토리텔링이 좋다. 흡인력이 상당하다. 초반에는 호기심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몰입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종반에는 그 궁금증이 탁 풀리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때로는 전개에 반전을 주어 시청자들의 예상을 뒤엎는 짜릿함을 주기도 한다. 마치 기승전결이 잘 짜여진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보니 연식이 오래된 시사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꾸준한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젊은층 사이에선 마니아가 형성될 정도.

셋째, 시스템을 문제삼는다. 가끔은 그렇지 않은 회차도 있지만 '그것이 알고싶다'의 대부분은 살인, 사기 같은 미시적 사건들을 다룬다. 앞서 스토리텔링이 좋다고 했지만, '그것이 알고싶다'가 추리소설과 다른 건 허구가 아닌 실제 일어난 사건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사람의 실제 죽음을 흥미나 호기심의 관점에서 접근해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의구심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어떻게 그러한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제도적 결함이나 장치의 미비 등을 따져보고 때로는 이를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미시적인 수준에서 흥미를 끄는 데 그치지 않고 구조와 시스템을 고민하는 탐사 저널리즘의 본분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뉴스만 보고 있으면 메르스 때문에 곧 나라가 망할 것 같고 북한과의 전쟁도 머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인터넷, 케이블TV, 스마트폰 같이 뉴스를 접할 수 있는 채널은 늘어났지만 알멩이 있는 뉴스는 드물다. 이슈에 대한 반복적인 보도만 수두룩. 오히려 기사 한 꼭지에 투입되는 시간과 노력은 과거보다 훨씬 줄어든 것 같다. 음식으로 치면 단시간에 만들어낼 수 있는 패스트푸드만 가득하다랄까. 문제는 자극적인 정크푸드에 길들여질수록 건강한 음식은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 학교를 다녀야 할까. 학교를 다녀야만 첫째로 사회 진출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고, 둘째로는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한 사고력을 갖출 수 있다. 우리 교육에서 문제되는 것은 후자다. 일제부터 군부독재까지 정당성이 빈약했던 집권층은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의 교육은 그저 산업화에 필요한 지식을 주입시키는 데 몰두해왔다.

문제는 그것이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교육은 그대로다. 학생들에게 생각하고 고민할 시간을 주는 것이 비효율적인 교육이라는 건 과거 위정자들이 지어낸 편견일 뿐이다. 심지어 우리나라만큼 입시가 치열하고 학벌 지향적인 영미권에서도 토론식 수업이나 사고력 교육은 충분히 병행되고 있다. 유럽 같은 곳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의 성숙한 시민의식은 교육으로부터 나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