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증명하는 것이 왜 부끄러운 일일까.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무상급식을 해야 한다는 논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위 복지론자들 입에서 나온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그건 복지를 적선 따위로 여기는 말이기 때문이다. 빈곤을 부끄럽게 여기는 건 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다. 하지만 복지를 말하는 사람은 빈곤을 부끄러운 걸로 여겨서는 안 된다. 복지가 필요한 건 무능하고 게으른 빈자들을 구제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빈곤은 구조적 산물이기 때문에 사회적 책임으로서 복지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빈곤은 죄가 아니다. 아니, 죄가 아니어야 한다.

사실 다수결의 원리라는 건 여럿이서 무엇을 결정하고자 할 때 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에 불과한 것이지, 그 과정이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다수결의 방식은 자주 쓰이는데, 점심 메뉴를 고를 때 처럼 선택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나 그 선택을 책임질 사람이 없을 때 주로 쓰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다수결은 비겁한 수단이기도 하다. 선택의 결과에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수결의 원리는 민주적 절차를 보장해주는 불가결한 가치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맹신하거나 남발하는 건 절대 이롭지 못하다.

반려동물은 상대적인 거다. 인도인들에게는 소가, 타잔에게는 치타가, 나오미 왓츠에는 킹콩이, '나홀로 집에' 케빈의 형에게는 타란튤라 거미가, 그 속편에 나오는 비둘기 아줌마에게는 비둘기가, '프리윌리'의 소년에게는 범고래가 각각의 반려동물이 될 거다. 빅뱅의 순간 천지신명의 조물주라도 강림하여 개와 고양이는 인간의 반려동물이라 반포해 놓은 게 아닌 이상, 개나 고양이는 인류의 반려동물이라는 명제는 입증 가능한 과학적 진리도 아니고 어떤 보편적인 당위론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 개란 동물은 그냥 돼지나 닭 같은 식용 가축에 불과한 것이고, 또 어떤 이들에게 도시의 길고양이는 설치류나 비둘기 같은 존재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이 단순한 논리를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달리 말해 소고기를 먹었다는 이유로 인도인들에게 돌매질을 당해도 개의치 않다는 건가.

아파트 주차장에서 길고양이 밥을 주고 있는 아주머니를 봤다. 스스로를 캣맘이라고 부르는 이들인데, 좋게 보이진 않았다.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나 권리는 그것을 책임질 수 있는 만큼만 주어지는 것이다. 시쳇말로 공공장소에서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었다면 그 길고양이들이 싼 똥도 그들이 치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남이야 불편하든 말든 순전히 본인의 만족을 위해 길고양이 밥을 주는 건 자유가 아니라 방종에 가깝다. 이들은 고양이를 꺼리는 사람들을 미개한 인간이라고 하지만, 고양이를 싫어하는 건 미개한 게 아니다. 오히려 고양이를 가엾게 여기는 사람이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왜 당신은 자기와 같지 않냐'며 손가락질 하는 게 더 미개한 거다.

무상급식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반드시 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모두 논리가 충분치 않다. 그저 진영논리만 있을 뿐이다. 과연 무상급식이라는 게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상징적인 논점이 될 만큼 유의미한 가치충돌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