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장훈이나 서경덕 교수가 앞장서고 있는 동해 표기 광고가 썩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동해/일본해 표기 문제는 독도 문제와는 좀 다르다고 보는 편이다. 독도는 주권에 관한 문제다. 일본이 독도를 분쟁지역화시키는 것은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따라서 경각심을 갖고 규탄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동해/일본해 표기는 주권이라기보다는 고유 지명에 관한 문제다. 표기에 따라 어떤 권리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편의상 합의된 지명을 정하는 것일 뿐이다. 일본해라 불린다고 해서 그 해역이 일본의 영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독도가 다케시마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쿠바의 섬들이 멕시코만에 있다고 해서 이 섬들이 모두 멕시코 영토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 일본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는 국내 정서상 일본해 표기가 달갑지 않은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국내의 감정을 해외의 여러 나라들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본해는 이미 국제적인 표기로 자리잡은 상태이고, 대부분의 국가가 이 표기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다. 우리가 겪은 역사적인 맥락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해란 명칭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같은 걸로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해외 국가들에게 있어 일본해를 동해로 바꿔(혹은 동해와 일본해를 동시에) 표기해야 할 당위는 딱히 찾아볼 수 없다. 이들에게 '일본해는 잘못된 표기다, 동해로 표기해야 한다'는 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건 이런 민족주의적 담론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할 진보 진영의 태도다. 이들은 일본해 표기 문제에 대해 정부가 더 강경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심상정 대표의 발언처럼). 집권여당이 친일 행적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대비되는 스탠스를 취하고 싶은 걸까. 애국주의, 민족주의적인 감정에 제동을 걸어야 할 이들이 제 목소리를 못내고 있다는 건 결코 긍정적인 현상이 아니다. 직접상대방인 일본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일본의 진보주의가 자국 내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던 탓에 지금의 일본은 맹목적인 쇼비니즘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는 우리나라의 진보진영(혹은 그 일부)이 갖고 있는 스스로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겪었던 특수한 맥락 때문이긴 하지만, 그동안 진보진영은 유독 민족주의적 담론에 얽매여왔다. 그 연유에 대해선 더 공부해봐야겠지만, 강점을 당하면서 민족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얻기도 했고 위정자들이 탄압의 구실로 반공을 이용한 탓도 크다. 거기다 반일 정서에 기름을 붓는 일본의 몰염치도 한몫했다. 물론 진보/보수의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 사회 진보진영은 민족주의와 그 자신을 동일시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국민 정서에 의한 눈치보기인지 아니면 태생적으로 무감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경향이 한 사회에 얼마나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이야기한다는 건 참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이지만, 어쨌든 욕하면서 닮아가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홍명보가 쓴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파벌이나 연줄 때문이 아니라, 선수 선발에 관해 본인이 공언한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미리 밝혀둔 기준을 스스로 철회하는 건 신뢰를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또 박주영 기용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선수 선발은 감독의 권한이고, 어차피 감독은 결과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홍명보가 같은 고려대 출신이라 박주영을 뽑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학벌 콤플렉스라도 갖고 있는 건가. 올림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냥 고집으로 불평하면 될 걸 뜬금없이 학연이나 파벌 이야기에 왜 열을 내고 있는 건지.

어쩌면 진보의 과정이란 건 계량화, 수치화된 영역이 확대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세밀하게 수치화되지 않은 걸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심지어 내가 얼마나 매력있는 이성인지도 결혼정보회사의 데이터베이스를 통하면 금방 점수화되는 세상이니까. 하긴 디지털의 세계가 0과 1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돌이켜보면 그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매트릭스' 속 사람들이 초록색 숫자들의 세계에 사는 것처럼 말이다. 수치화라는 건 대상에 대한 관찰과 분석을 용이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분석이나 비교가 용이해진다는 건, 결국 예측의 정확성을 높여준다는 말일 것이다. 예측 가능한 영역이 넓어지고 예상이 가능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시간을 쪼개어 계량화한 시계의 발명을 근대성의 발로로 보는 식자들처럼, 예측 가능성이란 건 현 사회의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어쨌든 계량화 덕분에 지금의 세상은 뭐든 쉽게 예측이 가능한 사회가 됐다.

그런데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처럼 예측이 가능한 건 재미를 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앞으로의 상황이 명확하지 않고 불확실할 때 궁금증이 유발되고 기대나 두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도 그렇다. 뇌의 감정시스템은 불확실한 상태에서 쾌감물질을 방출시킨다고 한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진화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스포츠를 본다. 일상에서는 느끼기 힘든 불확실성의 쾌감과 재미를 위해. 현대의 일상에서는 거의 모든 것들이 예상 범위 내에 있지만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스포츠는 어떤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가 없다.

스포츠의 영역에 계량화된 분석이 도입되지 않은 건 아니다. 야투성공율, 평균득점, 서브리시브율, 수비율, 출루율.. 우리가 즐겨보는 상당수의 종목은 이미 숫자들에 잠식당한지 오래다. 메이저리그에서 폴 디포데스타의 머니볼 이론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건 야구에서 최소한의 직감, 주관적 판단, 심지어는 스타플레이어까지도 통계학적인 숫자 앞에서는 온전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물론 야구는 축구와는 다른 특성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다만 많은 종목에서는 이런 숫자의 잠식이 상당 수준 진행된 데 반해, 축구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축구라고 통계학적 분석에서 자유로웠던 건 아니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이들이 축구에 물리적 데이터를 도입하려 했고 그 통계로 유효한 분석을 시도했다. 벵거, 코몰리, 앨러다이스 등. 특히 앨러다이스가 상대 수비수마다 어느 방향으로 볼을 걷어내는지 통계를 내고 그 위치에 선수를 배치시켜 세컨 볼에 대한 점유를 높였다는 사실은 놀랄만 하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런 시도가 기존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킬 정도로 획기적인 성과를 낸 건 아니다. 앨러다이스의 실험은 여전히 세트피스에 국한되어 있고, 그토록 센세이셔널했던 벵거는 어느새 10년 무관을 눈앞에 두고 있는 처지다. 코몰리 또한 앤디 캐롤이라는 희대의 오버딜을 남긴 채 물러난 걸 보면 그 통계라는 게 신통치만은 않아보인다.

그래서 축구는 재밌는 것 같다. 훗날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통계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스포츠, 다시 말해 불확실성이 가장 높은 스포츠라고 할 수 있을테니까. 무려 22명이, 팔만 쓰지 않으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규칙으로(바꾸어 말하면 어깨 이하를 제외한 신체의 전 부위를 쓸 수 있는 자유분방함으로), 거의 두 시간 내내 넓은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다보니 고려해야 할 변수가 셀 수 없이 많다. 따라서 개별화하고 수치화하여 분석한들,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내기가 여간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위치선정 같은 건 통계학적인 논리로는 설명해내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다. 위치선정은 매순간 선수의 직관적인 감각으로 공의 예상 위치를 미리 판단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연에 의한 건 아닐까 싶다가도, 특정 선수들(예를 들어 인자기나 라울, 말디니 같은)을 보면 위치선정도 실력 중 하나라는 걸 부인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미 축구게임 같은 데서는 이런 위치선정이 선수 수준을 나타내는 하나의 스탯으로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상에서나 가능한 일일뿐, 실제 선수의 위치선정 능력을 수치화하여 비교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축구가 가지고 있는 불확실성에 의한 흥미진진함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렇게 축구를 수치화하고 통계학적으로 분석하려는 이들의 시도를 지켜보는 것 또한 쏠쏠한 재미가 될 것 같다. 그 과정이 녹록치 않더라도 어쨌든 팬들의 입장과는 달리 현장에서 팀을 운영하고 자금을 투자하는 이들에겐 불확실성을 제어하는 게 급선무일테니까. 더구나 축구는 여타 사회과학에 비하면 단순하다. 정해진 룰이 있고 정해진 목표가 있다. 아마 축구의 위치는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사이 정도에 있지 않을까. 어쨌든 축구를 유의미한 통계적인 분석 아래에 두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이고, 불확실성과 분석가들의 싸움도 더욱 흥미진진해질 것은 분명한 일이다.

화가 한 명이 있다고 하자. 화가가 그림을 그리려면 색을 선택해서 채색해야 한다. 물론 어떤 색을 어떻게 조합할지는 전적으로 화가의 재량에 달려있다. 제3자가 나서서 어떤 색을 골라야할지 대신 선택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화가가 고른 색의 조합이 실망스럽더라도 그건 그림이 완성된 후 결과물로 평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화가의 채색 과정에 참견할 것이라면, 아예 화가란 존재를 없애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각자 좋아하는 색을 들고 채색을 하면 될 테니까.

축구도 마찬가지다. 선수를 뽑는데 있어 '공정성'이나 '객관성'을 최우선으로 따지려거든, 아예 감독이란 존재를 없애는 게 낫지 않을까. mvp 선정처럼 축구 전문가 백 명 모아놓고 포지션별 투표순위로 대표팀 구성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럴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돈을 받고 선수를 기용하는 비리를 저지르지 않는 이상 선수 선발과 운영에 관한 권한은 전적으로 감독에게 있다. 그래야만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처럼 본인이 생각하는 팀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팀의 성패는 경기 결과로 따지면 된다. 성과가 있으면 그 팀은 계속 그 감독의 체제로 가는 것이고, 결과가 나쁘다면 다시 새로운 감독이 선임되고. 이게 축구다.

축구에서 감독과 선수의 관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학연과 파벌 운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감독이 특정 선수를 편애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자신만의 기준과 관점으로 선수를 판단하고 팀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히딩크는 박지성을 편애했고, 아드보카트는 이호를 편애했고, 최강희는 이동국을 편애했다. 그런데 이들의 '편애'가 언론의 뭇매를 맞을만큼 그렇게 염치없고 비상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홍명보와 박주영에게만 다른 잣대가 주어지는 걸까. 같은 고려대 출신이라서? 감독과 선수의 관계는 무슨 문생과 좌주의 관계 같은 게 아니다. 동문 지간이라 뽑아주는 게 아니란 말이다. 앞뒤 맥락 모두 생략하고 같은 대학 출신이기 때문에 선발했다고 말하는 건 좀 심한 비약이다. 소속팀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지만, 런던 올림픽에서 박주영 카드는 한 차례 적중했었고(당시 박주영의 상황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유일한 대체재라 할 수 있는 이근호와 김신욱마저 남미 전훈에서 박살난 판국에 박주영의 재발탁이 그렇게 비논리적인 걸까.

박주영을 고대 라인이라서 뽑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과연 축구협회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축구협회에 고대 라인 같은 실상은 없다. 축구협회 임원 중 고대 출신이 몇 명인지 구글링이라도 좀 해보고 난 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진정 축구협회 내 파벌을 문제삼고 싶었다면 정몽준이나 정몽규 같은 현대家쪽 이야기를 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아니면 축구계 전체로 시야를 옮겨 친축협(허정무, 황보관..)과 비주류(조광래, 차범근 등..)의 갈등을 이야기하던가.

그냥 박주영이 싫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좋겠다. 편법적인 절차로 병역 문제 해결했던 게 괘씸하고, 명문팀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된 것도 꼴 보기 싫었다고. 실체도 없는 연줄과 연고주의 들먹거리면서 홍명보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박주영에 대한 이런 반감을 가진 이들이다. 선수에 대한 반감이 최근 대두된 파벌과 연줄에 대한 경각심과 맞물러져 새로운 희생양을 만든 것이다.

지금은 쇼트트랙 파벌이나 김연아 은메달 같은 사건들로 감정이 과잉된 상태다. 그러다보니 평소에는 축구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이들마저 '파벌'이란 말만 듣고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라는 미디어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일까. 대상에 대한 신중한 통찰 없이 특정한 시각만 반복해내는 행태가 심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판단의 오류는 대상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일단 그 대상의 본질부터 이해하려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한다. 반드시.

일본의 우경화에는 고령화, 경기침체 같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일본은 2차대전 패전국 중 전범 처리가 가장 미흡했던 국가였다. 일본 내 무질서를 염려하여 천황이나 실질적 전범들을 처리하지 못했다는 미국측 기록이 최근 공개된 바와 같이 공산화 위협, 비용적인 문제 탓에 미군은 전범 처리에 소극적이었다. 결국 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은 지금의 자민당까지 명맥을 유지해왔다.

이와 대조적으로 독일에서는 냉정한 과거사 청산 작업이 있었다. 이탈리아 역시 자국민들 스스로 무솔리니를 광장에 매달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독일과 이탈리아는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유럽의 일원이 되었다. 특히 독일은 전범 국가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성숙한 시민 국가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이런 사례를 통해 과거사 청산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에는 아직도 제국주의를 영광의 시기로 추억하는 이들이 정권을 잡고 있다. 우경화란 흐름도 특정한 이익을 위한 고도의 계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곪고 있는 내치를 민족주의로 타개하고자 하는 자민당의 고육지계에 가깝다.

문제는 그로 인해 잃을 게 너무 많다는 점이다. 우경화는 자민당 중심의 내부적 결속이나 집권 유지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에선 벌써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미국마저도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을 정도로 주변국들의 시선은 싸늘해지고 있다. 일본이란 국가 브랜드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고령화와 중첩되면서 일본 사회 자체가 경직되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경제는 1류, 정치는 3류'라는 평가대로 일본의 정치계는 늘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 하다.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을 때 권력을 유지하던 집권 세력이 얼마나 민도와 유리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