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이를 해친다면, 나는 그를 어떻게 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일단 용서 따위를 시도하진 않을 거다. 내 아량이란 것이 그렇게 너그럽지도 못할 뿐더러, 용서라는 것이 꼭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용서도 물론 선하지만 용서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말해 복수 같은 걸 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선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드라마에서 복수는 항상 등장하는 서사이며 사람들은 그 복수의 과정을 통해 카타르시스는 물론, 심지어는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드라마에서만 있는 건 아니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도 바로 그 복수를 위해서다. 따라서 복수라는 건 몰가치적인 게 아니다. 최선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복수는 엄연히 선함의 영역에 있다.

당한대로 되갚아주는 것, 다시 말해 등가의 원리란 정의의 가장 기본적 원칙 중 하나이다. 작용이 있으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균형을 이루는 건 어떤 당위로서의 개념보다는 자연적 현상에 가까울 만큼 당연한 순리다. 복수라는 건 그 균형을 회복시키는 정의의 실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사람들은 복수를 가리켜 '잔혹한 정의'라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실세계에서는 법이란 게 있다. 법을 두면서부터 사람들은 이 법을 통해 복수를 실현해 왔다. 하지만 사실 법과 복수란 말이 한 문장 속에 잘 어울리지 않듯, 법을 통한 응보를 완벽한 복수라 할 수는 없다(함무라비의 동태복수법이면 모를까). 본래 법이라는 건 최선보다는 차악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법은 단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피하기 위해 채택된 공리적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법은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선 그 자체로 신성시되기도 하지만, 개인의 입장에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최선이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저스티스'나 '악마를 보았다' 같은 영화처럼(두 영화의 주인공은 각기 다른 선택을 하지만) 복수라는 정의의 실현에 있어 법은 개인에게 커다란 딜레마를 안겨주기도 한다.

간음이 죄악시되었던 건 부계 혈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지금이야 유전자검사로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이 아이가 내 아이가 맞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여성을 집안에 붙들어 두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계 사회에서는 결혼 제도가 일반화되고, 여성의 순결과 정절이 강조되어 왔다. 간음은 살인이나 역모 못지 않은 중죄로서 엄히 다스려졌다. 이는 십계명, 코란 등을 막론하고 고대 어느 지역의 성문법이든 전부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란 말이 유행했던 것처럼, 모든 걸 그의 탓으로 돌리는 현지의 유머를 스스로 시연하고 있는 오바마. 사실 '땡스, 오바마'란 말이 어떤 풍자나 해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직설적인 조롱이나 조소에 가깝다. 그럼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다. 반면 정치인들에 대한 조롱은 물론, 점잖은 패러디마저 전무한 이곳에서는 오늘도 힘 없는 이들만이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가치를 인정받는 건 편찬 과정과 그 기록물의 관리가 엄정하게 지켜져 왔기 때문이다. 무소불위의 국왕이라도 언제나 사관을 대동하고 다녀야 했고 실록은 물론 사초를 열람하는 것조차 꿈도 꾸지 못했다. 물론 완성된 실록이 수정됐던 적은 있었다. 선조실록과 현종실록이 훗날의 붕당론에 따라 개보수되었는데, 흥미로운 건 실록을 수정했던 집권당이 본래의 실록 원본을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조와 현종은 실록이 원본과 수정본 두 종류로 되어있다. 일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실록 수정이라는 어마무시한 일마저 서슴치 않았던 이들이 그토록 지우고 싶었던 기록을 병존시켰다는 건 아이러니한 사실. 꼬장꼬장했던 사대부들에게도 역사의 기록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란 성리학적 도그마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냉정하게 말해 한국 축구의 미래는 밝지 않다. 히딩크 세대에서 정점을 찍은 이후 끊임없이 내리막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는 아시아 팀들을 상대하면서도 점유를 포기하고 실리축구를 하는 팀이 되어버렸다.  이란이나 일본을 상대한 것도 아닌데도. 2002년 이후 투자도 활성화되고 유소년 시스템이나 인프라 같은 저변도 좋아지면서 많은 기대가 있었지만 정작 그 효과는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요인은 중동리그(요즘엔 중국리그도 매한가지)에 있다. 과거에는 J리그 클럽들이 그랬던 것처럼 최근에는 중동 클럽들이 오일머니를 앞세워 국내 실력파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다. 거액의 이적료를 받는 K리그 클럽들은 물론이고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들의 입장에서도 중동행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중동리그가 선수 기량 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중동은 전체적인 리그 수준도 낮은 편이고 리그 내의 격차도 크다. 팀별 전력차이도 많이 나고 용병과 자국 선수들의 수준차도 크다. 석유재벌 구단주 덕분에 영입된 한물 간 용병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지만 사실 그 용병들도 열심히 뛰진 않는다. 커리어를 위해 중동에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중동에 가는 건 단지 선수 황혼기에도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리그에서 무슨 기량 향상이 있겠는가.

축구는 수준급 선수 한두 명 있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우리팀도 기성용, 손흥민 같은 뛰어난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 선수들과 그들을 받쳐주는 선수들과의 수준 차이가 컸다. 특히 중동리그 출신들은 오히려 기량이 뒤로 가버린 느낌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동이나 중국은 K리그보다도 못한 평가를 받는 리그다. 한 마디로 국내에서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이 돈 때문에 더 낮은 급의 리그로 팔려가고 그곳에서 기량이 정체되고 있는 것이다. 프로의 세계에서 금전적인 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유럽이나 남미 레벨의 수준과 점점 더 멀어져가는 대표팀을 봤을 땐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