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무상시리즈가 대세라지만 무상버스는 좀 과하지 않나. 가뜩이나 무상보육, 무상급식, 무상돌봄교실 때문에 나라와 지자체의 곳간이 텅텅 비어가고 있는 마당에 무상버스에 필요한 재원은 또 어디서 충당한단 말인가. 경기도가 무슨 소도시도 아니고. 이번에도 역시 증세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대신 기존의 소모적인 예산 비용을 줄이면 그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 듣고 보니 너무나 익숙한 레퍼토리. 무상시리즈를 약속하는 정치인 치고 세금 더 걷겠다는 정치인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무상버스를 운영하면 버스 수요가 늘어날 것이므로 자가용이 줄고 경기도의 교통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건 대체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이들이 버스비 아까워서 차를 몰고 다니는 건 아니다. 버스비를 아까워 할 사람들이면 애초에 차를 끌고 나오지 않았겠지. 그말인즉슨 버스요금이 무료가 되든 말든 자가용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는 변함이 없을 거라는 얘기다. 진정으로 러시아워의 교통 지옥을 해결하고자 했다면 그 돈으로 출퇴근 시간의 파격적인 증편 배차, 탄력 운행 같은 현실적인 방안을 내놨어야지, 뜬금없이 무상버스를 운행하겠다는 건 '버스 공짜로 타게 해줄테니 표좀 주시오'라고 손내미는 거랑 무엇이 다른가.
동양과 서양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주소 표기에서 나타난다. 서양에서는 '나'가 중심이다. 주소 체계가 건물, 도시, 주, 국가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다시피 동양은 그 반대다. 큰 덩어리로부터 시작해서 국가, 주, 시, 동, 건물 순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건 의식의 흐름이 다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서양에서는 개인을 기준으로 확산되는 방식을 선호한다면, 집단과 관계에 대한 의식이 강한 동양에서는 전체에서 개인으로 수렴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면 개념으로 주거지를 묶고 있는 기존의 주소 체계는 이런 동양의 사고방식에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이나 대만 같은 나라에서도 구역 중심의 주소체계를 갖고 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혹자는 지번제도를 일제의 잔재라고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지번'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 구역 중심의 주소체계 자체를 그렇게 보는 것은 무리다. 바로 위 조선시대만 해도 부목군현, 그 아래에는 또 면리가 갖추어져 있을 정도로 면 개념의 행정구역은 역사적으로도 일반적인 형태였다.
문제는 새롭게 시행된 도로명 주소라는 게 이런 면 개념의 체계를 도로 중심의 선 개념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것이다. 도로명 주소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도로명 주소와 기존의 주소를 선진적인 것과 후진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도식이 그려져 있는 것 같다. 주소체계에도 발전 단계에 따라 보편적인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다뤘듯 동양인과 서양인이 서로 상반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우열을 매기지 않는 것처럼, 기존의 주소체계와 도로명 주소체계도 단지 문화·인류·역사적인 다름에서 기인한 것은 아닐까.
바둑판형 도로 체계를 근대적 산물로만 여기는 것은 오산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서구에서는 도시를 설계할 때 주요도로부터 건설했다. 서구의 공통조상격인 로마제국은 식민지에 많은 도시를 건설했는데 사실 이 콜로니들이 고스란히 유럽의 주요 도시가 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중앙에 격자형 도로를 먼저 건설한 후 그에 맞게 건물을 축조하는 순이었다. 유럽의 어디를 가도 광장은 꼭 등장하는 것처럼 중심부에 광장이나 성당, 시장을 조성하고 그와 연결된 메인 스트릿을 중심으로 생선 가시처럼 뻗어나가는 길이 만들어져있다. 그리고 그 길을 마주하여 양쪽으로 반듯하게 건물이 들어서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생기는데, 한국의 도시들의 서구 도시 미관을 못따라가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가옥은 길을 향하지 않는다.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남쪽을 향해 집을 짓다보니 도로에서 건물의 옆면이나 뒷면이 자주 보이게 된다. 이로 인해 도로를 따라 건물의 앞면이 나란히 들어서있는 유럽의 거리는 잘 정돈된 느낌을 주는 반면, 건물과 도로가 미적인 통일감을 이루지 못하는 우리의 거리는 다소 산만해 보이기 마련이다. 이 텍스트를 어디서 읽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굉장히 공감가는 부분이 많은 분석이다. 어쨌든 도로와 상관 없는 집들의 배치는 그만큼 주거 양식이 도로와 큰 상관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좀 더 관점을 넓혀서 본다면, 전통적인 도시 설계 순서도 서양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도시를 건설할 때 우선되었던 건 풍수지리 개념이었다. 계획도시였던 한양을 만들 때에도 먼저 풍수지리설에 따라 경복궁 같은 왕궁의 입지를 정했다. 그리고 그 후에 정해진 지점을 잇는 길을 냈다. 물론 종로 같은 중심 도로가 있었지만 서구처럼 그 도로가 도시 설계의 기준이 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서양에는 -rue, -street, -road와 같은 거리 중심의 동네 이름이 많은 반면 우리는 -골, -재처럼 자연 지형에서 따온 동네이름이 대부분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와 같이 길이라는 건 장소와 장소를 잇는 매개였을 뿐, 그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점점 친구들이나 선배들의 결혼식이 늘어나고 있다. 결혼식을 다녀올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을 위해 또 누구를 위해 결혼식을 하는 걸까. 오로지 결혼식 '안'에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객들, 친지들, 웨딩홀 직원들, 심지어 신랑과 신부까지. 웨딩홀은 결혼이란 걸 찍어내는 공장처럼 한 시간 단위로 신랑 신부와 하객들을 우르르 쏟아낸다. 피로연장에서는 다른 결혼식에 온 사람들이 섞여 앉아 말 그대로 식사만 한다. 같이 밥을 나눠먹는 잔치 같은 건 없다. 신속하게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야 다음 타임 하객들의 자리가 생긴다.
아무도 즐길 수 없는 결혼식을 채우는 건 온갖 허례허식들이다. 치렁치렁한 웨딩홀, 일회용 꽃장식과 화환, 나눠먹지도 않을 케익 컷팅, 듣는 사람 없는 축가. 보여주기 위해 아니면 남들을 따라 하기 위해 하는 이런 의식과 절차들은 그 유래가 어디서 어떻게 전해온 건지도 불분명한 게 대부분이다. 빅맨 콤플렉스나 허세적인 소비 심리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는 웨딩사업자만이 웃음을 지을 뿐. 결혼식이 왜 사회병리가 되었는지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만, 오늘은 그저 푸념하는 것이니 각설하고.
가족, 친척, 친구, 동료, 선후배 등. 내 지인들이 오로지 나를 위해 모이는 경우는 내 삶에 딱 두 번 있을 수 있다. 결혼식과 장례식. 그나마 살아있는 동안 지인들을 만나는 건 결혼식이 유일하다. 그 반가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고 서로를 소개시켜 주고 다 같이 만찬을 나눌 수 있는 인생에서 유일한 몇 시간. 그 결혼식이란 시간을 헛되이 쓰고 싶지 않다. 나와 아내, 사람들 모두 결혼식 '안'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 물론 남들이라고 이런 결혼식을 하고 싶지 않아서 못하는 건 아닐게다. 현실에 순응하고 예의라는 걸 차리다보니 그렇게 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철없는 생각은 계속된다.
사실 우리나라 컬링 대표팀이 왜 올림픽에 출전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 국민 중 대다수는 컬링이란 종목 자체를 아예 모른다. 기준에 맞는 국내 컬링장도 경북에 있는 한 곳뿐이다. 그나마도 실업 선수들이 사용하는 터라 일반인들의 접근은 극히 어렵다. 그런데 컬링 대표팀이란 걸 꾸려서 올림픽에 나선다고 한들 그게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특정 스포츠에 대한 무관심은 어떤 죄악 같은 게 아니다. 컬링 선수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어렵게 훈련을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국내에는 컬링을 아는 이도 즐기는 이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수요가 없다면 그 스포츠는 여가적 수준에서 향유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고 올림픽 같은 데에 참가하지 말라는 건 아니다. 참가할 수 있다. 하지만 협회 같은 민간 차원에서 주관해야 할 일이지 국가가 나서서 지원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종 비인기 스포츠 종목에 지원되는 비용들, 결국 우리가 다 부담한다. 국민이 부담하는 각종 세금, 체육시설 이용료가 국민들의 생활체육을 위해 쓰여지는 게 아니라 소수 엘리트 체육인을 양성하기 위해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체육진흥기금만이 아니다. 지자체나 기업(기업의 실업팀도 면세나 보조금 같은 혜택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결국엔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나 진배없다)의 실업팀 운영 비용을 함께 고려한다면 어마어마한 규모다.
그 막대한 비용을 태릉선수촌 같은 곳에 꼴아박고 있으니,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늘상 만성적인 체육시설 부족에 허덕이고 있으며 그나마 사용할 수 있는 시설도 비싼 이용료를 지불해야 한다. 시설은 부족한데 수요는 넘치다보니 민간 시설이 많이 들어선 것도 문제다. 두어 시간 운동장을 빌리는 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다보니 공만 있으면 되는 축구도 이제는 돈 없으면 못하는 스포츠가 된지 오래다.
올림픽 순위가 국력이 아니라, 국민들의 생활체육 수준이 곧 국력이 아닐까. 위로부터의 스포츠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스포츠, 보여지는 스포츠보다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자리 잡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컬링 스톤 살 돈 3600만원이 있으면 공원 구석에다가 작은 농구장이라도 하나 짓는 게 훨씬 의미있지는 않을까.
가수 김장훈이나 서경덕 교수가 앞장서고 있는 동해 표기 광고가 썩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는다. 동해/일본해 표기 문제는 독도 문제와는 좀 다르다고 보는 편이다. 독도는 주권에 관한 문제다. 일본이 독도를 분쟁지역화시키는 것은 우리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나 다름없다. 따라서 경각심을 갖고 규탄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동해/일본해 표기는 주권이라기보다는 고유 지명에 관한 문제다. 표기에 따라 어떤 권리가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편의상 합의된 지명을 정하는 것일 뿐이다. 일본해라 불린다고 해서 그 해역이 일본의 영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독도가 다케시마가 되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이나 쿠바의 섬들이 멕시코만에 있다고 해서 이 섬들이 모두 멕시코 영토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물론 일본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는 국내 정서상 일본해 표기가 달갑지 않은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국내의 감정을 해외의 여러 나라들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본해는 이미 국제적인 표기로 자리잡은 상태이고, 대부분의 국가가 이 표기를 바꿔야 할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다. 우리가 겪은 역사적인 맥락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해란 명칭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같은 걸로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해외 국가들에게 있어 일본해를 동해로 바꿔(혹은 동해와 일본해를 동시에) 표기해야 할 당위는 딱히 찾아볼 수 없다. 이들에게 '일본해는 잘못된 표기다, 동해로 표기해야 한다'는 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러니한 건 이런 민족주의적 담론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할 진보 진영의 태도다. 이들은 일본해 표기 문제에 대해 정부가 더 강경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심상정 대표의 발언처럼). 집권여당이 친일 행적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대비되는 스탠스를 취하고 싶은 걸까. 애국주의, 민족주의적인 감정에 제동을 걸어야 할 이들이 제 목소리를 못내고 있다는 건 결코 긍정적인 현상이 아니다. 직접상대방인 일본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일본의 진보주의가 자국 내에서 제 역할을 못하고 있던 탓에 지금의 일본은 맹목적인 쇼비니즘으로 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는 우리나라의 진보진영(혹은 그 일부)이 갖고 있는 스스로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겪었던 특수한 맥락 때문이긴 하지만, 그동안 진보진영은 유독 민족주의적 담론에 얽매여왔다. 그 연유에 대해선 더 공부해봐야겠지만, 강점을 당하면서 민족적 자존심에 큰 상처를 얻기도 했고 위정자들이 탄압의 구실로 반공을 이용한 탓도 크다. 거기다 반일 정서에 기름을 붓는 일본의 몰염치도 한몫했다. 물론 진보/보수의 개념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들 때문에 우리 사회 진보진영은 민족주의와 그 자신을 동일시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국민 정서에 의한 눈치보기인지 아니면 태생적으로 무감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경향이 한 사회에 얼마나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를 이야기한다는 건 참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이지만, 어쨌든 욕하면서 닮아가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홍명보가 쓴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 파벌이나 연줄 때문이 아니라, 선수 선발에 관해 본인이 공언한 원칙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미리 밝혀둔 기준을 스스로 철회하는 건 신뢰를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또 박주영 기용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선수 선발은 감독의 권한이고, 어차피 감독은 결과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홍명보가 같은 고려대 출신이라 박주영을 뽑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학벌 콤플렉스라도 갖고 있는 건가. 올림픽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냥 고집으로 불평하면 될 걸 뜬금없이 학연이나 파벌 이야기에 왜 열을 내고 있는 건지.